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맡겨야 하는 것 (1) (32/43)



〈 32화 〉맡겨야 하는 것 (1)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명할 것 같은 양반이 했을 법한 말이 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다음에나 실감할 수 있는 거라고.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의미를 실감하지 못했다.


소중한 건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여자친구가 생긴 지금, 약간이지만 그 의미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와 씨. 티모 원딜이라니, 제정신인가 진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란 게 얼마나 쓸쓸한 건지.


그녀의 빈 자리가 얼마나 공허하고 외로운지 간신히 알아차렸다.

백주대낮에 주구장창 게임만 해도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시원하게 쌍욕을 박으면서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귀찮아서 굶고 싶어도 밥 먹자며 끌고 나가는 사람이 없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놀아달라며 툭툭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평일 오후라는 건 이런 거였는데 말이야.

"전생에 죄를 지었나. 어떻게 매번 인간 같잖은 새끼들이 걸리지."

나는 컴퓨터 앞에서 후루루룩 컵라면 국물을 마시며 투덜거렸다.


평소엔 서윤이가 염분 과다라며 절대로 못 먹게 하는 라면이다.


싱크대 아래에서 푹푹 썩어가던 걸 꺼냈는데……맛있네.


기분 같아선 맥주도 꺼내고 싶지만, 잔소릴 들을 테니 자제하자.



역시 사람은 너무 행복하면 행복한 줄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가끔씩 이렇게 혼자서 외로워봐야 여자친구의 소중함을 느끼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지 벌써 2시간째 게임이나 하고 있다고.

같이 놀 사람이 없으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멈추질 못하잖아.




주말이 기다린다는 걸 아니까 일주일을 버틸  있는 거 아니겠어?

여자친구가 없는 시간이 이렇게나 지루할 줄은 미처 몰랐네.

그런 의미에서 가끔씩 자릴 비워줬으면 하는 조그마한 바람이 있다.



"……슬슬 올 시간 아닌가?"

힐끗 쳐다본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엔 늦어도 11시면 도착하는 것을 볼 때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딱히 내가 매정한 남자친구라서 그런 건 아니고,

 

16584350285131.jpg 





아마 지금쯤 열심히 매장을 돌아다니며 심부름을 하고 있을 거다.


그걸 감안해도 늦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재촉하는 것도  그렇잖아.



"애도 아니고. 심부름 정도는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뭐, 슬슬 준비를 하긴 해야겠지만……일단은 찐막. 진짜로 찐막.
.
.
.
.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나조차 믿지 않았던 것처럼,

정말로 털고 있어날 수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니까, "한 판만 더!"는 만고불변의 진리 같은 거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결심이 으레 그렇듯,

내가 준비를 끝마친 건 아슬아슬하게 서윤이가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오빠, 나 왔어요오……"




이젠 자연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기운 없이 인사했다.


도어락을 누르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지퍼를 올리고 있던 나는,


"더운데 고생했어. 힘들지?"

아무  없었다는 듯 자상하게 웃으며 여자친구를 맞이했다.


그동안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시선을 눌러 담아서.


"더워어어."


그동안 언제 오나 노심초사했으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윤이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팽개치더니,


"……에어컨. 에어컨."

남자친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냉큼 방으로 달려가버렸다.

그리곤 에어컨 앞에서 팔락팔락 앞섶을 흔들며 냉방을 만끽했다.

"흐아아, 덥다."

아니 뭐, 기분은 이해하지만……인사 정도는 받아주면 안 되나.

"……이젠 아주 자기 집이구만."




현관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그녀가 내던진 가방을 수습했다.

이것저것 들어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오늘 많이 더워?"

"완전히 찜통이에요, 찜통. 지글지글해요."

"거 참, 찜통인지 프라이팬인지 하나만 해도 될 텐데."




나는 그녀에게 타월 하나를 건넸다.



"일단 땀부터 닦아.  식는다."

"……감사합니다."


"땀 많이 흘렸으면 샤워라도 할래?"


연신 손부채를 부치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지나가는 말로  던졌다.


