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모르거나 부족하거나 (1)
뉴스에선 몇 십 년 만의 최고 기온이라며 연일 떠들어 대던 어느 토요일.
외출에서 돌아온 우릴 맞이한 건 푹푹 찌는 것처럼 달궈진 원룸이었다.
"다녀왔습ㄴ……시발!"
"다녀왔습니다아아."
나란히 현관에 들어선 우리는 내팽개치는 것처럼 신발을 벗어던졌다.
문을 열자마자 얼굴에 훅 끼쳐오는 열기는……아는 사람은 안다.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하더라도 절대로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걸.
"에어컨! 일단 에어컨부터 틀어!"
"흐에에, 더워어어어……"
"누진세로 뺨을 맞더라도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서윤이는 벌써부터 벽에 기대서 질척질척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긴 머리카락을 뙈약볕 아래서 늘어트리고 다녔으니 뭐.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찜통과 비슷한 효과가 나지 않았을지,
소견머리 없는 나로선 조심스럽게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렇게 틀린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 다행이었다.
"오빠아아아, 빨리……에어컨. 더워어."
"잠시만. 리모컨 찾고 있어."
"그, 그러게 정리를 잘 했어야죠!"
"애초에 에어컨을 꺼둔 게 잘못이지!"
백 년의 사랑도 식는 이유는 별다를 게 없다.
"항상 두던 곳에 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시끄러. 열심히 생각하고 있잖아."
"더워어어……더워. 더워어."
"분명히 내가 집에서 나가기 전에……맞다!"
현관으로 달려간 나는 신발장 위에서 리모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왜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뭐, 찾았으면 된 거지.
리모컨을 들고 설정할 수 있는 최저 온도로 설정하자,
"두고보자, 한전."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지 마요."
현관에서 녹아내리던 그녀도 슬금슬금 에어컨 근처로 다가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날씨가 시발, 제정신인가 진짜?"
"……제정신 아니에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서윤이가 단언할 정도면 큰일인데 진짜."
"근데 오빠, 오빠."
"왜 그러니, 마이 고구마 크러스트."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부르면 화낼 거예요."
좀처럼 정착되지 않는 애칭을 부른 죄로 다리를 꼬집힌 나는,
"너 요즘 툭하면 꼬집더라. 죽을래?"
"먼저 이상한 소릴 했잖아요."
"아니,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한 건 너였잖……쓰읍!"
팩트를 휘두른 죄로 다시 한번 같은 자리를 꼬집혀야 했다.
"그보다 괜찮아요? 아이스크림, 녹을 것 같은데요?"
"아니, 야!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한달음에 튀어나간 나는 간신히 아이스크림을 구출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좀 녹은 같은데……괜찮겠지? 괜찮아야 할 텐데.
대용량 아이스크림은 혼자 먹기엔 너무 많단 말이야.
그렇다고 남기면 남기는 대로 냉장고 자리만 차지하고.
서윤이랑 둘이 먹겠다는 핑계로 졸라서 산 건데 녹으면 안 되지.
"……오빠, 나 씻을 테니까 장바구니에 있는 거 냉장고에 넣어주세요."
"먼저 씻으려고?"
"찝찝해서 안 되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인데. 같이 들어갈까?"
"둘이서 들어갈 만큼 화장실 넓지 않잖아요."
언젠가, 돈을 왕창 벌어서 정말로 넓은 집으로 이사 갈 테다.
"그러니까 서로 씻겨주자는 거지. 사귀는 사인데 뭐 어때."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결혼한 사이라도 싫어요."
"서윤아, 내가 흑심으로 하는 소리 같지? 아니야."
"오히려 흑심 외에 뭐가 있는지 묻고 싶은데, 괜찮아요?"
누굴 닮는 건지, 갈수록 점점 말빨이 늘어서 만만치 않네.
"서윤이는 샤워하면 30분 이상 틀어박혀 있잖아."
"……머리가 길어서 오래 걸리는 걸 어떡해요."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도 찝찝하다 이거지."
서윤이는 서윤이대로 등과 어깨가 땀범벅이었지만,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온 나는 이미 전신이 침수상태였다.
티셔츠를 걸레 짜듯이 쥐고 비틀면 후두두둑 쏟아질 정도로.
"솔직히 지금 팬티 속까지 다 젖은 것 같거든?"
"여기서 벗지 마요! 분명히 말했어요!"
"아니, 확인은 해야 할 거 아냐."
"바, 바지 내리지 마요 진짜!"
"알았어.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면서 호들갑은."
