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모르거나 부족하거나 (6)
대답을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어차피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일단 거절해버리면 두 번째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봤자 나한테는 통하지도 않고.
"……어떠냐고 물어보셔도,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간단한 거잖아. YES or NO. 둘 중 하나만 골라."
"그, 그럼 당연히 Yes……긴 한데, 가벼운 거 맞죠?"
서윤이는 확인보단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물었다.
얼굴에서 간절함이 뚝뚝 묻어난다고 해야 하나.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기에,
나는 가능한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가 언제 서윤이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있어요."
"내가?"
"일찍 잔다고 했으면서 밤새 게임하잖아요."
여자친구가 하루 종일 옆에 붙어있는데 어떡하냐 그럼.
일단 집에 돌려보내야 솔랭을 돌릴 거 아냐.
애초에 교육적인 의미로도 보여줄 만한 게 아니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다간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는데.
"그래 뭐, 없진 않지만……이런 쪽으로는 진지하잖아."
"그건 그렇죠. 약속을 어긴 적은 없으니까."
"혹시 무서워서 그래?"
"……약간 초조한 것처럼 으스스한 느낌이 들긴 해요."
서윤이가 고개를 흔들자,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재채기를 애써 참은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무조건 기분 좋을 테니까……좀 걱정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기대를 받으면 부담스러운데."
"사실이잖아요. 솔직히 요즘도……"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약간 목이 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한테 너무 익숙해져서……혼자서는 도저히 그게."
"혼자서는 도저히 만족이 안 돼?"
"……오빠가 해주는 것만큼 기분 좋지 않단 말이에요."
여자친구한테 받을 수 있는 칭찬 중에 이보다 더한 게 또 있을까.
"이번에도, 무조건 기분 좋을 테니까……그, 그런 거 있잖아요. 이런 걸 알아도 되나? 싶은 느낌."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매일매일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빠도 매일매일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어."
뭐든 겉으로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서윤이는 서윤이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이다.
내 경우엔 밑천이 바닥나지 않도록 열심인 거지만.
"게다가 주인님이 되면 훨씬 더 사정을 안 봐주니까……긴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젠 몸으로도 슬슬 기분 좋은 걸 기억하기 시작했지?"
"……매번 그런 식으로 당하면 누구라도 항복할 걸요."
"솔직히 서윤이도 야한 거 좋아하잖아."
"가끔 좀 지나치게 해버리는 것만 아니면……싫진 않아요."
"오빠도 그런 서윤이가 귀여워서 자꾸 느끼게 해주려는 거고. 그렇지?"
나는 슬슬 다리가 저릿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말랑말랑한 뺨을 꼬집었다.
"그래도 억지로 하고 싶진 않으니까,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시, 싫지 않다니까요. 방금 YES라고 대답했잖아요."
"기대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될까?"
"……그냥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 걱정돼서 그래요."
원래 호기심으로 발을 들였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빠져드는 법이지.
"이젠 멍멍 짖는 것 정도는 별로 이상하지도 않게 느껴지고."
"뭐, 할 수 있는 게 하나씩 늘어날수록 달라지긴 하겠지."
"……나중에라도 헤어지겠다는 소리 했다간 봐요."
"알았어. 알았어. 죽어도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는 안 할게."
이러다 진짜로 코가 꿰이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나도 모르겠다.
서윤이에겐 첫 연애인 만큼 이래저래 불안한 것도 많겠지.
그만큼 내가 못 미더운 남자친구기도 하고.
이렇게 몇 마디 말로 안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줘야지 뭐.
"아무튼 뭐, 손목만 묶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에에."
"비교적 부상의 위험도 적고."
"전에 오빠가 했던 말 기억나요?"
"내가 했던 수천수백 가지 말 중에서 어떤 거?"
구글도 그거보단 구체적으로 검색해야 결과가 나오는데 말이지.
"결박이 제일 위험한 거라고 그랬어요."
"당연히 위험하지. 난이도가 높잖아."
"자칫 잘못하면 근육통부터 인대 부상, 탈구에……또 뭐더라."
나는 서윤이가 내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일어날지 모르는 심각한 부상을 열거하는 것치곤 지나치게 담담했기 때문이다.
대체 부엌칼은 어떻게 다루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겁이 많은 성격으론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수갑 같은 것도 함부로 채우는 거 아니라고 했어요."
"……내가 정말로 그랬어?"
"잘못했다간 어깨가 팔꿈치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소릴 했더라.
아마 모종의 이유로 겁을 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서윤이가 결박 플레이가 궁금하다고 조르기라도 했나?
