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2. 레이아의 변화 (8) (21/162)



〈 21화 〉#2. 레이아의 변화 (8)

--레이아

'네가 조금 더 즐겼으면 해.'

 더 적극적으로.



그것이 '마스터'의 요구였다.

실제로는 십 분 이상의 긴 대화를 나눴지만, 요약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


걱정을 끼친 건가.



사실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 자신이.


'너 정말 인형 같구나.'

김재현, 그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래, 그렇겠지. 예쁘고 섬세하지만, 온기도 없고 표정도 없고 인간성도 없다. 예쁘다고 좋아해서 가지게 되지만,질리거나 해지면 미련없이 버리는 그런 존재.

두근.


심장이 내게 호소한다. 뜨거운 것이 가슴 속을 맴돈다.



이대로 괜찮겠니?

….



'…아니.'

선택의 순간이 왔다. 꽁꽁 싸맨 채로 찰나의 온기에 안주하여 버려질 것인가. 아니면 낯설고 생소하지만, 조금 더 '나'를 드러낼 것인가.


어렵지 않은 선택이다. 행동 역시 어렵지 않다. 솔직해지면 될 것이다. 그러면 된다.

….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편애.


[모순]이라는 끔찍한 저주를 받은 내가 크게 내색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마스터에게 그 이상의 보상을 받고 있으니까. 육체적 쾌감을 포기한 대신 정신적 쾌감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크게 억울하지 않았다. 비록 몸이 개발되어 예민하고 음탕해졌다 할지라도, 그 이상으로 마스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가장 큰 쾌락이다.

하지만, 이젠 껍질을 깨고 나가야 할 때.

'요즘 너를 보면 걱정부터 들어.'

부드러운 그의 말 속엔 싸늘한 경고가 들어있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 그가 원하고 있다. 나의 변화를.

'이대로 괜찮겠니?'

아니요, 마스터. 아니요….

….


그래. 너무 질질 끌었다. 그저 마스터가 편애해준다는 이유만으로 애처럼 굴었다. 그의 곁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고, 나의 안타까운 처지를 이용해 이기적으로 욕심만 챙겼다. 마스터가 내게서, 그의 연인들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음에도 그것을 외면했다.



생각해보니까, 정말 나빴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워서 마스터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마스터를 더 많이 사랑한다고 확신했는데, 정작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상에, 다섯명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있는 마스터에게 밀린 건가?

….

미안해요, 마스터. 당신의 사랑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맞아. 그런 거야. 당신이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워서. 그리고 그런 당신을 내가 너무나도 사랑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렇게 마구 편애를 쏟으면, 누구라도 헤롱헤롱거릴 거야.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행동일 것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오늘의 깨달음을 기점으로, 나 역시… 마스터에게 커다란 '기쁨'을 선사해줄 것이다.



당신도 그걸 원하는 거지?

그렇지?

….

오랜만에 마스터의 침대에서 단 둘이 잤다. 일어나보니 나도 모르게 내 부끄러운 곳을 마스터에게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곤란한걸. 욕구가 쌓이고 쌓여서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마스터는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시기를생각해 봤을 때, '그'인 것 같았다.


김재현, 마스터가 유일하게 인정한 친구.

솔직히 마스터와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급'이라는 말이 있다. 마스터는 맨몸으로 우리 세계에 떨어져서 오직 자신만의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뤄낸 사람이다. 파티의 다른 멤버들도 물론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마스터는 클래스가 달랐다. 아마 모두 인정할것이다. 마왕 토벌 여정에 있어서, 나머지 다섯보다 용사 하나가 압도적이었다고. 그런 마스터와, 그저 좀 유복한 집에 태어났을 뿐인 김재현….

하긴, 마스터의 예전 삶은 평범했다고 하니까.

처음엔 김재현에게 조금 실망했지만, 지금은 별 생각 없다. 중요한 것은 마스터가 그를 친구로 인정했다는 것과, 그가 내 성욕을 풀어준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몸이 달아오른게 꼭 곤란한 일만은 아닌  같다.


….

그래, 마스터. 어제 당신이 말했지? 적극적으로 즐기라고….



좋아.


….

김재현.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에선 최고의 남자다. 마스터와 함께할 수 없는 이상 다른 남자가 필요한데, 마스터가 인정한 유일한 친구라면 전세계에서 가장 좋은 조건의 남자니까.게다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나 역시 그가 편하긴 하다. 즉, 마음을 열기 가장 좋은 상대다.



….



쏴아아….


끼익.


문이 열린다. 김재현, 그가 들어온다. 강렬한 시선이 뒷통수로 느껴진다.

마침 지나가 나를 한껏 자극해놓은 상태. 내 소중한 곳에서 느껴지는 끈적한 물기가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어서오세요. 행운아 김재현.'

오늘,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줄게.





