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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시작을 준비하는 태도 (15) (25/43)



〈 25화 〉시작을 준비하는 태도 (15)

결국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었던 그녀가 깨어난  새벽이 한창이던 시간이었다.



"오빠, 오빠……?"




이불 속에서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를 건져올린 나는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일어났어?   자도 되는데."


"……지금 몇 시에요?"

"새벽 3시 조금 넘었어."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고 일어난 후 주변이 낯설게 보이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조는 것처럼 고개를  떨어트린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오빠, 나 입을 옷 좀 가져다 주세요."


"어? 어어, 그래. 잠시만 기다려."

자고 일어나니까 제정신이 든 건지,

혹은 간신히 수치심이 돌아온 건지.

"자, 여기 티셔츠랑 바지."

옷을 건네받는 동안에도 좀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XL라 서윤이한테는 사이즈가  크겠다. 미안해."

"괘, 괜찮아요. 준비를 못한 건 저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이건 편의점에서 사온 속옷."

"……감사, 합니다. 근데 오빠?"


"더 필요한  있으면 말해. 사올 테니까."


"그, 그게 아니라……갈아입을 동안만 자리, 비켜주시면  될까요."

이제 와서?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결국은 뭐, 이런 여자친구다.

간신히 한 발자국 내디뎠다 싶어서 돌아보면 제자리걸음이고,

뒷걸음질 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줘야 할 판국이니 별 수 없지.

"다 갈아입으면 불러. 알았지?"




안 그래도 심정이 복잡한 애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얌전히 화장실로 향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최소한 이번엔 심심하진 않았다는 거다.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는 동물이거든.


뭐, 그래봤자 옷을 입는 것 뿐이라 5분도 안 걸렸지만.



"배고프지? 빵 사왔는데 좀 먹을래?"



다소곳이 침대에 앉아 다릴 흔들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숙이면 가슴이 훤히 드러날 만큼 헐렁헐렁한 남자 옷에,

내 바지는 도저히 길이가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입게  레깅스.

집에서 묵고 가는 여자친구의 복장으론 이보다 더 완벽할  없었다.

"칫솔이랑 이것저것 사왔으니까 필요하면 말해."

"그, 그렇게까지  해주셔도 되는……데."

"뭐 어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든 것 같아서 좀 그래요."

"됐어. 남도 아니고. 서로 챙기는 거지. 괜히 사귀는 사이겠냐."

가볍게 흘려보낸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유를 데우기 시작했다.


"지금 막 일어난 참이니까 커피가 더 좋으려나?"

"아, 아뇨. 우유……좋아해요.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많이 먹고 커야지."


"……우유 마시면 커진다는 건 전부 거짓말이에요."


아무리 잠이 덜 깼다지만, 너무 통상운행이라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대체 잠들기 전에 보여준 요망함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기분이 좋아지면 온화해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섹스 전과 후의 차이가 이렇게 심해도 되는 걸까 싶은데.




"사실 서윤이가 자는 동안 밖에 나가서 30분 정도 고민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장난기가 동한 나는 싱크대에 손을 짚었다.

"일어나면 배고플 텐데 뭘 먹고 싶어 하려나, 하고."

"저, 저는 대충 아무거나 다  먹는데……"

"그래서 선지 해장국이랑 복지리탕 중에 고민했어."



흔들흔들, 번갈아가면서 흔들리던 발이 움직임을 멈췄다.


"역시 새벽엔 해장국 아니겠냐. 24시간 영업이고."

"……그, 그건 오빠가  마셨을 때 얘기잖아요."

"그래서 맛있는 곳을 잘 안다 이거지."


"그냥 배달시켜 먹는 것도……괜찮을 것 같은데."


"근데 이 근처는 해장국 배달하는 집이 없더라고."


서윤이는 엄청나게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꾸만 부엌을 기웃거렸다.


당장이라도 내가 뚝배기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해장국에 깍두기 국물은 좀 아닌 것 같더라."

"……잘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그냥 빵 사왔어. 잘했지?"


"솔직히 말해서, 살짝 구사일생한 기분."

서윤이는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것처럼 "휘우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와중에도 혹시나 싶었는지 봉투를 들춰보긴 했지만.


"아, 여기 저번에 오빠랑 같이 갔던 가게다."