공갈이 잘 먹히는 것을 본 나는 슬쩍 허리춤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어쨌든 뭐, 이대로 서윤이가 끝나길 기다리면 감기 걸린단 거지."
그렇다고 에어컨을 껐다간 감기가 열사병으로 바뀔 뿐이다.
"그, 그래도 역시 같이 들어가는 건 싫다고 해야 하나."
"괜찮아. 괜찮아. 나쁜 의도는 없으니까, 응?"
"씻으면서 이상한 짓……할 거잖아요."
"정 싫으면 5분! 정확히 5분 안에 끝낼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서윤이는 문득 떠올랐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 그냥 오빠가 먼저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쳇.
"5분밖에 안 걸린다는 거 보면 엄청 빠른 거잖아요."
"뭐, 머리 감고 비누칠만 하면 오래 걸리진 않지."
"그럼 된 거 아니에요?"
"……그러게."
"오빠 먼저 씻고 나와요. 난 나중에 들어갈 테니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서윤이 말대로 좁은 욕실이니 한 번쯤 같이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럼 나 먼저 씻을게. 3분만 기다려."
"……점점 더 짧아지는 느낌."
"타임 어택엔 진심인 편이라서."
"자, 잠깐만! 오빠, 이거! 샴푸 다 떨어졌어요."
이젠 제법 꼼꼼하게 살림살이를 챙기게 된 그녀의 손길은 점점 집을 잠식하고 있었다.
뭐랄까, 내 방의-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관리 아래에 두고 있다고 해야 하나.
샴푸나 칫솔 같은 소모품부터 시작해서 맥주밖에 없던 냉장고도 조금씩 차고 있고.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집을 꾸미기 시작해서……지금은 뭐, 그래.
동거하는 것처럼, 곳곳에 서윤이 냄새가 배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엔 그리 달라지진 않았지만, 구석구석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까.
물론 서윤이가 허락도 없이 멋대로 구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상담한 뒤에 움직인다.
문제는 그 상담이란 게……내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종류라서 곤란하다는 거다.
예를 들면, 화장실엔 새로운 방향제가 필요할 것 같다거나.
물건이 너무 어질러져 있으니 정리할 수 있는 수납장이 필요하다.
입었던 옷을 아무 곳에나 던져두지 말고 제대로 옷걸이를 사서 걸어두자 등등.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막 살았는지 지적받는 셈이었으니 딱히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기 둥지를 꾸미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최종적으로 장래엔 우리 집의 모든 것을 관리하면서 본인이 없으면 안 돌아가게 하려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는 어때?"
"씻고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에요?"
서윤이는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아니, 요즘 부쩍 다이소 영수증이 늘어난 것 같아서."
"그동안 오빠가 엉망으로 생활했다는 증거에요."
"……할 말 없음."
"그리고 뭐하러 귀찮게 전부 다 관리해요."
"하긴. 서윤이가 그런 성격은 아니지."
"그냥 오빠 한 명만 잘 관리하면 되는 건데."
"……난 가끔 니가 좀 많이 무서울 때가 있어."
등을 타고 흐르는 한기는 아마도 감기의 전조일 거다.
"됐으니까 나 들어가게 옷 다 입었으면 나와주세요."
"그래그래. 여기 서윤이 수건."
"……굳이 수건까지 따로 살 필요 없었는데."
"됐어. 우리 집에 있는 건 죄다 오래된 거잖아."
꾸벅, 고개를 숙인 그녀는 수건을 받아들고 쪼르르 씻으러 들어가 버렸다.
"바닥에 물 투성이니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이따가 화장실 청소, 오빠가 해요."
"대부분은 서윤이 머리카락 때문에 막히는 건데."
하긴. 벌써 쾅! 닫힌 문에다 대고 투덜거려봤자 무슨 소용아겠냐만은.
아직도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 꽁해있는 게 눈에 보여서 골치가 아팠다.
벌써 점심 때가 훌쩍 지났는데……그만큼 토라져 있었으면 슬슬 풀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달래주고 싶어서 이런 날씨에 굳이 마트까지 다녀온 건데 말이야.
서운해하는 이유 자체는 짐작이 가지만, 그게 이렇게 오래갈 일인지도 모르겠고.
각오는 했던 일이지만, 확실히 얼굴 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부딪치게 되는 것 같았다.
"……아아아, 피곤하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나는 냉방 온도를 조금 올렸다.
가뜩이나 머리도 길어서 말리느라 오래 걸리는데 추워서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
"나이가 뭐라고 꼼짝을 못하겠네 정말."
옛날 성질 같았으면 벌써 다 뒤집어 엎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사람 됐다 정말.
