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맡겨야 하는 것 (2)
어젯밤, 내가 서윤이에게 부탁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플레이에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안대 하나.
2. 마음에 드는 향의 에센셜 오일 하나.
3. 고양이 목에 매달 작은 방울.
4. 직원에게 물어보지 말 것.
5. 찾는 게 없으면 울지 말고 전화해라.
6. 계산한 뒤엔 반드시 영수증을 받아올 것.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간단한 심부름이다.
서윤이는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나중에 가르쳐줄 테니 일단 시키는 대로 해."
시큰둥한 대답으로 돌려주자 이내 잠자코 수긍했다.
어차피 설명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건 찾을 때 직원한테 물어보면 안 된다."
"……그보다 직원이 저한테 말 거는 걸 걱정해주세요."
나머지도 그녀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노파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히려 서윤이가 절대로 싫다며 크게 반발했던 건 영수증.
환불할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그럴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그냥 영수증 남기기 싫어서 그런 거지?"
"오, 오빠는 다 알고 있으면서……심술 부렸잖아요."
"심술이라니. 그게 다 필요하니까 시킨 건데."
"……혹시 들킬까 봐 엄청 조마조마했단 말이에요."
서윤이는 먹던 도넛도 내려놓은 채 입을 우물거렸다.
"계산할 때도 막 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고."
"내가 장담하건대, 너 혼자 착각하는 걸 거야."
"아니에요! 진짜로 이상하게 봤어요!"
"그럼 뭔가 수상쩍은 표정이라도 짓고 있었겠지."
오히려 그쪽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리는 게 현실이다.
"수, 수상한 표정 아냐! 엄청나게 진지했단 말이에요!"
"그럼 너무 진지해서 쳐다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직원 분도 계산하면서 얜 뭔데 심각하냐, 싶었을 걸."
적당히 끼워 맞추는 식의 대답이긴 하지만 사실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서윤이는 가끔 옆에서 보는 내가 깜짝 놀랄 만큼 얼굴이 창백해지니까.
평소에도 혈색 좋은 얼굴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편이고.
핏기 없이 파리한 얼굴을 보게 되면 놀라서라도 한 번쯤 더 쳐다보겠지.
"……나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하지만 서윤이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지 뺨을 찰싹거렸다.
"신경 쓰지 마. 긴장하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오빠가 볼 땐 어때요? 많이 이상해요?"
"글쎄? 내 눈에는 뭐든지 예쁘게 보여서."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본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걱정 말라니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했을 거야."
"애초에 심부름 시킨 물건이 이, 이상하잖아요!"
"수면 안대랑 아로마가 어딜 봐서 이상한데?"
"……사정을 아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잖아요."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니,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다는 거야."
"세, 세상은 넓으니까 누군가는 있을 거 아녜요 정말!"
세상이 넓다는 말에는 나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그 '누군가' 중의 한 명이 내 앞에 앉아있었으니까..
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혹시 관심이 있더라도 서윤이가 생각하는 그런 쪽은 아니었을 거야."
오히려 아르바이트 입장에선 관심조차 없었을 걸?
정말로 이상한 시선을 보냈는지도 회의적이고.
만약 정말로 시선을 보냈다면……좀 더 다른 이유.
"구경 그만하고 빨리 좀 꺼졌으면."이라던가,
혹은 "제발 진상만 부리지 마라." 등등.
퇴근할 때까지 반복하는 루틴의 쿨타임을 돌리고 있었을 거다.
"세상이 너한테 관심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래도 오빠는 이상한 목적으로 시킨 거잖아요."
"그리고 서윤이도 알면서도 심부름을 했지."
"프, 플레이에 필요하다고 하니까, 꾹 참았던 건데."
나는 그녀가 먹다 남긴 도넛을 반으로 나눠서 입에 물려주었다.
"우리 서윤이, 아직도 애기다 애기."
"자, 자꾸 그런 식으로……냠."
"하나 더 먹자."
"냐암."
발끈하는 와중에도 납죽납죽 잘도 받아먹네.
조금이지만 먹이로 길들이는 기분도 들고.
"첫 심부름이라고 긴장했어? 아니면 너무 어려웠나?"
"펴, 평범한 심부름이 아니잖아요. 플레이……인데."
"정확히 말하면 플레이가 아니라 사전 준비지."