"거기서 사온 베이글 맛있게 먹었잖아."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기억해요??"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어지간히 남자친구를 못 믿는 건지, 아니면 전혀 기대가 없는 건지.

  따지고 싶었지만……마침 우유가  데워진 덕에 투덜거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옛다. 마셔라.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하읍!"

"……천천히 먹어. 체할라."

벌써 커다란 베이글 하나를 꺼내서 입 가득히 물고 있던 서윤이는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햄스터가 씨앗을 갉작거리는 모양새로 빵을 우물거리는 모습이……무척 행복해 보였다.

"……좋냐?"


"읍! 읍!"

"아니, 됐다.  시켜서 미안해."


먹을 땐 개도  건드린다던데 괜한 짓을 했네.

"서윤이 많이 배고팠나 보네."


"죄, 죄송해요."

"아냐. 잘 먹으니 좋네 뭐."

"……갑자기 배가 엄청 고파서."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서윤이는 어느새 반절 가까이 먹어치운 빵을 내려놓았다.

"오, 오빠는 안 드세요……?"


"신경 쓰지 말고 다 먹어."


"엄청 맛있는뎅."

"그래 보여."


"그럼  좋아하는 거라도……배고프지 않아요?"


"출출하면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지 뭐."

"……라면 너무 자주 먹지 마요. 몸에  좋아요."




나는 이런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해주는 여자친구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몸은 좀 어때. 허리 아픈 건 괜찮아?"


"……여기저기 욱신욱신."

"힘들면 말해. 주물러줄게."

"그, 그렇게까지 아픈 건 아니에요."



손사래를 친 그녀는 물끄러미 침대 옆에 놔둔 목줄을 응시했다.

"망가지거나 하진 않았죠……?"

"그게 걱정이야?"


"오, 오빠가 너무 세게 잡아당겼으니까……"

"괜찮아. 다음에 또 써도 괜찮을 만큼 튼튼해."

나는 "그보다."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좀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생생한 감상을 듣고 싶은데, 괜찮아?"


"감상……그러니까, 플레이에 대한 거?"


"뭐, 그것도 포함해서 이것저것."

"그, 그러지 말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세요."


"느낀 게 있을 거 아냐. 어떤 게 좋았다거나, 싫었다거나."



당연한 소리일진 몰라도, 감상이란 플레이 직후에 들어야 의미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거나 싫은 기억만 남아서 피드백이 힘들어지니까.


아직 당시의 기억이 생생할 때 들어야 불만이나 개선점 등,


여러 가지로 다양한 반응이 나오니까……신선도가 생명이란 말이지.



"가장 좋았던 건……역시 주인님이라고 부를  있었다는 거?"


"그건 그것대로 기대치가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서운하네."


"……기, 기대가 없진 않았어요. 목줄도 차고 싶었고."


"이렇게까지 세게 다뤄질  몰라서 그랬던 거야?"

"아무래도……좀 그렇죠. 저는 주인님이 다정한 쪽이 좋은데."




나는 "흐으음." 까슬까슬한 턱을 문질렀다.




"근데 마냥 부드럽기만 하면 서윤이가 말을 안 듣잖아."

"……다음부턴 말 잘 듣도록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나도 딱히 좋아서 혼내는  아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눈에 핏발 선 거 봤어요."

"아냐. 정말이야. 혼내는 쪽도 엄청 가슴이 아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봐주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결국은 뭐, 서윤이가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거지."


"……저 오늘 그렇게 많이 잘못했어요?"


"에이, 그렇진 않아. 기대보다 훨씬 잘해줬다니까?"

"잘 생각해보니까 오늘은 왠지 혼난 것만 떠올라서."

싫은 기억이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정말로 싫었는지는……글쎄, 본인만 알 수 있겠지만.



"다음엔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나 오늘 엄청 다정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냐?"

"목줄 채워주실 때까진 좋았는데……요."


"그 이후로는 아니었어?"

"……좀 뭐랄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서."

이미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플레이 내용을 반복해서 돌려본 나는 생각에 잠겼다.



"따라가기 힘들었다고 해야 하나. 머릿속이 공황상태였어요."

"사실……음. 그럴 것 같아서 가능한 조심하려고 했거든."

