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모르거나 부족하거나 (4)
서윤이는 고개를 떨어트린 채 약간씩 어깨를 떨기만 할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녀의 기분이 언짢아졌다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만약 그랬다면 눈동자에 묘한 열기가 아른아른 맴돌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의지할 게 주인님밖에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
"……조, 좀 더 확실하게, 주인님의 여자라는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오."
"그렇지?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엄청 귀여울 것 같아. 서윤이랑 잘 어울리잖아."
나는 약간의 조소를 담아 말했다.
"어떻게든 사랑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암캐에겐 적당한 플레이라고 생각해."
"그, 그런 거 당하게 되면……저 진짜 주인님 없이는 못 살게 되는데요?"
"우리 서윤이, 이젠 분위기 타서 대답도 탈 줄 알고.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기특하다는 것처럼 머리를 토닥여주자 서윤이는 "에헤." 바보처럼 웃었다.
"오빠가 사랑해줄 때마다……야한 말 많이 들어서, 조금 익숙해졌어요."
"점점 내 취향에 가까워지고 있네.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암캐라니까."
"그래도 암캐는 안 돼요.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괜찮은데 암캐는 안 돼?"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불리면 금방 야한 기분이 드니까 평소엔 안 돼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야릇한 표정 탓에 도발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서윤이는 그런 자각이 없는지 헤실거리며 칭찬을 기다렸다.
"그래그래. 약속한 건 지켜야지. 잘 기억하고 있네. 기특해. 기특해"
"그, 그러니까 오빠도 일부러 막 자극하려고……그러지 마요."
"알았어. 말하다 보니까 나도 살짝 열이 올랐나 봐."
"어차피 제가 좋다고 해도 좀 더 고려해 보라고 할 거면서."
"나중에 오빠가 설득하는 바람에 억지로 떠밀렸다고 하면 안 되잖아."
좀 전에 스팽킹도 그렇고, 자꾸만 흔들어놓는 게 불만이란 것 같았다.
아니면 찝쩍거리기만 하고 정작 마무리는 안 지어서 욕구불만이던가.
"어쨌든 뭐, 약간 지나치긴 했지만 대충 이해는 한 것 같은데. 어때?"
"이해했어요. 주인님한테 매달리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란 거잖아요."
"사실 앞이 안 보이면 엄청나게 불안하잖아.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고 무서운 느낌을 즐기는 플레이……라는 거죠?"
"맞아. 서윤이도 겪어봤으니 알겠지만, 긴장과 완화라는 게 있거든?"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멍하던 그녀는 뒤늦게 "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스트레스와 릴리프라고 하는데, 두 가지 상태를 반복하는 거야."
굳이 SM이 아니더라도 완급 조절은 사람을 다룰 때 효과적인 방법이다.
잡담-본론-잡담의 흐름을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웬만큼 먹히거든.
무거운 주제도 잡담의 연장선으로 만든다면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
예를 들면, 처음 만났을 때의 서윤이처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단 거다.
물론 우리 애는 본보기로 삼으면 안 되는 케이스라서 좀 그렇긴 하지만.
"긴장해야 할 땐 적절하게 졸라매고, 그 외엔 느슨하게 풀어주기. 알지?"
"근데 저번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엄격해서 좀 힘들었어요."
"그건 앞으로 오빠가 좀 더 신경 쓰겠다고 약속할게."
"……약속."
"그래그래. 약속."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서윤이는 새끼손가락 대신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이 파이브라도 해달라는 건가? 싶어서 손을 들어 올렸지만,
"……이거 아니야?"
면전에서 따가운 눈총을 맞고 내려야 했다.
결국 손을 잡아달라는 의미란 걸 눈치채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손 잡고 있으면 되게 커플 같아서 좋지 않아요?"
"……커플 같아서, 가 아니라 이미 커플입니다, 여친 님."
넉살 좋은 대답에, 서윤이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녀의 뒤로 마구 흔들리는 꼬리가 보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힛."
그렇게 한참 깍지 낀 손을 보며 히죽거리던 그녀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손을 놓기 싫어서 그런 거겠지만, 언제까지 쥐고 있을 건지 모르겠네.
"……왜요?"
