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4)제도 공성전 (4)
카를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내 민첩으로 따라잡을 수 있지만,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다.
주변의 광경이 마치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개중에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도 일부 존재했다.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들까지 챙길 수는 없었다.
그저 달렸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카를이 점차 가까워졌다.
동시에, 거성이 제 몸집을 불리며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앞으로 대충 열 걸음이면 카를의 뒤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카를의 팔이 기이하게 뒤틀리더니,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날렸다.
그것은 검은 공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게 날아오는 그것을 성검으로 베기 위해 휘둘렀지만, 아주 조금 빨랐다.
젠장, 항상 단검만 쓰다 보니 거리감각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검은 공이 슬로우모션처럼 가까워지고.
이내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대신 작은 나비가 나타나 제 몸으로 받아내고 사라졌다.
이어, 다시금 수십 개의 검은 공이 날아왔다.
한번은 실수라고 해도, 두 번은 없다.
날아오는 검은 공을 족족 성검으로 쳐냈는데, 그때마다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이대로 막고 있어서는 도저히 카를을 따라잡으리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땅을 박차 주변 건물 위로 올라갔다.
카를이 쏴대는 검은 마법에 건물에 구멍이 뚫렸다.
건물 주인에게 작게 사과하고, 건물의 옥상을 밟으며 달렸다.
아주 조금.
카를과의 거리는 아주 조금 남았다.
하지만 그 조금이 닿지 않는다.
젠장, 어떻게 해야.
그때, 카를을 향해 하늘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다.
***
동부 대공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창 밖으로 거대한 분홍색 달팽이가 제도의 성벽을 부수고 있는데, 침착한 사람이 더 이상하리라.
“고작 이 정도 속도밖에 안 나오나! 지금 제도가 박살 나고 있잖나!”
동부 대공은 함장을 향해 재촉했다.
“더 밟으면 불납니다, 대공님!”
“불나라고 해! 내 마공선이잖아!”
“맙소사. 대공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함장은 후- 짧게 숨을 내쉬고, 조종간을 앞으로 밀었다.
푸쉭!
엔진이 짧은 신음을 내더니 덜컹거리며 불길하게 흔들렸다.
엔진으로부터 시작된 진동은 이내 마공선 전체로 퍼져 나갔다.
쿵!
엔진에서 일차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케찰코아틀 또한 폭발 직전까지 몰렸다.
“읍…우욱…”
“조금만 참으세요. 아주 조금 남았으니까…”
동부 대공의 말마따나 제도의 거성까지 아주 조금 남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분홍빛 달팽이가 거성에 더 빨리 도착할지도 모른다.
함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애끊는 심정으로 말했다.
“출력을 더욱 올리겠습니다.”
이것이 함장과 함께해온 마공선 루크시온의 마지막 모습이 되리라.
하지만 그 한목숨 모두 불태워 제도를 지킨다면 루크시온도 그것을 원하리라.
끼리릭.
함장은 조종간 아래 숨겨진 버튼을 눌렀다.
드워프 기술자들이 함장과 다른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넣어야 한다고 소리쳤던 그 버튼을.
부오오오오!
루크시온의 힘찬 고성과 함께 시야가 크게 흔들리며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엔진에 스파크가 튀더니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함장은 계기판에서 무언가를 조작한 뒤, 통신관을 향해 소리쳤다.
“긴급 탈출! 모두 탈출하라!”
마공선을 운영하는 인원은 그 크기에 비해 매우 적다.
그저 짧은 명령 하나면 모두 탈출할 수 있었다.
함장은 마공선의 항로를 분홍빛 달팽이를 향하도록 설정하고 문을 열었다.
“대공님. 준비를.”
“알았다.”
높이가 꽤 높았지만, 이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은 동부 대공에게는 일상과 다름없었다.
“코아틀 경. 부디 꼭 잡으시길.”
“알았소…”
동부 대공은 아직 안색이 안 좋은 케찰코아틀을 품속에 안고, 과감하게 뛰어내렸다.
등 뒤로 이글거리는 마공선이 달팽이를 향해 짓쳐 들고 땅이 가까워지는 와중 동부 대공이 다리에서 불을 뿜어 속도를 줄였다.
제국의 동부는 불과 흙의 땅.
그는 어린 시절부터 드워프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마법을 몸에 익혔다.
황제폐하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황궁이나 거성 부근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황궁을 향해 떨어지는 와중, 그것이 보였다.
사자의 갈기 같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달리는 한 명의 사내.
그리고 그의 뒤를 쫓는 자색 머리의 메이드.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황후전하가 쫓는 놈이 적이라고 판단했다.
“코아틀 경, 더 빠르게 가겠습니다!”
“뭣, 우욱…”
동부 대공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중력에 몸을 맡겼다.
강한 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렸지만,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불을 뿜어 착지할 장소를 조금씩 조정한 동부 대공은 이내 붉은 머리의 사내 앞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
카를은 갑자기 제 앞에 내려앉은 인물을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끝이 코앞이다.