서윤이가 우리 집에 와서 씻는 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고.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은 서윤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킁킁."

옷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리곤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나, 냄새 많이 나요?"

"응? 갑자기 무슨 냄새?"


"땀 냄새 난다고……그런 거 아니에요?"

장난기가 동한 나는 은근슬쩍 코를 들이밀며 킁킁거렸다.

단박에 질겁한 그녀는 팔을 내밀며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만! 가까이 오지 말아봐요!"



하긴 뭐, 원룸에서 도망갈 곳이나 있겠냐만.


금세 벽에 몰린 서윤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무리 사귄다고 해도……안 되는 건  돼요!"


"……자꾸 그렇게 오해 받을 행동 하지 말라니깐."


"아무튼! 절대로 다가오면 안 돼요. 알았죠?"


"조그만 게 성질머리는. 알았어. 알았어. 안 할게."


평소 같았다면 절대로 멈추지 않았겠지만……오늘은 날이 아니다.

괜히 플레이를 앞두고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간 피곤해질 테고.

안 그래도 날카로울 텐데 쓸데없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조그만 햄스터 이빨이라도 손가락에 박히면 아프잖아.


"그냥 더워 보여서 한 말이야. 다른 뜻은 없었어."


"……알았으니까 좀만 떨어져 주세요."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그, 그래도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상당히 내로남불인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정작 본인은 내가 안아주면 킁킁거리고 냄새 맡기 바쁘면서.

"그래그래. 알았어. 가까이 안 갈게. 그러면 되는 거지?"


나는 맹수에게서 달아나는 것처럼, 정면을 응시한 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서윤이는 그 와중에도 "진짠가?" 싶었는지  뒤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사람 못 믿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뭐 어쩌겠냐.

남자친구 앞에서 체취가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한 거겠지.

일주일에도  번씩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이에 참 피곤하게 산다 싶긴 하지만.


"……아무튼. 평소랑 똑같으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마."


뭐, 긁어 부스럼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의외로 그런 걸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니까.


당장 오늘부터 1m 이내 접근금지 같은 소릴 들어도 곤란하고.

"그나저나, 서윤이는 머리를 좀 묶어보는 게 어때?"


"……보고 싶어요?"

"아니, 더울 것 같아서 그러지."


 그래도 치렁치렁한 머리를 늘어트리고 다니는데  더울까.


그렇다고 차마 자르라는 소리는 못하겠으니 절충안으로.

"여름엔 아무래도 힘들 거 아냐. 답답하고."

"나 집에 있을 땐 자주 묶고 다녀요."

"……근데  본 적이 없지?"


"오, 오빠 집이 아니라! 저요! 제 방이요!"


그래도 나름 ON과 OFF는 구분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웬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모드가 남았다니.


궁금하긴 한데……건드리면  될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눈치 안 봐도 되니까 편한 대로 해. 괜찮아."

"눈치 보는  아니라……그냥 싫어서 그런 건데."

"풀어헤치고 있는 쪽이 힘들지 않아?"

"오래 묶고 있으면 머리 아프단 말이에요."

서윤이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뜩이나 무거운데 한꺼번에 뒤로 쏠리는 느낌?"


"……무게중심이 달라져서 그런가. 고생하네."


"아무튼 머리도 아프고 목도 뻐근해서 싫어해요."


목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자 괜히 안쓰러워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아침마다 머리 세팅하는 것도 엄청 오래 걸리고."


"거 참, 예쁘다고 다 좋은  아니구만."

"……그래도 오빠가 예쁘게 봐주니까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그래. 에어컨 틀어줄 테니까 여름 끝날 때까지만 참자."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귀여운 소리에 넘어갈 뻔했지만, 오늘까지가 정확히 사흘째.


그녀와 약속했던 데드라인의 기한이었다.


"……아슬아슬했다. 그치?"


하마터면 꼼짝없이 서윤이 좋은 일만 시킬 뻔했네.

아슬아슬하게 머리에 닿기 전에 손을 거둔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칫."

