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3. 사랑의 증표 (4)
모두가 각자의 짐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아리가 취미를 겸해서 정원 관리를 맡고 있어서 집과 출입문 사이의 작은 정원은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그리고 그 정원의 중앙에 떠오른 마법진이 보라색 빛을 뿜고 있었다. 마법이라는 이질적인 광경이 눈에 띌 법도 하지만, 이 집은 인적이 드문 외곽에 있는 집인 데다가 감지를 방해하는 마법이 걸려있어 사람은 물론 인공위성이나 드론의 카메라 등 촬영도구에도 잡히지 않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높은 밀도의 마나가 모두의 가슴을 자극한다.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고, 다들 잘 적응하여 한 명의 현대인으로서 살고 있지만….
"후후, 이거 참 두근거리네요."
아리스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마족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검객의 그것과 같았다. 아리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눈에 날카로운 이채를 띠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마나는 곧 전투와 전투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이며, 보기만 해도 가슴이 끓어 오르는 일종의 동력원이기도 했다. 마나를 보고 투지가 샘솟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들이 여전히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레이아, 텔레포트 준비해. 다들 빨리 가자."
용사의 재촉에 여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레이아가 마지막으로 올라서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혼자 반대로 서서 다른 이들과 마주본다. 곧 그녀의 양손에 보랏빛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다들 눈 감아."
모두가 눈을 감는다. 다들 레이아의 지시를 이행한다. 마법진 위에 선 마법사는 세상에서 가장 믿어야하는 절대적 존재이며,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따라야만 한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 치고는 아주 쉬운 조건이었다.
"카운트다운. 나랑 같이 초를 세는 거야. 속으로 세고 말은 하지 마."
끄덕끄덕.
"셋."
셋.
"둘."
둘.
"하나."
하나.
………….
쐐애애액!
…
매스 텔레포트는 말 그대로 단체 순간이동이며, 시전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전자의 경우 고위 마법인 데다가 차원 이동 계열의 마법을 사용해서 마나 소모 이외에도 몇몇 귀찮은 부작용을 감내해야 한다. 대표적인 후폭풍으로는 멀미가 있었다. 차, 기차, 배, 비행기 무엇을 타든 멀미를 안하는 레이아였지만, 텔레포트의 멀미는 종류가 다른 것이어서 정상적인 육체를 가졌다면 안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레이아, 괜찮아?"
"응…."
다행히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어지러워하고 중심을 못 잡자 용사가 업어줬다. 등에 업힌 레이아는 몸에 힘이 쭉 빠진 채로 얌전히 탄탄한 등판에 몸을 기댔다. 사실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었고, 몇 분만 지나면 괜찮아졌기에 레이아 본인도 모처럼의 여행에서 괜히 신경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다들 조금씩은 걱정하는 안색을 비쳤으나, 레이아의 부탁도 있고 눈앞에 목적지가 들어오자 조금씩 들뜨는 기색을 비쳤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이 있는 곳에 텔레포트를 탈 순 없으므로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에 순간이동했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오 분 정도 걸어가니 서서히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힘없이 업혀 있던 레이아도 금새 컨디션을 회복하고 내려와 옆에서 같이 걷기 시작했다. 공기부터가 달랐다. 용사의 집이 아무리 한적한 외곽이라지만 결국은 도시 안이었고, 이곳은 온천 중심으로 어느 정도 개발이 되었다고 해도 결국 산 좋고 물 좋은 휴양지였다.
"스읍, 후아…."
여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과장된 리액션을 보였다. 사실용사는 이리저리 여행을 다니는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고, 따지고 보면 집에서 뒹굴거리는걸 좋아하는 집돌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여자들과 함께하다보니 조금씩 성향이 바뀌었다. 아주 보람차다고나 할까. 이번엔 갑작스레 결정한 여행이라 마법을 사용했지만, 원래는 미리미리 정해서 비행기도 타고 여행지까지 가는 과정 자체도 즐긴다. 물론 여자들이 없으면 귀신같이 집돌이가 되긴 하지만.
"가자."