"처음이라서 봐준 거예요?"


"뭐, 그런 것도 있고. 어차피 알아서 자빠질 텐데 굳이? 싶었지."




서윤이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 괜찮아. 원래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나, 나도 좋아서 말을  듣는 게 아닌데."

"그야 그렇겠지. 혼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우린 지금 한창 SM 이야기 중이었다.

혼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암캐 같은 건 드물지도 않고.


"적어도 서윤이는 그런 타입이 아니지. 안 그래?"

"……혼나면 우울하니까 싫어요."


"애완동물처럼 귀여워해 줬으면 하는 거지?"


"지, 직설적이라 좀 그렇긴 한데……대충 그런 느낌."

서윤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그래서 되도록 혼나고 혼내기보단, 좀  다정하게 하고 싶어요."

"다 끝났으니 하는 말인데,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거다 그거."

"그, 그야 물론 쉬울 것 같진 않은데, 열심히 할게요."

"굳이 따지자면……글쎄, 서윤이보단 내가 열심히 해야겠지."

SM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학적인 행위가 필요한 건 아니다.


물론 상대에게 상처를 남기거나 다치게 하는 등.


피를 보는 플레이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딱히 사디스틱한 취향은 아니란 말이지.


어느 쪽이냐고 하면 굴복시키고 지배하는 쪽이 좋다.

"나라고 서윤이가 아파하는 모습이 보고 싶겠냐."

"……그런 것치곤 엄청 괴롭혔던 것 같은데요."


"괴로워하는 모습은 예외."


"주인님도 성격 진짜 이상해."

"어허. 이제 ON/OFF는 확실하게 구분해야지."


"……언제는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입을 삐죽거린 그녀는 다시금 빵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서윤이가 바라는 게, 어리광을 받아준다거나……그런 거야?"


"그, 그냥 분위기가 부드러웠으면 좋겠다는 건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죠.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없어지는 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좋다고 이해하면 되는 걸까?"


"안심할 수 있는 분위기? 그쪽이  가까울 것 같아요."

"근데 그러려면 서로 합이  맞아야지."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보단 아무래도 경험이 많이 필요할 것 같고."



화기애애한 SM이라고 하면 서로 잘 맞물리지 않는 느낌이지만,


플레이는 각자가 가진 취향의 절충안 같은 거니까 말이야.

결국 분위기 같은 건 만들기 나름이라는 거다.


만약 둘 다 상대를 속속들이 알고 있고,


눈이 마주쳐도 것만으로도 의도를 파악하는데다,

사전에 합의가 없이도  만큼 능숙해진다면……가능, 하려나?



"그야말로 이상적인 디엣이란 느낌이네. 목표가 높기도 하다."

나는 옆에 있던 과자봉지를 북 찢으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둘 다  길이 머네."

"……처음이니까요. 근데 그건 뭐에요?"


"이거? 플레이용으로 사둔 과자. 하나 줄까?"


서윤이는 "자아." 과자를 내밀자마자 날름 받아먹었다.



"원래 계획은 개처럼 엎드려서 주워 먹게 하는 거였는데……아쉽네."


"으에에, 아무리 그래도 바닥에 떨어진  싫은데요."

"아니 뭐, 손을 쓰지만 않으면 되니까 방법은 많아. 이런 식으로."

손바닥에 과자를 올려놓은 나는 권하는 것처럼 그녀 앞에서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입만 사용해서 먹게 한다든지……먹는 거야?"

"평소엔 손가락도 핥게 했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새가 먹이를 쪼는 것처럼, 서윤이는 손바닥 위의 과자를 입으로 물었다.


그리곤 "응. 응."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위아래로 까딱까딱거렸다.



"이것 봐라, 오빠. 오리. 오리."


"……기운차네."


"자고 일어났잖아요."

"그래그래. 귀엽다 귀여워."


"뭐에요 진짜. 좀 더 성의 있게 반응하면 안 돼요?"




나는 말없이 시계를 가리켰다.



"새벽 3시에 그런 리액션을 바라지 마. 힘들어."

"……대체 오빤 언제쯤 컨디션이 좋아져요?"


"중학생 이후로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어."


"낮에도 피곤하고, 밤에도 피곤하고."

