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모르거나 부족하거나 (3)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경악이었다.
서윤이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아픈 거 싫어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그래그래. 알아. 잘 알고 있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
하지만 어째 반응이 시원찮은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역시 여기선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편이 정답인가.
아니면 그냥 모른 척 묻어두고 넘어가는 게 나은 걸까.
"저기, 오빠……?"
하지만 시큰둥한 시선에 오히려 다급해졌는지,
서윤이는 내게 달려드는 것처럼 성큼 얼굴을 들이댔다.
"지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죠? 네? 그쵸?"
"이상한 생각은 아까부터 하고 있었는데 뭘."
"……그야 그렇긴 한데."
납득이 빠른 아이였다.
"그, 근데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잖아요!"
"아무도 문제라고 한 적 없으니까 진정해, 진정."
서윤이는 "으으윽." 짓눌린 신음소릴 내더니 자리에 앉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서윤이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안 해."
"……정말이죠?"
"정말이지 그럼. 맹세할 수도 있어."
"나중에 막 설득하고 그러려는 건 아니죠?"
"설득……정도는 들어주면 안 될까?"
"아, 안 돼요! 내가 오빠를 어떻게 이겨요!"
설득이란 게 언제부터 승패가 갈리는 시합이 됐는지 묻고 싶었다.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살짝 골치가 아파지긴 하네."
"정말로 다음에 스, 스팽킹 하려고 했어요……?"
"그런 건 아니고, 체벌에 대해서 좀 고민하고 있었거든."
서윤이는 "체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팽킹이 정확히 어떤 플레이인지는 알지?"
"……주인님한테 맞는 거요. 여러 가지로."
"체벌이라고 하자."
"어쨌든 비슷한 거잖아요."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지니까 그래."
폭력은 당연히 있어선 안 되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하지만 SM에서 폭력은 서로 간의 합의를 통해 설계된 폭력이다.
그 부분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기준이 망가지니까 조심해야지.
"혹시 첫 플레이에서 받았던 페널티 기억해?"
"……주, 주인님 앞에서 차렷, 하고."
"그리고?"
"손가락……으로 막 그게, 가버렸……어요."
"벌을 받으면서 기분이 어땠어?"
"부끄럽고, 창피해서 죽고 싶었어요."
"체벌의 효과가 확실하게 있었다고 생각해?"
의심 반 경계 반의 시선을 보내긴 했지만, 서윤이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체벌……이라고 하면 잘 모르겠지만, 반성은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결국 벌을 주는 목적이 그거야. 반성하게 만드는 것."
"……그냥 주인님이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구요?"
"말했잖아. 억지로 트집 잡아서 벌을 줬다간 나를 못 믿게 된다고."
뭐, 가끔씩 심술 부리고 싶어서 난처하게 만든 적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나도 서윤이가 잘못한 만큼만 벌을 주는 거야."
"……그, 그건 그렇죠. 과잉 체벌은 나쁜 거니까."
"그래야 서윤이도 벌을 받으면서 납득할 수 있겠지?"
"네에에. 너무 심한 벌은……저도 좀 억울할 것 같아요."
다행히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벌의 강도라고 해봤자 주인이 임의대로 결정하는 거니까 말이야.
서윤이에겐 '잘못한 만큼의 벌'이라고 했지만,
판단하는 건 결국 주인의 몫이란 건 굳이 말해줄 필요 없겠지.
우리 주인님은 공정하구나, 라는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잘못에 비해 벌이 너무 가벼운 것도 공평하지 않지?"
"……그래서 벌칙으로, 스팽킹을?"
"서윤이는 아픈 걸 싫어하니까 좀 더 확실한 벌이 될 거야."
"시, 싫어하니까 벌이 된다는 게……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좀 전에 엉덩이를 맞은 게 떠올랐는지,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들썩거렸다.
"물론 도구는 안 써. 핸드 스팽킹이라고 하지?"
"주, 주인님 손으로……"
"지금은 오빠라고 해야지?"
"……아, 아아. 네. 죄송해요. 오빠."