"아냐. 되게 사랑스러워서."
"오, 오빤 되게 뜬금없이 그러더라."
여자친구 앞에서 손 좀 놓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봐.
"아무튼 뭐, 그래.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네에엥."
그나마 기분이 좋아 보이니 다행인 건가.
"만약 실제로 플레이를 해본다면, 긴장 상태가 쭉 이어질 거야."
"중간에 안대를 풀어주거나……그런 시간은 없어요?"
"웬만해선 힘들지. 생각해봐. 우리도 지난 번에 그랬잖아."
어떤 이유로든 팽팽하던 긴장의 실이 끊어진다면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다.
주인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파트너의 호응도 무척이나 중요하고.
한 번 식어버린 불씨를 되살리는 건 웬만한 노력으론 힘들지.
때문에 일단 쪽박이 깨진다면 억지로 재개하기보단 일단은 상황 파악.
파트너의 상태를 확인한 뒤 느긋하게 감정선을 이어가는 게 정석이지만,
"이번엔 서윤이가 처음으로 몸의 자유를 뺏기는 거니까 부담이 심할 거야."
적절한 단계를 밟아서 긴장을 해소하지 않은 채로 휴식을 준다면……글쎄.
사람은 받는 스트레스가 강할수록 일탈의 욕구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만약 강한 압박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툭 끊기는 것처럼 중단된다면?
보나 마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선 당장 응석 모드로 들어가겠지.
"그래서 이번엔 반성도 겸해서, 플레이 타임을 짧게 잡으려고 해."
"저번엔 2시간이었는데……그것보다 짧은 거에요?"
"대충 30분에서 50분 사이를 생각하고 있어."
"에엥, 너무하다. 그럼 숨 돌릴 시간도 없잖아요."
"숨 정도는 돌리게 해주겠지만, 길다고 좋은 것도 아니거든."
중간에 휴식을 둬도 스스로 모티베이션 유지를 할 수 있을 만큼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엔 차라리 짧은 시간 동안 클라이맥스까지 올려보낸 뒤에 천천히 해소하는 게 낫다.
"게다가 릴리프까지 단숨에 가지 않으면 서윤이가 못 버텨.."
"……또 체력 얘기하려고 그러죠. 운동하라고 잔소리."
"체력도 체력이지만, 아마 정신적으로 먼저 지쳐버릴 걸?"
불안한 상황이 지속된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큰 부담이 되니까.
"괜히 극한까지 몰고 갔다가 플레이가 파탄 나는 건 싫거든."
적당히 눈치를 보던 나는 슬쩍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미 다음 플레이는 블라인드라고 정해진 것처럼,
"그, 그래도 1시간은 너무 짧은데……아닌가?"
당장 모든 의식이 그쪽으로 쏠려있는 것 같았다.
잠시 지켜보던 나는 "물론." 바짝 당긴 고삐를 풀어주기로 했다.
"지금 이러는 것도 서윤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소용 없지만."
"……그렇, 죠. 제가 동의를 해야 뭐든 시작되는 거니까."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니까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저, 저도 딱히 억지로 하는 건 아닌데……진짜아아! 오빠!!"
별안간 고함을 지른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앞으로는 그렇게 막 분위기 잡고 설명하는 거 금지! 절대 금지!"
"갑자기 뭐야. 무섭다고 해서 기껏 자세히 설명해줬구만."
"저, 정도란 게 있잖아요! 이게 어딜 봐서 설명이에요!"
"아니,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렇다고 꼭 그렇게 유, 유혹하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조금 전까지 분위기 잘 타다가 왜 이래 또.
"……젖었냐?"
"오빠, 혹시 불난 집에 부채질 한다는 속담 알아요?"
"소싯적 보급창고 옆에서 그 지랄을 떨다가 방탄으로 처맞았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리 없었던 그녀는 부루퉁하게 쳐다만 볼 뿐이었다.
대신 당장이라도 던지겠다는 것처럼, 한 손에 아이스크림 통을 쥐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날아오진 않겠지만……아무래도 더 이상 자극하는 건 위험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부추겨놓고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니! 치사하잖아요!"
"아니, 그래도 이런 설명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지 않아?"