그런 걸 함부로 조를 만큼 행동력과 배짱이 있는 애가 아닌데.
하지만 떠오르지도 않는 기억의 자취를 추적하기보단, 그녀를 달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나는 곧장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가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물론 오빠를 믿고 있긴 한데, 좀 불안하기도 해요."
"정 무서우면 수갑 안 쓸게. 그럼 괜찮겠지?"
"수갑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딱히 문제 없어. 필요하면 넥타이 같은 것도 있으니까."
적당히 크기만 맞는다면 의외로 손수건 같은 것도 괜찮다.
별로 추천하진 않지만 구하기 쉬운 스타킹도 나쁘지 않고.
물론 필요한 매듭법 정도는 공부해야겠지.
실수하면 안 되니까 반복 숙달은 기본이고.
"……뭐, 서윤이가 괜찮다면 쓰긴 하겠지만."
내가 괜히 로프 결박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단단하게 묶는 게 의외로 어렵단 말이지.
"딱히 상관없어요. 여기까지 와서 싫다는 것도 이상하고."
"될 대로 되란 식의 말투는 좋지 않은데. 정말로 괜찮아?"
"……여기서 그걸 물어보는 거예요?"
"아니 뭐,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으니까."
"가끔 보면 오빠도 진짜 성격 나쁜 것 같아요."
그게 꼭 가끔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것 같진 않은데.
"……그리고 어차피 오빠도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으면서."
"이럴 작정이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안대에 수갑까지 얹고 갈 생각이었잖아요."
"그렇게 치밀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때도 되지 않았냐."
"왠지 모르게 아까부터 계속 끌려다닌 기분이란 말이에요."
오히려 나야말로 서윤이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기분인데.
오늘만 해도 누가 고집을 부려서 마트까지 다녀왔지 아마.
"솔직히 말해봐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죠? 그쵸?"
"우리 서윤이,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냐."
"오빤 항상 그랬잖아요."
"내가 뭘 또 항상 그랬어."
"맨날 그렇게 몰입하게 만들어서……안 하곤 못 배기게 만들고."
그런 게 가능했으면 벌써 정장 쫙 빼입고 옥장판 팔러 다녔겠지.
학교 근처 단칸방 원룸에서 취직 걱정하며 살고 있겠냐.
"……다시 말하지만, 이 오빤 그렇게 노련한 사람이 아니란다."
서윤이는 괜히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흥흥거리며 발을 흔들었다.
"오빠랑 대화하다 보면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아니, 본디지에 흥미가 있다고 한 건 서윤이였잖아."
"흐, 흥미 있다곤 안 했어요!"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좀 더 솔직해지면 누가 잡아가냐."
한숨을 푸욱 내쉬자 서윤이는 약간 켕기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대놓고 말하기엔 창피하단 말이에요."
"무릎 위에 앉아서 야동을 보는 건 괜찮고?"
"그, 그것도 오빠가 시킨 거잖아요."
"사귀기 전이라면 모를까. 너무 빼는 것도 실례야."
적당히 타이르는 것처럼 말한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자꾸 물어봐서 미안한데, 정말로 괜찮은 거지?"
"……손목,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안대도?"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긴 한데."
서윤이는 "으음."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일단은 오빠랑 같이 한다는 게 기대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서윤아, 전에 프렌지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적 있던가?"
"프렌지?"
"Frenzy. 보통 Sub Frenzy라고 하거든,"
"……섭이 혹시 서브미시브를 말하는 거예요?"
"뭐, 그렇지. 굳이 설명하면 소모적인 욕망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SM이라는 게 올라갔다 떨어지는 감정의 낙차가 굉장히 크잖아.""
내 말을 방해하기 싫었는지, 서윤이는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해방 상태에서 느껴지는 고양감이랄지. 도취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런 적 있지?"
"도취……라고 하면, 으음. 저번에 벌 받을 때 그랬어요. 굉장히 몰입해버려서."
"그게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해?"
"주인님이 질문을 던지고, 제가 대답하는 거였는데……그게."
이번엔 그녀의 말을 방해하기 싫었던 내가 계속하라며 손짓했다.
"대답이 끝날 때마다 벌을 주셔서……저도 점점 야한 말을 하게 됐어요."
"혹시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기억해?"
"그, 글쎄요.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느낌?"
"서윤이는 그런 느낌이 싫었어? 아니면 좋았어?"
"……당시엔 잘 몰랐는데, 끝나고 생각하니까 정말로 주인님 거가 되는 것 같아서. 되게 많이 좋았던 것 같아요."