아주 조금이면 황궁 안으로, 이어 거성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목에 박힌 단검을 뽑고 회복하기 위한 시간조차 아까웠다.
품속에 지닌 사기는 충분하다.
그저, 제국의 어둠에 닿기만 한다면.
쿠웅!
카를의 앞에서 땅이 융기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카를은 팔을 교차하여 달리는 속도 그대로 그것을 뚫고 지나갔다.
그때, 카를 주위가 술렁거렸다.
그가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가 주변에서 압력을 불어넣었다.
마치 거대한 거인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 카를의 발밑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령들이여! 저자를 막으시오!”
옥빛 머리색의 엘프가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고룡의 후손들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뒤에서는 에밀리아가.
앞에서는 정체 모를 남자와 엘프가.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에밀리아의 성검이 카를의 몸을 가르리라.
“좋아! 붙잡고 있어!”
뒤에서 에밀리아의 고성이 들려왔다.
카를은 결국 모아왔던 사기를 뿜어냈다.
선천적으로 사기에 민감한 엘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를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사기는 엘프와 동부 대공을 날려버렸다.
지금 사용한 사기는 전체의 일부분. 하지만 그것조차 아껴야 했다.
황궁이 코앞이다.
아주 조금이면, 끝이 보였다.
순간, 후방에서 꽝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카를의 속에서, 무언가가 뭉텅이로 깎여나갔다.
피나가 죽었다.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피나도 그것을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저 달렸다.
우리가 시작했던 그곳으로.
넓은 관문을 지나.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곳으로.
황궁으로 진입하자 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아니, 심장이 뛰는 게 아니었다.
뜨거웠다.
뜨겁다는 감각을 느낀 지 어언 천 년.
이게 정말 뜨겁다는 감각인지, 카를은 긴가민가했다.
“크...으...”
그 감각을 제대로 알려주겠다는 양, 제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성검이 와락 비틀어졌다.
이것이 고통인지, 따스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 전체가 나른해졌다.
문득 고개를 들자, 공중정원이 보였다.
공중정원에는 아직 그때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리아를 위해 만들었던 마법의 잔해가.
카를이 그 잔해를 쫓아 고개를 들자, 공중정원이 보였다.
그가 손을 뻗자, 옛 주인을 아직 잊지 않은 그것이 응했다.
아래로. 주인을 향해서.
***
동부 대공과 케찰코아틀의 시기적절한 도움으로 마침내 카를에게 가까워졌다.
달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달리는 속도 그대로 투창을 하는 듯 성검의 중간을 잡고 카를을 향해 [투척]했다.
우려와는 달리 성검은 카를의 등을 찢고 박혔고, 이내 따라잡은 내가 카를의 등에 박힌 성검을 돌려 다시금 깊게 찔러넣었다.
카를의 등에 박힌 성검은 강한 빛을 냈고, 카를의 몸이 끝자락부터 녹아가기 시작했다.
“리...아...”
카를은 공중정원을 향해 녹아내리는 손끝을 뻗었다.
“날...”
그러자, 그의 손길을 따라 공중정원이 움직였다.
하늘에서 땅으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잊지...”
카를의 말은 미처 끝맺지 못했다.
그의 손끝부터 시작된 붕괴가 그의 성대를 앗아갔다.
이어 턱을. 가슴을. 다리를.
지지대를 잃은 몸이 힘을 잃고 풀썩 무릎 꿇었다.
카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겠지.
썩 허무한 최후다.
쿠릉!
하늘에서 흙더미가 떨어져, 황궁을 더럽혔다.
멍하니 고개를 올리자, 카를과 함께 공중정원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끝자락부터 무너지는 흙더미들,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그런 와중에 공중정원에 피어났던 꽃들은 자신의 꽃잎을 하늘에 날리며 제 존재를 과시했다.
루나미아.
루나미아가 저곳에 있다.
카를 이놈은 마지막까지 민폐를 끼치고 가는구나.
하지만 상념할 시간도 없다.
성벽도 타고 내려왔는데, 올라가는 것 또한 못할 것 없었다.
떨어지는 공중정원의 잔해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고, 달렸다.
흙더미를 밟고 뛰어오르고, 옆에 있는 대리석 조각을 밟고 다시 뛰어오른다.
그렇게 조금씩 올라가다 보니, 저 멀리 루나미아가 보였다.
루나미아는 주변의 장교들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 있는 제국 근위대가 장교들을 데리고 페가수스에 태운 뒤 훌쩍 뛰어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나미아의 차례가 다가왔다.
부하를 전부 보내고 자신은 마지막에 가려고 하는 모습이 참, 루나미아다웠다.
무너지는 공중정원의 끝 부분이 점차 루나미아에게 가까워졌다.
깜짝 놀란 페가수스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루나미아가 한숨을 쉬고 제국 근위대의 등에 업히려는 순간.