하지만 서윤이는 아쉽다는 것보단 아깝다는 것처럼 작게 혀를 찼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해달라는 것처럼 초조한 얼굴로,

"진짜로 안 해줄 거예요?"라면서 애교를 부리더니.

언제부턴가 건드리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노선을 바꾼 것 같았다.


"서윤아.  요즘 많이 독해졌다는 거, 자각은 하고 있냐?"

"스킨십 금지는 오빠가 마음대로 정한 거잖아요."

"그렇다고 함정을 파겠다는 발상이 무섭다는 소리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요. 오빠가 쓰다듬고 싶어서 그런 거지."

누굴 닮아서 점점 영악해지는지,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네.

욕구불만이 한 바퀴 돌면 반대로 사람이 표독스러워지는 건가.

아무래도 데드라인을 최대 사흘로 정한 건 정답이었던 듯했다.



"좀 더 참으라고 했으면 무슨 소릴 들었을지 무섭다 무서워."



투덜거린 나는 곧장 주방으로 걸어갔다.




"커피 마실 거지?"

"……얼음 잔뜩 넣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에게 앉아있으라고 한 뒤,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싸구려 믹스 커피밖엔 없지만 물 조절은 다년간의 경험이지.


집에 쌀이 없을지언정 카페인은 바닥나게 두지 않는다.

그런 신조로 살아왔던 5년의 자취생활.

이젠 라면과 커피 정도는 어디에 내놔도 꿇리지 않은 수준으로 끓일 수 있다.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

"저 늦었어요?"

"늦어도 1시엔 올 줄 알았지."

"오, 오빠가 제대로 준비해서 오라고 했잖아요."



서윤이는 조금 전에 내팽개친 가방에 비척비척 다가갔다.


그리곤 안쪽을 들여다보며 하나씩 꼽는 것처럼 대답했다.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이랑……심부름도 했고."


"그래그래. 일단 숨  돌리고 확인하자."


"맞다. 오빠랑 같이 먹으려고 간식도 샀어요!"



나는 그녀가 자랑스럽게 "짜안!" 하고 꺼내든 도넛 상자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웬 도넛? 먹고 싶었어?"

"에헤헤, 지난번 데이트  발견했거든요. 맛있겠죠? 그쵸?"


"……이 동네에서 5년을 살았는데도 처음 본다."


"오빠는 원래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서윤이랑 같이 다니면 못 보고 지나칠 일은 없겠네."



도넛이 먹고 싶어서  핑계를 댔다는 게 유력하긴 하지만 뭐.


돈도 없는 주제에 내 몫까지 사왔다는 사실이 기특하잖아.



"좀만 기다려. 커피 끓여줄 테니까 같이 먹자."

"네에엥."

나는 "도넛♪ 도넛♪" 노래를 부르는 그녀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물이 끓는 것을 기다렸다.


약속한 데드라인 당일이라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심하게 긴장하진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오히려 죽을 만큼 긴장해서 반대로 스택이 오버플로우 해버린 거던가.

나중을 위해서라도 확실히 알아둬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너 점심은 먹었냐?"

"바나나 우유?"

"……일단 먹을 것 좀 시키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괘,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은 먹어도 위에서  받을  같아요."




일단 목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도넛은 먹어도 괜찮아?"

"이건 디저트인데요?"

"……그래."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니까  말이 없네.

여자들과 디저트에 대한 의견 차이는 절대로 좁힐  없을 듯했다.



"그, 그리고 저는……그거, 하기 전엔 공복인 게 좋더라구요."




그렇게 말한 서윤이는 약간 뻐근한 얼굴로 배를 문질렀다.



"오빠가 너무 사정을 안 봐줘서……힘들단 말이에요."


"벌써부터 밑작업 들어가는 거야?"


"밑작업이라뇨?"

"그렇게 말하면 오늘도 사정 봐주기 힘들잖아."

"어, 어차피 살살 해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없는 건 아닌데, 아깝잖아. 이렇게 많이 준비했는데."

그러자 서윤이는 툴툴거리는 것처럼 대답했다.