"……거짓말."
"어허. 거짓말이라니."
"수치 플레이……같은 거잖아요. 나도 대충은 알아요."
"만약 수치 플레이였다면 고작 이 정도론 안 끝났을 걸."
남은 도넛 조각을 입에 털어 넣은 나는 입가를 훔쳤다.
"게다가 정말 플레이였다면 혼자 보내지도 않았어."
"그럼 진짜로 심부름……이었던 거예요?"
"계속 말했잖아. 심부름이라고."
"그, 그럼 주인ㄴ……오빠가 해도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말하잖아. 그게 다 필요한 거라니까."
첫 플레이가 끝난 직후 반성한 게 있다면 서윤이의 낮은 플레이 숙련도였다.
일주일이라는 준비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지쳐버린 것도 있겠지만,
처음인 그녀에게 너무 과도한 부담을 준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롤 플레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역할에 대한 이해와 몰입이 필요한 건데도.
나름 지식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도미넌트 쪽의 설계 미스였다.
"오빠도 저번 플레이부터 여러 가지로 생각을 했거든."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동안의 조교 때문에 무심코 착각해버린 거겠지.
서윤이는 어느 정도 플레이에 맞춰줄 수 있는 경험이 있는 서브미시브라고.
아무리 주종 관계의 확립이 목적이었다지만, 역시 짐이 무거웠을 거다.
역할에 대한 이해가 얕으니 몰입이 힘들고……그러니 자꾸 맥이 끊어지지.
결국 솔직한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소 난폭한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서윤이는 어제 내가 심부름 시켰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어?"
"……저번이랑 똑같아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
즉, 익숙하지 않을 테니 여유롭게 가자……라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버스도 사람이 타는 거라고, 뭘 알아야 여유로운 것도 느낄 틈이 있지.
레이드 던전에 뉴비를 데리고 가봤자 말귀나 제대로 알아듣겠냐고.
수동적인 성격의 그녀에겐 오히려 타이트하게 꽉 졸라매는 것처럼.
명령이나 지시가 자세하고, 해야 할 일이 구체적인 쪽이 알기 쉬웠을 거다.
아직 능동적인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확실하게 고삐를 당겨야겠지.
"이게 플레이에 쓰는 도구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렇지?"
"……알고 있으니까 긴장한 거잖아요."
나는 그녀가 사온 안대의 포장을 뜯었다.
콰직, 비닐이 구겨지는 소리에 서윤이는 목을 움츠렸다.
"바꿔 말하면, 서윤이는 자기 손으로 플레이를 준비한 거네?"
"저, 저는 그냥 심부름 담당이고, 준비는 오빠가 했는데."
"그래도 서윤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거 아냐?"
"중요한 역할……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한 거긴 하죠"
"그럼 서윤이는 플레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어?"
나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괜찮아. 의도가 있어서 하는 질문은 아니니까.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돼."
"……자각, 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심부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어?"
"그냥 뭐랄까, 잘 설명은 못하겠는데……약간 긴장했다고 해야 하나"
잠자코 기다리자 서윤이가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목줄……도 그렇고, 평소엔 전부 주인님이 준비하잖아요."
"뭐 그렇지."
"근데 갑자기 심부름을 하라고 하니까."
"갑자기 내가 왜 이러나 싶었어?"
"드디어 나한테도 뭔가 시켜주는구나……싶어서 좀 기뻤어요."
어느 정도는 의도한 반응이었기에, 나는 작게 미소만 지었다.
"오, 오빠가 말한 것처럼 이거, 되게 중요한 거잖아요. 없으면 안 되고."
"당연하지. 블라인드 플레이에서 눈가리개가 없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당연히 오빠가 준비할 줄 알았는데……나한테 맡겼잖아요."
당시의 기분을 되먹이는 것처럼 서윤이는 손가락을 꼼질꼼질거렸다.
"그래서 속으로 좀 뿌듯했어요. 내가 못 미덥진 않은가 보다, 하고."
"어떤 의미로? 여자친구로서? 아니면 파트너?"
"둘 다 크게 다를 거 없어 보이는데."
"서윤이는 어느 쪽인 것 같아?"
"……이번엔 파트너, 로서 믿어준 것 같아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잖아요. 오빠든 주인님이든……항상 뭐든지 나보다 잘하니까."