이런 상황에도 짜증을 내기보다 여자친구 감기 걸릴까 봐 걱정하는 게 우선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맛이 간 듯했다.
연하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약해지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동안 나한테 죽어라 잔소리하던 누나들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내가 수능 본 해에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생각하니까 화를 내는 게 이상한 것 같잖아.
"샤워하고 나오면……음. 달래주고, 밥 먹고……"
가끔씩이지만 그런 일이 있다.
분명 머리는 깨어있고, 기억도 확실하지만 몸이 먼저 잠들어버리는 경우 말이다.
5초 정도 눈을 감았을 뿐인데 어느샌가 귓가엔 통통,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슬그머니 눈을 뜨자,
"……너 거기서 뭐하냐."
"오, 오빠?! 언제 일어났어요?"
싱크대 앞에 서있던 그녀가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려는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무심코 위로 치켜든 손에는 우리 집에서 보기 힘든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들었던 이상한 소리는 식칼 소리인 듯했다.
나는 위험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야. 잘 씻고 나와서 왜 흉흉한 걸 쥐고 있어?"
"이,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말 좀 해줘요."
"그래서 말 걸었잖아, 방금."
"놀랐단 말이에요. 일부러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몸을 일으키자 덮은 기억이 없는 담요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게다가 왠지 창밖도 어둑어둑한 것처럼 보이고.
"……혹시 나 언제부터 자고 있었는지 알아?"
"씻고 나오니까 이미 침대에 쓰러져 있었어요."
"눈 감은 김에 깜빡 졸았나 보다. 찌뿌드드하네."
아직도 잠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던 나는 "끄으응." 기지개를 켰다.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있었던 탓인지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보다, 넌 거기서 뭐하고 있냐."
"저, 저녁……만들고 있었어요."
"갑자기 웬 저녁?"
"지금 벌써 8시에요."
"……대체 얼마나 잔 거야. 5시간?"
서윤이는 앞치마에 손을 슥슥 문질러 닦은 뒤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혹시 더위 먹은 거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네."
"어지럽거나 하진 않아요?"
"허리가 좀 아픈 것 외엔 딱히 없어."
"……죄송해요. 괜히 제가 나가자고 해서."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트린 그녀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집에 올 때까지만 해도 꽁해있더니. 기분은 좀 풀렸어?"
"벼, 별로 꽁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거짓말 마. 말에 가시가 돋쳐 있던데 뭘."
"……조금은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심하진 않았잖아요."
머리를 한 번 흔들어 졸음을 털어낸 나는 침대 옆자리를 두드렸다.
서윤이는 겁을 먹은 것처럼 주춤주춤 조심스럽게 다가와 앉았다.
"그 앞치마 잘 어울린다."
"……감사합니다."
"집에서 쓰던 거야?"
"누가 앞치마 두르고 요릴 해요."
TV나 유튜브에선 많이들 쓰는 것 같던데……실제로는 아닌가?
살면서 해본 요리라곤 라면이랑 달걀 프라이밖에 없어서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머니도 딱히 앞치마 같은 건 안 했던 것 같기도.
"오빠한테 보여주려고 이번에 새로 산 거란 말이에요."
아직 약간이지만 볼이 부어있는 것을 본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었다.
"그런데 배달시켜 먹자고 해서 많이 속상했구나?"
"배달음식 같은 건 평소에도 많이 먹잖아요."
"이것저것 많이 시켜 먹긴 하지."
"그러니까 오늘은 제대로 밥,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결국은 냉동식품과 맥주 외에 식재료라곤 찾아볼 수 없는 냉장고 탓이었다.
하지만 서윤이는 요 며칠간 본격적으로 자취방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즉, 내가 사는 꼬라지를 우리 부모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거다.
당연히 우리 집 냉장고 사정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겠지.
그럼 직접 재료를 가져왔어야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 오빠랑 둘이서 같이 장 보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서윤이가 생각하는 식사 준비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던 듯하다.
문제는, 하필 오늘 몇십 년 만에 최고 기온을 달성했다는 거고,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까지 20분이나 걸린다는 것과,
심지어 도보 외엔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다는 걸 몰랐다는 거다
"여기 근처 월세가 좀 싸긴 한데……알잖아. 다 이유가 있어."
"……주변에 편의점밖에 없을 줄은 진짜로 몰랐어요."
"내가 괜히 배달만 시켜 먹는 게 아니라니까."
"죄송해요. 고집 부리지 말고 오빠가 하는 말……들을 걸."
말은 안 했지만, 서윤이도 오늘 엄청 고생스러웠던 모양이다.