"……너무 쏙쏙 들어와서 문제란 말이에요 정말."
"족집게 강의를 해줘도 클레임이 들어오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우리 서윤이, 이렇게 잘 넘어가는데 어디서 사기나 안 당할지 걱정이네.
안 그래도 길에서 붙잡히면 뒤도 안 돌아보고 전속력으로 도망치는데.
괜히 솔깃한 이야기랍시고 주변에 달라붙는 놈은 없나 몰라.
된통 걸려서 구워삶는 소릴 듣다 보면 대출도 받아올 것 같단 말이지.
"……서윤이 넌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의논해야 한다. 알았지?"
"뭐, 뭐에요, 갑자기."
"아니, 그냥. 걱정 돼서 그래."
"어차피 내 인생의 무슨 일이라곤 전부 오빠가 저지르는데요 뭘."
물론 이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푼수는 투덜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도 막 설명한다고 했으면서, 일부러 야한 분위기로 몰아가고."
너도 편승해서 한 마디 거들지 않았냐는 소린 안 하는 게 좋으려나.
아무튼 저렇게 보여도 은근히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라니까.
무섭다고 해서 일부러 몰입할 수 있도록 판도 깔아줬구만.
이제 와서 하지 말라고 하면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그, 그런 식으로 자꾸 상상하게 만들면……안 된단 말이에요."
전언철회.
항상 침대 위에서 듣던 투정이랑 마찬가지였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추임새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한 번씩 튕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뭐.
"서윤이도 알고 보면 은근 제멋대로지?"
"오, 오빠……?"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툭하면 야한 쪽으로 몰고 가니까 그런 거잖아요."
"서윤이 수준에 맞춰서 설명하느라 엄청 고생하는 것도 몰라주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짐짓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들어놓고,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해. 응?"
"그, 그러니까 저는 좀 더 평범하게……설명을 해달라는 건데."
"평범하게 설명하면 만족할 것 같아?"
"……뭐든 지금보단 훨씬 나을 것 같아요."
꼼지락거리는 걸 보니 진짜로 아슬아슬한 상태인 듯했다.
인터넷 채팅으로 조교를 받던 경험이 몸에 남아서 그런 건가.
어째 실제로 만져주는 것보단 말로 괴롭히는 걸 더 좋아한단 말이지.
하긴. 취향이라는 건 의외로 처음 본 장르에 따라 정해지기도 하니까.
"아직 설명할 게 더 남았는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시, 싫다는 게 아니라아……!"
"거 참, 시끄럽네. 알았으니까 이리 와."
자꾸 쭈뼛거리는 그녀를 확 끌어당긴 나는 무릎을 두드렸다.
서윤이는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순종적인 태도로,
"뭐에요, 진짜."
조심스럽게 다가와선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동안 그녀가 머리카락을 깔고 앉지 않도록 거들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머리카락도 은근히 무게가 나간다.
그런데 정작 그걸 지탱하는 목은 가늘어서 의문이란 말이지.
"……샴푸 냄새 좋다."
"오빠도 같은 거 쓰잖아요."
"덕분에 비싼 거 사서 쓰고 있지."
서윤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여자친구에게서 나와 비슷한 체취가 감돈다는 건……정말로 아는 사람만 안다.
뭐랄까,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어서 애정이 깊어진다고 해야 하나.
좀 더 아껴주고,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인 레벨에서 솟아오르는 기분?
"……오늘 집에 가지 마라."
"오빠 때문에 나 집에 먼지 쌓이겠어요."
"딱히 상관없잖아. 어차피 잠만 자러 가는 집인데."
"언제는 살림 차린다고 구박하더니……갑자기 왜 그래요."
강하게 끌어안기는 느낌이 싫진 않았는지, 서윤이도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 보면 오빠도 나랑 떨어지는 거 엄청 싫어하더라."
"……존나 싫어."
"또 그렇게 나쁜 말 하는 거예요?"
"은근슬쩍 주도권 잡으려고 하지 마라."
양쪽에서 옆구리를 꽉 누르자 서윤이는 "꺄항!" 정체불명의 비명을 질렀다.
"어딜 감히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려고."
"바, 방금 전까지 좋은 분위기였는데에!"