더욱 속도를 높인 내가 잔해를 밟고 마침내 루나미아의 곁에 도달했다.
“...에밀리아?”
루나미아는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루나미아는 제가 데려갈게요.”
“...예?”
사실, 이렇게까지 무리하며 루나미아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됐다.
제국 근위대는 다들 믿음직하고, 사람 하나 등에 업고 공중정원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했다.
그래도, 루나미아가 다른 남자의 등에 업히는 건...조금 그렇다.
얼떨떨한 얼굴을 지어낸 제국 근위대를 뒤로하고, 루나미아를 공주님 안기로 안은 다음 무너지는 공중정원을 뒤로하고 냅다 뛰어내렸다.
떨어지는 잔해를 밟고, 그다음 잔해로.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마침내 땅에 발을 붙였다.
후.
그제야 참아냈던 숨을 내뱉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루나미아. 내려가도 돼.”
하지만 루나미아는 내 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나미아는 얼마나 놀랐는지, 소리도 지르지 않고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내가 루나미아를 반쯤 강제적으로 땅에 내려놓자 삐걱거리며 나를 가리켰다.
“너...너는...너는...”
“왜?”
“...후우...이번에는 피가 안 묻었구나.”
루나미아의 말에 메이드복을 내려다봤다.
메이드복은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을 뿐, 피는 묻어있지 않았다.
“그러게.”
확실히 루나미아의 곁에서 떨어지고 무슨 일이 있었을 때마다 피범벅이 된 기억이 있다.
이렇게 몸 성하게 돌아온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끝난 건가?”
루나미아가 물었다.
“아마도.”
저 멀리, 온갖 마법과 동부 대공의 마공선에 얻어맞고도 끄떡없던 괴물이 카를의 죽음과 함께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더듬이 같은 촉수를 하늘을 향해 세운 괴물은 신기하게도 푸른 연기와 함께 공중에 녹아들었다.
“하아...”
루나미아의 시선은 그쪽이 아니라, 괴물이 작살낸 내성벽과 제도로 향했다.
“한동안 쉴 날이 없겠구나.”
“그러게.”
“...고맙다. 구해줘서.”
“뭘.”
루나미아는 부끄러운지 작게 웃고 몸을 돌렸다.
“모두와 합류하지.”
***
공중정원은 끝끝내 주인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그의 코앞에서 주인처럼 덧없이 녹아버렸을 뿐.
카를은 거의 녹아버려 뼈마디가 보이기 시작한 손을 내려다봤다.
아니. 애초에 목뼈가 녹아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사슬에 묶여 무릎 꿇은 죄인처럼, 팔과 몸을 이완시킨 채 고정되어 버렸다.
그래도 사기는 아직 남아있었다.
리아를 살려내기 위해 고이 모아두었던 사기가.
그리고 그 사기 덕분에 성검에 몸이 꿰뚤렸음에도 아직 살아있으리라.
복수.
복수라는 단어가, 카를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 사기를 모두 모아 폭발시키면.
“카를.”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무어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에밀리아의 단검이 찢어버린 성대가 그것을 방해했다.
“그때 이후로 이게 두 번째 패배인가?”
리아는 그의 앞으로 와 쪼그려 앉았다.
“미련하기는.”
아리엘의 모습을 한 리아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죽었으면 잊었어야지.”
아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카를은 유일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굴려 리아를 마주 봤다.
순간 리아의 눈동자가 자색으로 반짝거렸다.
“영혼이 아주 난장판이네.”
그녀의 특성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씁쓸하게 웃었다.
“돌아가자.”
쪼그린 다리를 쭉 피고 일어난 리아는 카를의 몸체에 박힌 성검을 뽑았다.
그리고, 다시금 찔러넣었다.
사기가 가득 모여있는 그의 심장을 향해.
카를의 눈이 크게 띄었다.
그릇을 잃은 사기가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려 했다.
하지만 리아가 그 모든 사기를 빨아들였다.
이내 카를이 모아둔 모든 사기가 사라지고,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던 카를 또한 한낱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리아는 흐릿하게 변한 시야에 눈을 감고 무릎을 꿇었다.
죽음의 기운은 그 방향을 조금만 바꿔주면, 생명의 기운이 되어준다.
카를이 꿈꾸던 초월의식도, 결국 그 원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든 사기를 갈무리해 작은 염원을 빌었다.
자신이 잠시 머물었던, 그렇기에 덧씌워졌던 몸의 주인이 다시 돌아오기를.
뒤늦게 도착한 원탁의 기사들은 검은 잿더미 앞에 무릎 꿇은 용사를 발견했다.
이내 용사가 눈을 뜨자, 그녀의 눈동자는 푸르게 변해있었다.
그녀를 처음부터 섬겨왔던 롤랑은 무언가 직감하고, 용사.
아니, 아리엘 님을 향해 손을 뻗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