한 마디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까지의 레이아는 섹스한후에도 변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히 있었기에, 그녀와 몸을 섞는다는 영광과 아랫도리의 지극한 쾌감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실 그것만해도 다른걸 욕심낼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행복이었다.


가끔은 레이아가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으니까. 사실은 엘프라던가, 기억을 잃은 여신이라던가, 인류 최강의 마법사라던가, 바보같은 망상을 할 정도로 레벨이 다른 여자.그런 여자와 아무 대가 없이 몸을 섞을 수 있다니. '녀석'을 만나고, 모종의 거래 이후 레이아와 관계를 갖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의 만족도는 수직상승하고 있었다.

"하, 하하하…."

쪼오옥.

재현은 꿈만 같은 상황에 실성한듯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재현과 같은 벤치에 앉은 레이아는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생과일주스를 빨대로 빨아먹고 있었다. 둘은 다정한 커플처럼 바싹 붙어 앉아 손을 맞잡은 상태였다.


외출, 도보, 카페, 공원. 데이트 신청은 레이아가 했고, 걸어가자는 제안 역시 레이아가 했다. 재현은 정신 없이 걷는 와중에 눈에 띈 카페를 보고 뭐라도 하자는 마음에 일단 그곳으로 레이아를 이끌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신을 가다듬다가도, 레이아가 말을 걸면 쑥맥처럼 굴어서 둘의 대화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런 이상한 데이트였으나, 서로 별 불만이 없어보이는게 재밌는 점이었다.

얼추 시간을 보내던 재현은 이대로 앉아있는게 제일 안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고선 일단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데이트 자체가 워낙 오랜만이기도 했고, 너무 기습적인 데이트라 코스를 짜온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레이아의 속살은 잘 알고 있으나 일반적인 취향 같은건 몰랐기에, 재현은 일단 먼저 말을 꺼낸 레이아의 의사를 물었다.



공원, 산책.


물어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영화관 등을 생각하고 있던 재현은 의외로 소박하고 주관이 또렷한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원 산책이야 몸만 가면 되니 남자 입장에선 고마운 대답이지만, 재현은 자기가 너무 편하다보니 오히려 레이아를 푸대접하는 것 같았고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건 그녀의 의사였기에, 그녀의 말대로 공원으로 향했다. 살짝 기분이 쳐졌으나, 데이트에서 축 늘어지는것만큼  실례가 없다는 생각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일부러 웃었다. 우습게도, 웃다보니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



마침 날씨도 좋았다. 따뜻한 햇볕이 한 쌍의 커플을 따스하게 내리쬔다. 재현은 이 근처 지리를 잘 몰랐기에, 레이아에게 이끌려 공원으로 왔다.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볼 수 있는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산책로, 적당한 분수대, 적당한 벤치, 적당한 사람들. 그러나 레이아와 함께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특별한 데이트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몸에 은근히 붙는 베이지색 니트 상의와 무릎을 드러내는 귀여운 남색 주름 치마를 입은레이아였다.



어디서 이렇게 기특한 옷을 차려입었을까. 사람들의, 특히 남자들의 시선이 제법 느껴졌다. 이런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사이.게다가 속살까지 전부 아는 사이. 가만히 있어도 자존감이 마구 올라가는 것 같았다.

꾸욱.

"응?"

기분이 좋아 잠시 실실 웃고 있었는데, 맞잡은 손에서 약간의 힘이 느껴졌다. 마치 호출 버튼을 누르듯, 레이아가 손을  잡은 것이다.


"잠깐만."

"찍게?"

"응."

레이아가 핸드폰 셀카 모드로 또다시 커플 사진을 찍었다. 아까 침대에서 한 번, 길을 걸으면서예쁘게 물든 단풍나무에서 한 번, 카페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별말은 없었지만, 재현은 본능적으로  셀카가 레이아에게 필요한 것임을 짐작했다. 보관용이라기보단,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목적….



하지만 자신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덕에 레이아와의 관계가 단순한 섹스 파트너에서 연인 비스무리한 무언가로 더 좋게 발전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는 그쪽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중간에 껴서 행복하게 이득을 챙기면 그만이다. 레이아도, 그리고 '녀석'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찰칵.

재현은 피식하고 조용히 웃었다. 레이아는, 그렇게 예쁜 여자애인데도 셀카 기술이 서툴러 보였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완벽한 탓에 본인은 크게 불만이 없겠지만,  그래도 여신과 같이 찍힌 일반인 신세인 재현은 레이아와 비교되는 것에 더해서 열악한 기술로 인해 제법 못생기게 나오는 사진 속의 자신을 보고좌절해야만 했다. 이렇게 보면 남자가 무슨 재벌 2세, 3세쯤 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저장한 레이아가 네톡 앱을 켰다. 갑자기 네톡의 사진 전송기능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보내려는 건가? 하지만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에 그는 핸드폰 대신 레이아의 얼굴을 보았다.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가 묘한 이채를 띠고 있다. 이제까지 본 적 없었던 종류의 어떤 감정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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