"가르쳐줬잖아. 릴리프라고."
"여자친구 상대로 그러지 좀 마요 제발!"
서윤이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탕 내려치며 버둥거렸다.
무릎 위에 앉아있을 땐 되도록 들썩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싸게 주고 산 게이밍 의자라서 망가지면 진짜로 울고 싶을 것 같단 말이야.
"……모처럼 분위기 좋았는데, 오빠가 다 망쳤어."
굳이 나한테 죄목을 붙여주자면, '달달한 분위기를 못 견딘 죄' 정도가 될 것이다.
혹은 '여자친구에게 쓸데없는 기대를 심어준 죄'가 덧씌워질지도 모르고.
개인적으로는 '덮치고 싶은 걸 참아야 했던 죄'가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졸지에 죄인이 되어버린 나는 토라진 그녀를 달래느라 한참이나 진땀을 빼야 했다.
그나저나, 좋은 분위기였다면서 아쉬워하는 걸 보면 확실하게 기대하고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일단 마무리는 지어야 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맞춤식 교육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학생이 싫어한다면 방법을 바꿔야겠지.
"단어의 정의를 가르쳤으니 다음은 뭘 배울 차례겠어."
"……활용?"
"맞아. 활용법을 배울 차례지."
"그래서요? 아까처럼 눈 가리고 속삭이려구요?"
서윤이는 다 안다는 것처럼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릎에 앉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못 움직이게 끌어안고 야한 말……하면서 괴롭히려는 거잖아요."
"딱히 괴롭힐 생각은 없지만 움직이자 못하게 하려는 건 맞아."
"……아니에요?"
"원한다면 해줄 수도 있지만, 싫다며?"
암캐의 상상을 벗어나지 못할 수준이라면 주인 노릇 때려치워야지.
"게다가 서윤이는 나한테 배우는 게 싫은 것 같으니까."
"시, 싫다고 하진 않았잖아요. 부담스럽다고 했지."
"그래그래. 말하지 않아도 그 기분 알아."
"오빠 목소리면 너무 쉽게 넘어가버리니까……반칙이에요, 솔직히."
그런 것치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은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예 근본적인 교육방식을 바꿔보려고."
"……또 이상한 짓 하려는 것 같은데."
"요즘 같은 세상에 말로만 떠드는 강의는 지겹지."
모름지기 예로부터 성교육에는 영상매체가 제일이라 하였거늘.
모자란 말솜씨로 감히 학생을 가르치려 했던 내 잘못이 크구나.
"교육은 역시 시청각이지."
"……오빠?"
서윤이는 불안한 시선으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딸각거리는 마우스와 빠르게 바뀌는 브라우저 창을 번갈아 보았다.
"저기, 오빠?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죠?"
"잠시만 기다려 봐. 내가 괜찮은 영상 만드는 회사를 알거든."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또한 열정적이었다.
"미, 미쳤어, 진짜! 여자친구 앞에서! 뭘 하려는 거예요, 지금!"
"아 왜. 뭐가 어때서 그래. 그냥 시청각 자료잖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말이 안 될 건 뭐야. 소프트한 걸로 고를게. 걱정 마."
"그, 그런 문제가 아니라! 따라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누가 따라하자고 했냐.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보란 거지."
서윤이는 팔꿈치로 턱을 꾹꾹 밀어내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애초에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 뿐더러,
일단 의자를 끌어당기자 책상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간절함을 담아 호소하는 것 외엔 없었다.
"오, 오빠, 지금 진심으로 이러는 거예요?"
"그럼 가짜 진심도 있냐."
"여자친구 앞에서 그, 그런 걸 보겠다고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서윤이도 같이 보는 거야."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떤 말도 안 통한다는 걸 직감했는지,
저항을 포기해버린 서윤이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두고 봐요 진짜."
뭐, 입으로는 저런 소릴 하고 있었고.
은근슬쩍 편한 자세로 고쳐 앉기도 했지만.
어쨌든 남자친구 무릎 위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끌어안긴 채,
생애 처음으로 BDSM 포르노를 시청해야 할 처지란 건 변함없었다.
"……"
솔직히 말해서, 약간이지만 몹쓸 짓을 해버렸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