"12시간을 넘게 자도 졸린 걸 어떡하냐."


"누가 들으면 오빠만 30살쯤 먹은 줄 알겠다."


톡 쏘아붙인 그녀는 과자를 와작와작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맨날 한 번으론 부족하다고 투덜거리고."


"너도 배부르다면서 디저트는 꼭 챙겨 먹잖아."

"이게 어떻게 그거랑 같아요?"

"남자한텐 비슷한 거야."


"대체 누구더러 기운이 넘친다는 건지 모르겠어. 냠."



그러면서도 주는 과자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 게……귀엽네

"아무튼 당분간은 오빠랑 같이 운동하면서 체력 좀 기르자."

"……싫어요."


"싫은 게 어디 있어."

"우, 운동은 힘들어서 싫단 말이에요."

"자꾸 그러면 다음엔 정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 거야."

단단히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벌 받은 다음에 다리에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지?"


"……그거, 오빠가 너무 강하게 괴롭혀서 그런 거예요."


"그래도 최대한 봐주느라 조절한 거야."

"두 번 봐줬다간 구급차 불러서 실려가야겠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보니 조만간 오컨 한번 해야겠네."


하지만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과자. 과자." 손을 뻗던 그녀는 덜컥, 고장 난 것처럼 작동이 정지했다.

"오, 오컨은 아직……그게, 저한테는 좀 이르지 않은가 싶은데."

"그게 싫으면 뭐, 목줄을 착용하고 노출 산책이라든지."


"히익……"


"카메라 세팅하고 서윤이 전용 조교 영상을 찍는 것도 좋고."


나는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구속한 채로 몇 번이나 절정을 버티는지 보는 것도 좋겠다."

"……다시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알면 됐어."


"근데 오빠, 진짜로 저런 거, 생각하고 있어요?"

"난 서윤이가 동의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괜찮은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초보자의 어마어마한 호기심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쓰게 웃었다.


지금은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어차피 그것도 조만간이다.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아도 스스로 조르게  텐데 뭘.

오히려 내가 옆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할 순간이 올 거다.

물론 정말로 그런 순간이 오게 된다면 내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겠지만,

당장 할  있는지 없는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는 차치해두도록 하자.

지금은 일단 새벽의 라면이라는 야식의 유혹에 더 이상 저항하기 어려웠다.



"나 잠깐 편의점  다녀올게."

"갑자기 왜요?"


"컵라면 좀 사오려고."


"아, 그럼 나도 같이 가요."

냉큼 대답한 서윤이는 멋대로 내 바람막이를 걸친 뒤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미 신발까지 챙겨 신고 몸을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목줄도 챙겨갈까."


산책 나가자는 말을 들은 강아지가 떠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데이트, 데이트. 오빠랑 새벽 데이트~"


"……그냥 라면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넹? 뭐라고 했어요?"

"아냐. 아무것도."


"거기서 중얼거리지 말고 빨리 가요."

이제 와서 컵라면만 사서 돌아오자고 해도 납득하지 않을 게 뻔하고.


아무래도 서윤이가 직성이 풀릴 때까지 걸어야 만족할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난 것만으로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충전이 끝나다니.

"……스무 살은 무섭네."


"빨리 가요."

"알았어. 알았어."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서윤이는 냉큼 내 팔에 매달렸다.

"오빠랑 같이 밤에 나가는  처음이다. 그렇죠?"

"보통 그렇지. 이 시간까지 깨어있진 않으니까."


"앞으로도 자주 자고 가야겠다."


"대신 올 때마다 콘돔 하나씩 가져와."

"에엥, 지난 주에 잔뜩 사둔 거 벌써  썼어요?"

우리는 그렇게 시시한 잡담을 나누며 천천히 밤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서윤이는 집에서 자주 묵고 가게 되었다.


좀  시간이 지난 뒤엔 동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가 되지만,

"그럼 기왕 나온 김에 한강까지 좀 걸을까?"

"오빠 의견에 찬성~"

"그나마 아직 덥진 않아서 다행이네."

"그래도 며칠 뒤엔 금방 더워질 거예요."

손을 잡고 싶어서 은근슬쩍 손등을 툭툭 건드리는 그녀와,


언제쯤 못 참고 조르게 될지, 모른 척하는 내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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