나는 미소도 짓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게 며칠 간격으로 계속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어떨 것 같아?"
"……일상생활이 돼요, 그거? 계속 생각날 것 같은데."
"힘들겠지? 다른 플레이도 하고 싶어질 테고."
"아마도……네. 그럴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말로는 사탕 가게 증후군이란 표현을 쓰기도 해.."
사탕 가게에 처음 온 아이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가게에 있는 사탕을 전부 먹어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자신을 소모하는 것으로 커지는 욕망이란 건 따지고 보면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다만 SM이라는 취미의 특성 상 다양한 리스크가 동반되니 문제가 되는 거고.
"근데 저는 오빠가 잘 컨트롤하고, 신경도 많이 써주니까……괜찮지 않아요?"
"Sub란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내 생각엔 양쪽 다 적용되는 것 같아."
주인과 노예, 양쪽 모두에게 말이다.
분명히 위험하고 무리한 요구인데도 쉽사리 받아들여버리는 일도 있다.
단순히 사탕이나 과자를 고르는 기분으로 플레이를 고르거나,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내가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진 말라는 거야."
"……꼭 그렇진 않은데. 오늘도 오빠한테 싫다고 많이 했잖아요."
"오늘에 국한된 게 아니라, 앞으로를 위해서도 하는 말이야."
"점점 난이도가 더 올라갈 테니까?"
"맞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꼭 생각을 해봐. 내가 정말로 이걸 원하는지."
이래저래 말은 했지만, 결국은 좀 더 솔직해졌으면 해서 하는 소리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관계는 오래 못 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도 가능하면 서윤이랑 오래오래 지내고 싶거든."
"……아, 알았어요. 노력할게요."
일단 말은 해뒀으니 어떤 식으로든 생각하는 게 있겠지.
서윤이가 그런 상태라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고.
프렌지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 중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는 것도 있으니까.
혹시 내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됐을 때를 대비해서라도 안전장치는 만들어둬야지.
"아직까진 평범한 커플도 할 수 있는 플레이니까 괜찮긴 하지만."
"……펴,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것치곤 되게 철두철미한데요."
"뭐든 기초공사가 중요한 거야. 안 그러면 후회한다."
"그래도 오빠를 믿지 말라는 건 아니죠?"
"당연한 거 아니냐. 주인을 못 믿으면 SM을 하는 이유가 없잖아."
서윤이는 "그쵸?"라며 배시시 웃었다.
"오빠 성격에 저보다 훨씬 더 많이 고민하고 걱정할 텐데."
"……그건 알아도 모른 척 해주는 게 예의야."
"이번에도 혹시 다칠까 봐 준비 엄청 많이 할 거 알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꼭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책상에 엎드렸다.
"오빠가 나한테 말할 정도면 이미 혼자서 15번은 생각했다는 건데요 뭘."
"……그러니까, 그런 건 모른 척해주는 게 예의래도."
"진짜 솔직히 말해도 돼요?"
"솔직하지 말고 가식도 좀 섞어줘. 무섭다."
짐짓 덜덜 떠는 시늉을 하자 서윤이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오빠가 이렇게 엄청 애지중지하는 거, 되게 기분 좋아요."
"그야 뭐, 남자친구 취향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그것까지 다 알고서 만난 건데요 뭘."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내가 모르는 게 있긴 해요? 취향에, 생활에, 전 여친까지."
아직 서윤이한테 비밀로 해야 남았나 고민하던 나는 항복을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과거까지 알고 있는 여친 앞에선 버틸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얘는 과거가 너무 깨끗하니까 걸고 넘어질 구석도 없고.
"……연인 사이에 비밀 같은 건 있으면 안 되지."
"언제는 사생활은 꼭꼭 지켜줘야 한다고 그랬으면서."
일단 혼자 있는 시간을 준 다음에 그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이젠 더 이상 지켜야 할 사생활이란 게 없는데 무슨 상관이람.
"게다가, 오빠는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내가 뭘 까먹었는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 말해. 뭔데? 내가 뭘 잊어버렸는데?"
"……오, 오빠는 내가 먼저 좋아하게 됐다고 말하려던 건데."
원래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려고 준비해둔 비장의 대사였는지,
막상 말이 꼬이자 서윤이는 "으아앙!" 책상을 두드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쪽팔린 줄은 아는 것 같았다.
원래 저런 대사는 오폭했을 때 데미지가 좀 크지. 이해해.
그리고 언제나 서윤이가 저지른 일의 뒷수습은 내 몫이다.