"끝나고 나면 뱃속이 불편해서 울렁거린단 말이에요."

"그럼 저녁엔 소화 잘 되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오빠가 일어날 기운을 남겨주면요."


"배달시켜도 되니까 먹고 싶으면 뭐든지 말만 해."



어차피 오늘은 자고 갈 테니 좀 늦더라도 괜찮겠지.


먼젓번처럼 잠들어버리면 야식으로 먹어도 되니까.



"서윤이는 아침엔 빵이 좋지?"

"오빤 밥이 좋아요?"


"난 그냥 잠이  좋아."

"……혹시 오늘 점심 굶었어요?"



어쩐지 등을 돌리고 있는데도 따가운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컵라면을 먹었다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잔의 커피를 만든 나는 주문대로 얼음을 왕창 집어넣은 다음,

"옛다. 마셔라."

서둘러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서윤이는 당장 반색하며 커피……가 아니라 도넛을 집어 들었다.

같이 먹자는 게 커피를 끓일 때까지 기다리란 소리로 이해한 모양이다.




"마히따."


서윤이는 잼이 뺨에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도넛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곤 설탕과 당분에 몸이 반응하는 건지 발을 동동 굴렀다.



"응. 응응. 오빠도 빨리 드세요. 엄청 맛있어요."


"……서윤이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건드리기  그렇다."

왠지 다람쥐 먹이를 빼앗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같이 먹자고 사오긴 했지만, 사실 이거 함정 아니야?


내가 하나라도 집는 순간 난리 날  같은데.

어떻게 그럴  있냐면서 서운하다고 하진 않을까?

  동안 싸울 때마다 들먹이고, 그런  아니겠지?

"……그런 것보다."




결국 불확실한 위험을 피하기로 한 나는 가방을 가까이 당겨왔다.

서윤이는 여전히 도넛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수증 좀 보자. 돈은 얼마나 주면 돼?"

"돈? 도넛은 내가  거라니까요."


"말고 심부름값 말이야."

"……됐어요. 별로 비싼 것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지."

나는 가방에서 서윤이 파자마를 꺼내며 말했다.



"이건 서윤이가 평소에 입는 거지?"

"……혹시라도 냄새 맡지 마요."


"넌 진짜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저게 남자친구한테  말인가 진짜.

맡아도 잘 때 몰래 맡을 건데.


"그냥 평소에 입는 거냐고 물어본 거잖아."

"조만간 새로 사려고 했단 말이에요."


"왜? 낡았나? 마음에 안 들어?"

"……오빠 것까지 두 벌. 커플 룩으로,"


커플ㄹ……까지 듣는 순간 나는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가끔 서윤이가 색깔만 다른 머그컵을   산다거나,

신지도 않는 슬리퍼에 눈독을 들인다거나 하는 등.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아냐. 커플 룩은 절대 아냐.




"……미안. 오빠가 그런 거에 두드러기가 돋는 체질이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서윤이는 입술만 조금 삐죽거릴 뿐.

대체 왜 싫은 거냐면서 생떼를 쓰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언젠가 기필코 설득하겠다는 것처럼,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뭐."

도넛을 물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언젠가 기어코 그런 날이 올 거란 어렴풋한 예감이  목을 간지럽혔다.

"……여자친구가 점점 무서워지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야."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무시해버린 나는 다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파자마 하의……화장품, 드라이기, 브래지어에 팬티……"오, 오빠아아앗!"

"제, 제가 정리할게요!  뒤지지 마요!"

"거 참, 시끄럽네. 어차피 너 손에 설탕 묻었잖아."



무심하게 대꾸한 나는 가방의 가장 밑바닥에서 찾던 것을 발견했다.




"꺼내기도 힘들게 제일 아래쪽에 처박아놨네."

투덜거린 나는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킨 목적이자,

오늘 플레이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도구.

정가 3,000원의 안대를 서윤이 앞에서 흔들었다.


"자기 손으로 직접 플레이용 도구를 준비해본 건 처음이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