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 레이아의 변화 (10)
'악마의 씨앗 같은 계집애!'
'큰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 어서 죽여야 한다!'
어린 흑마법사에게 돌을 던져라. 진실은 커녕,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가차 없었다.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 돌을 던지며 매도했다. 흑마법에 제법 자질을 보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몬스터의 습격으로 마을에 비상이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눈 먼 돌에 의해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마계와의 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인간계에선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가 흔했다. 그러나 그들을 돌봐줄 이는 드물었다. 일단, 적어도 절반의 아이들은 굶어죽는다. 살아남은 나머지 절반 정도의 아이들은 대부분이 독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구걸을 하거나, 소매치기를 하거나, 쓰레기를 뒤지기도 하고, 심지어 가축의 사료조차 훔쳐먹을 정도였다. 뒷골목으로 기어들어가 깡패가 되거나, 농장에서 소만도 못한 노예가 되거나, 몸을 파는 싸구려 창녀가 되는 것조차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흑흑, 억울해!'
소녀는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돌에 맞아죽기 전에 빈손으로 도망쳤으나, 간신히 거적때기 같은 옷조각만 걸친 소녀가 홀로 살아남기엔 세상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살아있는 고기 냄새를 맡고 몰려든 고블린들에게 목을 베이기 직전, 소녀는 눈을 꼭 감았다.
펑! 콰광! 콰아앙!
끼에엑! 키엑! 끄르륵….
귀에 이명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폭발음. 깜짝 놀라 꼭 감았던 눈을 떴다. 십수 마리가 넘는 고블린들이 한 순간에 타버린 시체로, 뼈다귀로 전락했다. 남은 것은 허름한 차림의 소녀와, 그 앞에 선 하얀 수염이 풍성한 노인이었다.
'아아….'
구원자?
소녀는 입을 헤벌린 채로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
소녀에게 해피 엔딩은 찾아오지 않았다. 노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악명 높은 흑마법사였고, 레이아의 천부적인 재능을 단박에 눈치채고는 자신의 소굴로 데리고 갔다.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흑마법사의 제자? 그런 달콤한 상황 따윈 없었다. 노인의 눈에 레이아는 그저 오래토록 착취하고 빨아먹을 꿀단지에 불과했다.
제자? 심부름꾼? 노예? 아니,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 손목을 붙잡히고 날카로운 날에 손가락을 베여 놋쇠 그릇에 피를 흘리는 것은 차라리 나았다. 참으면 끝나니까. 그러나 노인은 가혹했다. 생으로 손톱을 뽑히기도 하고,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시약을 억지로 마시기도 하고, 처음 보는 끔찍한 도구로 살이 패여 문신이 새겨지기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녀의 생명력은 아주 끈질겼다. 죽도록 괴로웠지만, 어찌어찌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나 운용조차 배우지 않은 몸에 끔찍한 흑마력을 대량으로 주입당하는 것은 소녀의 몸이 버텨낼 수 없었다.펄펄 끓는 냄비에 던져진 것처럼,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멈추질 않았다. 다행히도, 발작 끝에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끝은 찾아오지 않았다. 노인은 뭔가를 먹여 의식을 강제로 끄집어내고, 마법과 약물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으며 절대 안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만 못했다. 정신은 피폐해져갔고, 몸은 폐인이 되어갔다.
….
….
….
쾅! 콰과광!
푸욱!
크아악!
….
"어이, 괜찮나?"
낯선 사내의 목소리. 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소녀의 앞엔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 남자가 불행하기만 했던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으리라고는, 그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당시의 소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소녀의 나이 열 다섯에 일어난 일이었다.
…
쉬익, 쉬익, 드르렁….
레이아는 긴 밤 내내 몸을 불사르고 지쳐 잠든 재현을 보았다. 어느새 새벽이 지나고, 새카만 어둠을 푸른 빛이 몰아내고 있었다.
"으읏…."
엉덩이 부근이 얼얼하다.
하필 러브젤이 눈에 띄는 곳에 있어서….
"음…."
중지를 갖다 대니, 아직도 구멍이 벌어져 있었다. 고통스럽진 않지만 여전히 얼얼하다. 후장을 뚫린건 오랜만인데, 생각보다 강한 쾌감을 느끼곤 가버렸다. 후장만을 쑤셔졌는데 가버리다니, 얼마나 변태처럼 보였으려나. 김재현, 이 남자도 제법 얼굴이 두꺼웠다. 러브젤을 발견하고는, 딱 봐도 손길을 안 탄 깨끗한 핑크빛의 국화꽃을 탐냈다. 후장을 원한다니. 일반적인 여자였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싫진 않았다.
'정말 보기 좋아, 레이아.'
'말도 잘 하고, 목소리도 좋고, 눈웃음도 예뻐.'
'앞으로도 이런 관계가 되길 원해.'
피식.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어쨌든 원하던 결과가 나온 셈이긴 하다.