"그래도 꼬신 건 내가 먼저였으니 비긴 걸로 치자."
"마, 맞아요! 오빠가 먼저 막 유혹했어요!"
"말은 똑바로 하자. 유혹하진 않았어."
"아무것도 모르는 저한테 막 가르쳤잖아요!"
"그럼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는데 그냥 방생하냐?"
서윤이는 "씨잉……" 원망스런 눈으로 날 흘겨보았다.
"기왕 낚은 거, 잘 키워줄 테니까 나중에 어항 값이나 해라."
"……제발 부탁이니까 횟집에만 팔지 말아주세요."
"괜찮아. 거기서도 독 있는 생선은 안 받아주더라고."
적당히 대꾸한 나는 상의 아래쪽으로 손을 넣어 등을 쓰다듬었다.
등을 기대고 있을 때 눈치는 챘지만……역시 안 입고 있네.
걸리적거리는 게 없으니까 좋긴 하다만.
"오빠?"
나는 대답 대신 양손으로 어깻죽지를 꾹꾹 눌렀다.
서윤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흐으." 다 죽어가는 신음을 흘렸다.
"제대로 본디지 해보려면 일단 몸이 유연해야지."
"유, 유연한 건 좋은데……조금만 살살─!"
"엄살은. 이 정도는 강하게 해줘야 돼."
"아니, 진짜 아프다구요! 아파아아! 아아악!"
"허리 우두둑거리는 것 봐라. 이게 스무 살이냐."
여자들도 진짜로 아프면 "꺄악!"이 아니라 "끄아악!"이 돼버린단 말이지.
결국 정성과 약간의 사심이 들어간 마사지에 녹초가 된 그녀는.
"이, 이제 내려갈래……"
마치 액체가 흘러내리는 모양새로 무릎 위에서 쏟아졌다.
어떻게든 그녀를 무릎 위에서 내려오게 만든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물론 내가 힘들어서……는 아니고, 무릎 위가 의외로 불편한 자리거든.
오래 앉아있기에 좋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딱딱해서 아파.
꼬리뼈인지 골반인지, 자세를 고칠 때마다 자꾸 부딪혀서 아프다고.
"……그나저나 우리 서윤이, 뻣뻣해서 큰일이다 정말."
나는 도저히 허리를 펼 엄두가 안 나는지, 바닥에 앉아서 골골거리는 그녀를 향해 혀를 찼다.
"너 요즘 스트레칭 안 하고 있지."
"프, 플레이도 끝났는데 왜 그래요 또."
서윤이는 바닥에 쏟아진 슬라임 같은 모양으로 꾸물꾸물거렸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해. 이번엔 손목이랑 어깨, 상반신 위주로."
"……필요하다고 하시면 뭐, 하겠지만서도."
"그리고 또 하나. 말해줄 게 있는데."
"네네. 말씀하세요, 주인님. 명령이라면 따라야죠."
하드코어 마사지의 효과인지, 묘하게 불량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였다면 곧장 비슷할 정도로 맞받아쳤겠지만……뭐 어때.
이번만큼은 너그러운 아량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곧 폭탄을 투하할 예정이라면 조금 정도는 자비가 필요한 법이다.
"오늘부터 플레이 당일까지 모든 종류의 애정행위를 금지합니다."
"……네?"
"다시 말해줄까?"
머뭇거리던 그녀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에 오빠랑 하는 것들도 전부 다……?"
"키스나 포옹, 당연히 섹스도 일체 금지."
"……소, 손을 잡는 건요?"
"피치 못할 경우에만 허가합니다."
"오, 오빠랑 꼭 끌어안고 자는 건?"
"오늘부터 오빠는 바닥에서 자겠습니다."
서윤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긍정적 가치와 즐거움에 작별을 고한 것 같았다.
뭐랄까, 중성화 수술을 마친 고양이가 주인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행복을 빼앗겨버린 사람의 눈동자였다.
"며칠 동안 느긋하게 애태워서 아슬아슬 한계인 상태로 즐기게 해줄게."
덕분에 나는 준비한 대사를 꺼내면서도 쉽사리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까 플레이 때까지만 참아. 그런 표정 짓지 말고."
"그게 언제인데요."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
"사흘. 그 이상 넘어가면 친정으로 돌아갈 거예요."
"친정이라고 해봤자 자취방……알았어. 최선을 다할게."
결국 예정에도 없던 데드라인의 발생으로 인해, 사흘 내내 그녀에게 바가지를 긁혀야 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