"으음. 글쎄, 왠지 또 네거티브로 빠질 느낌이 드는데."
"그에 비해, 저는 어설프고, 아무것도 못하고. 잘못해서 벌 받고."
"맨날 구박만 받다가 이젠 좀 어엿해진 것 같아서 내심 뿌듯했어?"
"어, 어엿하다기보단……나도 오빠한테 도움이 되긴 하는구나, 정도?"
파트너에 대한 신뢰라는 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게 아니니깐 말이지.
아무리 여자친구라고 해도 그 부분에 대한 관리는 별도로 필요하다.
D/S라는 건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관계여서는 안 되니까.
주인에 대한 신뢰를 요구하려면, 먼저 믿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지.
"아무튼 그래서……책임감? 실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윤이는 그렇게 말하며 급하게 안대를 움켜쥐었다.
"이, 이것도! 종류가 많아서 한참 고민했거든요?"
"안 그래도 뭘 골라야 하는지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어."
한타 중이라 카톡은 씹었지만.
"수면 안대랑, 아이 마스크랑……맞아. 또 재질도 전부 다르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걸 보니 당시의 고생이 뚝뚝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그냥 쇼핑이 길어진 거였다니.
눈만 가릴 수 있다면 종류 같은 건 뭐든 상관없는데 말이야.
정 뭣하면 스카프 같은 것으로도 대체 가능하고.
하지만 노력한 서윤이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것도 멋없는 짓이기에,
나는 한참이나 그녀가 말하는 재질과 착용감에 대한 고찰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거든요. 어떤 게 플레이에 적합한지."
"뭐야. 자각은 없다더니 착실하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쓰게 될 거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서? 고심 끝에 결정한 게 이거야?"
"플레이니까……쉽게 벗겨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사실 어떤 종류든 그렇게 쉽게 벗겨지진 않겠지만……뭐 어때.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한 다음에 결정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잘했어. 잘했어. 사실 난 서윤이만큼 깊이 생각 안 했거든."
"……그럼 오빠는 무슨 생각이었는데요?"
그냥 서윤이 맘에 드는 걸 고르게 해주자는 정도?"
"믿고 있으니까 맡겨보자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글쎄다, 서윤이 말을 듣고 보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심부름 한 번으로 뭔가 바뀔 거란 생각은 안 한다.
당장은 내가 널 믿고 있다는 인상만 심어주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뭐, 앞으로 차차 해나가는 걸로 하고.
"그나저나, 가게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수상한 얼굴이 되지."
"수, 수상한 얼굴 아니었다니까요! 진짜로 무서웠단 말이에요!"
피식 웃은 나는 남아있는 도넛을 가리켰다.
"알았으니까 마저 먹고 당분 보충해."
"……그만 먹을래요."
"입맛이 없어?"
"이따가 오빠랑 같이 먹을 거예요."
"이따가, 라는 건 전부 다 끝난 다음을 말하는 거지?"
서윤이는 "옷." 입술을 깨물더니, 조그맣게 속삭이듯 말했다.
"어, 어차피……그 사전 준비라는 게, 저도 포함이었잖아요."
"서윤이도 포함이란 게 무슨 뜻이야?"
"암컷……으로서의 준비 말이에요."
"글쎄, 서윤이가 생각하기엔 어때? 준비가 된 것 같아?"
당연한 거지만, 주인은 한 번에 하나씩만 고려할 수는 없다.
늘 여러 개의 플랜을 만들고, 달성해야 할 목표를 세우고,
여러 변수와 다음 행동까지 생각해서 판단해야 한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심부름은 준비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싫어도 몸이 먼저 반응한단 말이에요 정말."
사실 블라인드는 넥타이나 스카프, 비슷한 면적의 천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킨 건 역시나 몰입 때문이다.
어차피 플레이를 시작해도 오빠에서 주인님으로, 주인님에서 오빠로.
호칭의 차이일 뿐, 날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좀 더 공손해지긴 하지만, 원래부터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이니까.
그러니까 이번엔 좀 더 확실한 방법으로 플레이의 실감을 끌어내기로 한 거다.
방금 서윤이가 말한 것처럼, 무언가를 '맡겨주었다'라는 생각을 트리거로 삼아서.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것과, 재료 손질부터 시작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
더구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만큼, 분위기에 끌려가는 것보다 밀도가 높겠지.