정작 무거운 짐은 건 전부 다 내가 지고 왔지만……힘들겠지.
그렇다고 양손 가득한 장바구니를 나눌 수도 없었다.
서윤이는 이미 땡볕 아래서 걷는 것만으로도 한계였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니까 오빠도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해."
"……아니에요. 제가 고집 부린 거예요."
"괜히 기운 빼지 말자고 하면 당연히 섭섭하지."
그 와중에도 아니라곤 못하는 걸 보니 진짜로 속상했던 모양이다.
"서윤이는 그냥 내가 안쓰러워서 그랬던 건데, 그치?"
"예전에 오빠, 내가 만든 밥……먹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밥 좀 만들러 와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엔 사귀긴커녕 얼굴도 못 본 사이였고,
나도 별다른 흑심이 없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지.
근데 설마 서윤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에휴."
누구라도 내 입장이 된다면 화를 내긴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딱히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막 짜증이 나지?"
"짜, 짜증이 난다기보단……섭섭한 정도?"
"서윤이는 마음을 몰라줘서 섭섭하고."
"……오빠는 자꾸 귀찮게 굴어서 짜증 나고."
차라리 누가 확실하게 잘못했다면 사과하면 될 일인데 말이야.
서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감정은 쌓이니 곤란하지.
"다음부턴 생각한 게 있으면 그게 뭐든 미리 말해주면 좋겠어."
"……그렇게 할게요."
"혼자만 알고 있으면 재미없잖아."
"재미……라고 하셔도, 오빠 요리 못하잖아요."
"나한테도 먹고 싶은 메뉴 정도는 고르게 해줘야지. 안 그래?"
그제야 서윤이는 "아."하고 동그랗게 입을 벌렸다.
"기껏 열심히 만들었는데 입맛에 안 맞으면 둘 다 괴롭잖아."
여자친구를 배려하느라 맛없는 걸 억지로 먹을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서윤이 요리가 맛이 없다는 건 아니다.
가끔씩 저녁이라면서 직접 만든 요리 사진을 보내곤 하니까.
먹어본 적은 없지만……실력은 있으니까 괜찮은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다음엔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좀 만들어줘. 알았지?"
"너무 어려운 것만 아니면……한번 생각해볼게요."
"괜찮아. 내 입맛은 단순하니까."
"오빠 입맛은 이미 한참 전에 파악 끝났어요."
"……우선 시장조사부터 하고 들어가는 타입이구나."
조만간 나보다 서윤이가 나를 더 잘 알게 될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아무튼 쓸데없이 고집 부려서 죄송합니다."
"오빠도 서윤이 서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저 때문에 괜히 오빠만 고생 엄청 하고."
"뭐, 괜찮아. 서윤이가 고집 부리는 일은 드물기도 하고. 가급적 들어주고 싶으니까."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서윤이까지 챙겨가면서 언덕길을 오르는 경험은……글쎄.
"대충 반 년에 한 번 정도면 참아줄 만한 것 같아."
"진짜로 죄송합니다아아……"
"괜찮다니까. 고개 들어. 혼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진짜로 죄송해요. 제가 고집 부려서……괜한 고생을."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니, 다행히 반 년마다 쿨타임을 돌리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럼 공평하게, 서윤이도 오빠 쇼핑에 어울려주는 건 어때?"
"어, 언제든지 불러만 주세요! 짐꾼이든 뭐든 할 테니까!"
"의욕 넘치는 건 좋지만 인터넷 쇼핑이야."
"같이 구경하면 되는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오늘 있었던 일은 그걸로 퉁치자."
햄스터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이 갖는 육감……같은 거였을까.
막 기운차게 대답하려던 그녀는,
"네에……엣……?"
정체 모를 오한에 흠칫 떨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도 어리둥절한 듯했다.
"추우면 에어컨 끌까?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모르겠어요. 갑자기 소름이 쭉 끼쳐서."
나는 불안한 눈으로 오들오들 떠는 서윤이를 보며,
그녀가 한기의 원인을 알아차리기 전에 못을 박아두기로 했다.
"일단 저녁부터 먹고, 같이 쇼핑몰 좀 뒤적거리자. 알았지?"
"네? 네에에……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좋아. 그럼 저녁 준비하는데 내가 도울 건?"
"이따가 제가 부르면 테이블이나 좀 치워주세요."
그렇게 말한 서윤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좀 전에 훅 끼쳐왔던 정체 모를 오한의 원인을 고민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그 원흉이 뒤에서 앞치마 차림을 감상하고 있다는 걸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