나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크게 펴 보였다.
"속옷을 벗긴 다음, 조금 전처럼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릴 거야."
"어, 엉덩이는……어렸을 때도 맞아본 적 없는데."
"그럼 더 좋은 벌이 되겠지. 스무 살이나 돼서 엉덩이를 맞으면."
서윤이는 슬그머니 손을 뒤로 가져갔다.
"잘못한 횟수만큼 때릴 거야. 서윤이는 맞을 때마다 숫자를 세야 하고."
"……어, 엄청 많이 잘못했으면요?"
"엄청 많이 맞아야겠지?"
"흐으으……"
"잘못하면 벌을 받는구나, 라는 교훈이 몸에 새겨질 때까지 해야지."
적당하게 흔들어놨다는 생각이 든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뭐, 일단은 고려만 해봐. 당장 스팽킹을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흥미를 갖게 만드는 건 좋지만 더 이상은 강요가 되어버린다.
물론 맘만 먹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납득시킬 순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남는 게 뭔지 생각해본다면……글쎄.
역시 본인이 원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게 맞겠지.
일단 씨앗은 뿌려놨으니, 관심이 있다면 조만간 싹이 틀 거다.
"어차피 다음 플레이로 염두에 뒀던 건 따로 있었고."
"……스팽킹이 플레이, 아니었어요?"
"똑바로 안 들을래? 그건 체벌이라고 했잖아."
"그, 그럼 대체 무슨 플레이를 하려고……저런 벌을."
나는 지레 겁먹은 것처럼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에게 향해 말했다.
"글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빠르겠다."
나는 서윤이를 모니터 앞으로 불러들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녀도 용도를 알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인 물건이었다.
"눈가리개……라고 해야 하나. 안대 아니에요, 이거?"
"보통은 블라인드라고 하지."
"이름이 블라인드에요?"
"아니, 플레이 말이야. 블라인드라고 하거든."
직접 경험하는 게 낫겠다 싶었던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손을 뻗어,
손을,
"죽을래? 가만히 안 있어?"
"이, 이상한 짓 하려는 거잖아요!"
"아픈 거 아니니까 잠시만 가만히 있어."
요리조리 피하던 그녀를 얌전히 만든 뒤,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
"어때. 이렇게 하면 앞이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럼 그대로 손은 무릎 위에. 움직이면 안 된다?"
서윤이는 흠칫거리면서도 얌전히 깍지 낀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시야를 가린 것과 함께 양손의 움직임까지 봉쇄한 뒤,
"히, 히이잇!"
천천히 다가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당연히 놀란 그녀는 버둥거리며 눈을 가린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뭐, 뭐, 뭐에요, 갑자기! 방금 입술에 뭔가 닿았는데?!"
"뭔가, 라니……너무한다, 서윤아. 오빠도 상처받아."
"키, 키스한 거예요, 지금?!"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건데 섭섭해지려고 그러네."
손을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서윤이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지, 진짜로 입술이었어요?"
"그럼 뭐겠어. 곤약?"
가벼운 농담이었는데도 그녀는 "그런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슷하기는커녕, 착각의 여지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러니 원.
리액션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바보인 건지.
나중에 실제 플레이 상황에서도 저만큼만 반응해주면 좋을 텐데.
"……이상하다. 아닌데. 오빠 느낌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서윤이는 여전히 입술을 만지며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애초에 나 말고는 키스는커녕 뽀뽀조차 해본 적 없으면서.
오히려 내가 아니면 누구라는 건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뭐, 이런 거야. 눈가림 플레이. 대충 의미는 알겠지?"
"눈을 가리고 괴롭히는 거예요……?"
"맞아. 시야가 제한되면 다른 감각들이 좀 더 예민해지거든."
동시에 어둠 속에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도 배가 된다.
사람은 다른 감각보다 시야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근데 주인ㄴ……아니,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우리 서윤이, 슬슬 오락가락하네?"
"에, 에쎔 이야길 하면서 오빠라고 하니까 엄청 이상한 느낌."