"……어떤 플레이가 될지, 물건 고르면서 여러 번 상상도 했고."
"우리 서윤이, 말은 안 해도 엄청 기대하고 있었나 보네?"
"머, 머릿속에서 계속 떠나질 않는데 어떡해요."
최소한 서윤이 본인이 무엇을 앞두고 있는지.
거기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그런 종류의 자각은 확실하게 되어있는 것 같았다.
워낙 생각이 많은 성격이라 불안했는데……잘 풀린 것 같아서 안심했어.
"잘 됐네 뭐. 아침부터 그런 상태였으면 더 기다릴 필요 없겠다."
"……아침부터 그랬던 거 아니에요."
"그래그래. 몇 시간 안 됐지. 알아."
"그, 그런 게 아니라!"
서윤이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벌써 사흘……이나 오빠가 안아주질 않았잖아요."
"슬슬 기다리는 것도 한계 같아?"
"……솔직히 힘들어요. 짜증도 나고."
"그래그래. 오죽하면 서윤이가 혀를 차겠냐."
그동안 매일 같이 붙어있으면서 하는 일이라곤,
안아주거나, 쓰다듬거나, 뽀뽀하거나,
간지럽히거나, 무릎에 태우거나.
전부 다 스킨십을 전제로 한 거였으니.
금단증상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시작하기 전에."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었던 나는 손뼉을 두드렸다.
"간단하게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알지?"
"세이프 워드……라던가, 그런 거죠?"
"뭐 그렇지. 브리핑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럼 지금부터 주인님이라고 해야 돼요?"
"딱히 상관은 없는데, 그쪽이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안에선 이미 주인님……인 것 같아서, 그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서윤이가 원하는 대로 하자."
"……네 주인님."
"잠깐 정리 좀 하고 올 테니까 자세 갖추고 있어."
내가 도넛 박스나 가방, 다 마신 커피 등을 치우는 동안,
서윤이는 주섬주섬 무릎을 꿇고 심호흡을 시작했다.
"호-하-호-하."
가슴을 꾹 누르는 걸 보니 여전히 긴장이 앞서는 듯했다.
"맞다. 가방에서 사온 것들 다 꺼내. 오일이랑 방울도."
"……근데 방울은 진짜 왜 사오라고 하신 거예요?"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수갑은 챙겨왔지?"
"네? 네에에. 열쇠도 같이 챙겨왔어요."
"잘했어. 다 꺼내놓고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컵을 씻는 동안 뒤를 힐끔거리자 서윤이는 수갑과 안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꾸만 자세를 고쳐 앉으며 좀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플레이 직전에 느껴지는, 심장을 쥐어짜는 긴장감은 나도 잘 아는 편이다.
주인이라고 해서 긴장하지 않고 섭과 마주 앉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자, 그럼."
물에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은 나는 그녀의 앞에 섰다.
"일단은 뭐, 그래. 오늘 서윤이가 하게 될 플레이는 뭐지?"
"브, 블라인드 플레이……에요."
"똑바로 말해야지. 공손하게."
"블라인드 플레이, 입니다, 주인님."
"정확히 말하면 감각 박탈 플레이야."
영어권에선 흔히들 Sensory Deprivation이라고 하던데,
직역해도 그리 틀린 의미의 해석은 되지 않을 거다.
"굳이 따지면 그중 하나가 블라인드인 거고."
"시야를 박탈……하니까?"
"그런 셈이지."
나는 바닥에 놓여있던 수갑을 집어 들었다.
"근데 오늘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구, 구속도……할 예정, 입니다."
"누가 부탁했지?"
"제가……주인님께 부탁, 드렸습니다."
조금 익숙해지긴 한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어깨에 힘을 좀 뺐으면 좋겠지만……어쩔 수 없지.
옆에서 재촉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럼 어떻게 말해야겠어?"
"주인님께 누,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일 예정……입니다."
서윤이는 언제나처럼 기대와 불안, 흥분과 초조가 섞인 시선으로 날 올려다 보았다.
잠시 그녀의 시선을 가지고 놀던 나는 얼굴에 희미한 조소를 띄웠다.
"근데 서윤아, 언제부터 암캐가 주인 앞에서 옷을 입도록 되어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