'이걸 원했던 거죠, 마스터?'
항상 일자로 꼭 다물려 있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
….
소녀는 흑마법사에게 너무 가혹하게 시달린 탓에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심하게 앓아야만 했다. 다행히도 소녀를 치료할 가치는 충분했고, 치료자들은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치료를 받은 소녀는 상당한 기대를 받았다.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적인 흑마법의 재능. 게다가 노인이 평생을 연구하여 완성시킨 순수하고 강력한 흑마력을 주입받았다. 재능과 능력은 흘러넘쳤다. 다만, 가혹한 삶을 산 데다가 흑마법사에게 심하게 시달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양날의 검이라는게 문제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소녀는 용사를 경계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흑마법사 노인이 고블린 무리를 단번에 물리쳤을 때, 소녀는 마치 하늘에서 빛이 내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구원받고, 더 나은 삶이 펼쳐지리라는 희망. 하지만 눈앞에 닥친 것은 죽음만도 못한 지옥의 구렁텅이였다.
이 사람은 내게서 무엇을 원할까. 몸과 마음이 폐인이 된 와중에도, 소녀는 자신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인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트라우마를 이끌어냈다. 만약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면… 아마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
과정을 전부 얘기한다면 열흘을 쉬지 않고 떠들어야 할 정도로 긴 사연이니, 결과만 말하자면 소녀는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마음을 엶과 동시에 깊고 깊은 사랑에 빠졌다. 너무 매력적인 사람이다.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용사는 거칠면서도 주저함이 없고, 좋은 의미로 낯짝이 두꺼웠다. 그러면서도 딱히 성격이 자상하진 않았고, 꾸짖을 때는 너무 무섭고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한 번 사랑하게 되니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기 여자는 아주 잘 챙겨줘서, 사랑에 대한 후회는 아직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게 있다면, 여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소녀의 앞으로 이미 네 명의 여자가 용사의 처를 자칭하며 딱 달라붙어 있었다. 처음 그 구도를 보았을 때, 용사의 옆에 자신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아 몰래 눈물을 훔쳤다. 바보 같이. 용사는, 감당하지 못할 거면 애초에 거두질 않는 남자였다.
문득 첫날밤이 생각났다.
'아앗! 흑흑….'
처음을 내줬을 때, 눈물을 흘렸다. 파과의 아픔? 그 노인에게 받았던 그 끔찍한 고통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드디어 사랑하는 남자의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감사함과, 그토록 까칠하고 날카롭게 굴었는데도 감싸안아준 용사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저 행복했다. 나중에 용사가 얘기하기를, 처녀를 잃은 순간 그렇게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어서 당황했단다. 평소엔 잘 웃지도 않는 애가 그러니까 뭐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고.
"흣."
입장 바꿔 생각하니, 나도 참 희한한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
아무튼, 용사와의 러브 스토리는 아무리 늘어놓아도 끝이 없으니 잠시 접어두고….
아니,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하면, 용사의 여자들 중 용사에게 처녀를 바친 것은 레이아가 유일했다. 레이아는 이에 아주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합류하여 용사와의 추억도 가장 적었고, 후유증을 치료하는 동안 민폐가 되어 마음의 짐을 제법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처녀를 바쳤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절대 떠벌리고 다니진 않았다.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다른 네 여자들 중자신의 의지로 처녀를 잃은건 한 명 뿐이었다. 두 명은 강제로 범해져 순결을 잃었고, 남은 한 명은… 바보 같이 격렬하게 삽입 자위를 하다가 깨트렸단다. …어떤 바보 성기사가 떠오른다.
그래도 다들 엄청 착한게, 레이아가 처녀를 바쳤다는 얘기를 듣고 용사에게 순결을 바친 것을 축하해줬다. 첫경험을치른 아이를 다독인 것도 있겠지만, 다들 자의든 타의든 용사에게 처녀를 주지 못해 아쉬웠던 모양이다. 용사는 자기가 그런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꼬라지가말이 아니어서 여자가 순결을 지키는게 거의 불가능하다며 오히려 레이아가 특이한 경우, 다행인 경우라고 말했다. 내심 아쉬워하는 여자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레이아를 특별 취급 해주는 현명한 대처였다.
….
'어쩌다 여기까지 회상한 거야….'
사랑 얘기가 나오니, 레이아도 별 수 없었다.
어쨌든.
소녀가 용사를 만나고, 동료들을 만나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비록 힘든 세상이었지만 살아갈 의지가 충만해졌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흑마법을 말 그대로 죽을 각오로 수련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레이아는 최고의 흑마법사가 됐다. 그 기간은 10년은 커녕 5년도 되지 않았다. 자신의 드높은 경지를 자각한 레이아는 그제서야 비로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노력? 그걸 안 하는 사람이 있나? 중요한건 재능.'
그리고 세상을, 마족을 전율에 떨게 할 용사 파티의 흑마법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