그렇다고 맘대로 하라며 허락해줄 수도 없었던 나는 그냥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서윤이는 기억해두려는 것처럼 "오빠. 오빠." 한참을 혼자 되뇌더니,
"만약 블라인드……하게 되면, 저도 이렇게 꽁꽁 묶여야 돼요?"
사진 속의 모델을 가리키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예상 밖의 질문에 이해가 따라가지 못했던 나는 가만히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모델은 안대를 한 채 팔과 다리를 구속당하고, 입에는 재갈까지 물고 있었던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블라인드 플레이와 구속은 카테고리가 달라."
둘 다 함께 병행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긴 하지만.
블라인드는 어디까지나 시야를 가린 채 자극을 주는 게 목적이다.
"플레이 난이도로만 따지면 도그 플레이보다 좀 더 아래일 걸?"
안대나, 눈을 가릴 수 있는 무언가를 제외하면 준비물도 딱히 없고.
다른 플레이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혹시 싫으면 말해줘. 반드시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니까."
"시, 싫은 건 아닌데……조금 무서운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게 무서운지 물어봐도 될까?"
"눈을 가리고 있으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내용을 이제부터 서윤이랑 의논하려는 건데, 안 될까?"
만약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싶었던 거라면 시간을 만들지도 않았을 거다.
지난 번처럼 간단하게 개요만 설명한 다음 필요한 준비를 시켰겠지.
그러는 편이 나한테도, 서윤이한테도 당장은 편할 거다.
하지만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드는 건 결국 파트너를 위한 훈련이다.
스스로 적극적인 의견을 내지 않으면 결국 내 취향에 끌려다니게 되니까.
"아니면 따로 생각해둔 플레이가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으음. 어쩐다."
턱을 매만지던 나는 문득 그녀가 주눅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입장에선 고작 이 정도의 이견으로도 죄책감이 드는 건지,
아니면 무작정 반대부터 했다는 사실을 잘못이라고 느끼는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일단 안심부터 시키는 게 우선일 듯했다.
"괜찮아.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모르니까 무서울 수도 있지."
"블라인드……라는 플레이를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하긴. 도그 플레이는 성향에도 맞고, 지식도 있었으니 비교적 쉬웠겠지.
"그럼 이렇게 하자. 결국 잘 몰라서 문제가 된다는 거잖아?"
"네에에.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큰 것 같아요. 아마도."
"그렇다고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죄송해요."
"아냐. 아냐. 사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라."
당황한 나는 어느샌가 그녀가 내려놓은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간식도 먹으면서 같이 얘기 좀 해보자는 의미였어."
서윤이는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먹어. 괜찮아."
내가 재촉하지 못 이기는 척 다시 "냠." 입에 물었다.
"느긋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어?"
"좋은 생각이 안 떠오르면요?"
"그럼 뭐, 포기해야지.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잖아."
"……그, 그래도 그렇게 막 함부로 포기해도 되는 거예요?"
"지난 번에도 플랜은 5개 정도 있었어. 반도 못 써먹었지만."
플레이 계획은 매뉴얼 같은 거지, 절대적인 지침 같은 게 아니다.
충분히 설명한 뒤에도 싫어한다면 뭐, 얌전히 포기하는 수밖에.
"혹시 내가 첫 플레이를 고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 적 있었나?"
"제, 제가 도그 플레이……를 가장 좋아해서, 아니에요?"
"비슷해. 서윤이는 아무래도 펫 성향에 가까우니까."
"가장 처음 배울 때도 일단 멍멍 짖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플레이 중 하나거든. 간단하잖아."
"강아지 흉내만 내면 되니까……솔직히 좀 편하기도 하고."
"벌써부터 편하면 안 되는데. 빠졌네?"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알았어 그래. 그만큼 난이도가 낮다는 거니까 충분히 이해해."
꼭 에쎄머가 아니라도 역할을 정해놓는 롤 플레이는 제법 흔하니까.
만약 그런 성향이 있다면 애인끼리 즐길 만큼 진입 장벽도 낮고.
여자친구가 "개처럼 다뤄줄래?"라는데 싫어할 남자도 없을 걸?
결국 뭐, 이래저래 떠들었지만 결국 심리적인 난이도를 말하는 거다.
"근데 만약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면 편하다는 말은 못했을 거야."
"목줄까지 채웠는데……제대로 했던 게 아니에요?"
"본격적으로 하려면, 어디 보자. 여기에도 있을 텐데."
나는 그녀에게 암 바인더라고 불리는 구속구를 보여주었다.
"전에 이런 거 보여준 적 있었나?"
"……한 번도 없어요."
"어떤 용도로 쓰는 것 같아?"
"팔을 못 움직이게 뒤로 묶는 것 같은데……"
"맞아. 그리고 비슷한 게 다리 버전으로도 있어."
사실 서윤이가 초보자라는 이유로 굉장히 많이 사정을 봐준 거지.
좀 더 나간다면 얼마든지 하드코어해질 수 있는 게 트레이닝이다.
팔과 다리를 구속한 뒤 네발로 기어 다니게 만든다던가.
입을 막은 다음 짖는 것으로만 대답하게 하거나.
목줄을 채워서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것도 괜찮지.
또 철창에 가둔 다음 사육되는 짐승처럼 다룰 수도 있다.
"꼭 애완동물처럼 사랑만 받는 게 도그 플레이는 아니라는 거야."
"……그럼 저번에 오빠랑 같이 했던 건 잘못했던 거예요?"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 플레이엔 다 목적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첫 플레이에서 목표로 정했던 건 두 가지거든. 뭔지 알겠어?"
"왠지 떠오르는 게 있긴 한데, 정답인지는 모르겠어요."
"퀴즈도 아니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주종 관계……라고 해야 하나. 암캐로서 위치? 서열?"
"맞아. 서열을 확실하게 정해놓는 것도 목표였지. 그리고?"
하지만 서윤이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괜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두 번째는 서윤이가 날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거였어."
"저, 저는 당연히 주인님 믿고 있는데……요."
"물론 그렇지. 근데 조금만 생각해보자?"
나는 힐난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중히 말을 골랐다.
"서윤이가 그랬잖아.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 무섭다고."
"아……"
그녀의 표정을 본 나는 황급히 "물론!" 말을 덧붙였다.
"서윤이를 탓하는 건 아냐. 당연히 그럴 수 있어. 이해해."
누구라도 자신의 몸을 완전히 맡겨야 한다면,
그게 아무리 신뢰하는 상대라고 해도 망설일 게 뻔하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연인 사이라고 해도 힘들지.
"근데 디엣은 그런 믿음을 끊임없이 시험하거든."
"무슨 말씀인지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래?"
"플레이 중엔 계속 주인님을 믿어야 하잖아요."
서윤이는 약간 힘겨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심한 짓을 당해도 그거 말곤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서윤이한테 그렇게까지 심한 짓을 했던가."
"그,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믿는 건 좋지만, 정말 힘들어질 때까지 참으면 안 돼."
서윤이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힘들어도 꾹 참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서윤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
"……저, 저도 딱히 억지로 참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걱정돼서 그래."
"참을 수 있으면……칭찬도 받고, 기분 좋아지니까……요."
빙긋 웃은 나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마 블라인드 플레이도 괜찮을 거야."
눈앞은 캄캄하고, 신경은 온통 곤두서있다.
발자국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리고,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한계까지 예민해진 감각은 차라리 고통스럽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서윤이가 누굴 믿을 수 있겠어."
"주, 주인님……이겠죠?"
"맞아.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의지하는 거야."
그녀에게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번 플레이로 자기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
"네, 네에에. 오빠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여자……에요."
"그러니까 이번엔 그걸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시켜주려고."
사람은 언제나 잘 구축된 논리보다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흔들리기 마련이다.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암컷으로 떨어트린 다음에 울면서 매달리게 할 거야."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내 것이지만 내가 아닌 권위.
주인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을 아주 잠시만 빌려오기로 했다.
"서윤이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가르치고 싶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