일본 온천 여관, '료칸'의 입구에 도달했다. 용사가 료칸 특유의 미닫이식 나무 대문을 열였다.
…
"후우…."
"하아…."
여섯 명이 한 데 모여 온천욕을 즐긴다. 다들 저절로 편안한 미소를 띄우는 것이 기분 좋아 보였다. 예약도 없이 와서 살짝 걱정되긴 했으나, 오히려 객실이 넉넉해서 골라서 들어와야 했다.
용사가 고른 목적지는 오로지 프라이빗, 즉 전세탕만으로 이루어진 고급형 료칸이었다. 소개글을 보니 객실도 오로지 15곳만 운영한다고 한다. 모든 객실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온천이 있다고 하는데, 일행이 몸을 담그고 있는 온천은 객실의 거실 안쪽에 위치한 출입문을 열고 나오면 보이는, 정사각형으로 깔끔하게 틀이 잡힌 노천온천이었다. 크기가 제법 커서 여섯 명은 커녕 열여섯 명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흠흠흠~."
미라가 그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엘프의 피가 반이 섞여서 그런지 그림이 참 좋았다. 물론 다른 여자들도 전혀 밀리진 않는다. 다만 엘프의 혈통에서 나오는 그 특유의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절경이었다. 노천탕 특유의 분위기도좋았지만, 그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여자들이 절경이었다.
온천수라 그런지 물이 흐릿해서 유두나 그 아래의 부끄러운 부분이 귀신같이 가려졌다.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마성의 매력을 가진 몸이었으나, 일단은 온천 여행이니 이렇게 안 보이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다 같이 벗고 있어서 여자들도 홀로 떨어져 앉은 청일점을 은근히 의식하는 듯한데, 이런 상황에서 발기까지 해버리면 편안했던 분위기가 야릇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뭐 나쁘지야 않겠지만 벌써 그러면 여행의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일본 온천이었기에 다들 입욕하면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는데 결론적으로는 바람직했다. 탕에 닿지 않도록 하나같이 머리를 틀어올렸는데, 그 모습이 색다르기도 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여러모로 이번 온천 여행은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저번에 국내 온천으로 여행 갔을 땐 여섯 명이서 이용할만한 가족탕을 구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수영복을 입고 야외 공용탕에 갔었다. 남자 여자 따로 입탕하는 것은 용사와 여자들 모두 여행의 의미가 없다며 납득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다. 아무튼 다 보여주는 것보단 보일락 말락 가리는 것이 은근한 꼴릿함을 선사해줬으나,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소란스러워 분위기도 좀 그랬고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피곤했다. 네토 취향이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 신경이 날카로웠을 것이다.
"그때보다 훨신 좋은 것 같다."
"그러게."
"확실히 사람 많은데는 별로인 것 같아."
여자들끼리 재잘재잘 얘기를 나눈다. 그림도 좋고 참 기특했다. 하렘을 구축한 용사 입장에선 여자들이 서로 사이가 좋은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가족처럼 지내는 덕분에 질투라던가 각각의 거미줄처럼 복잡한 관계로 피곤할 일이 없었고, 여자들 특유의 엿같은 파벌짓도 없어서 좋았다. 굳이 따지자면 저 다섯 명이 한 파벌이고, 외부의 다른 여자들과 벽을 치는 느낌이긴 하다. 하지만 그거야 용사도 크게 다르지 않을 뿐더러 내부 결속이 가장 중요하니 오히려 권장하고 싶었다. 아무튼 여자들끼리 냅둬도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잘 놀고, 서로 섭섭할 일이 없어서 좋았다.
다 같이 모여도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니, 온천욕도 더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 기분 좋다~."
계속해서 몸을 담그고 있자 몸이 풀어지는지, 미라가 살짝 늘어지면서 말한다. 다들 공감한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흠.
'일본어군?'
생각해보니 다들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는군.
여권도 없이 해외 여행을 할 수 있고, 따로 말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그 나라의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모두 레이아의 작품이었다.
레이아는 만능 마법사로서, 통역 마법 역시 가능했다. 그녀의 통역 마법은 다소의 의역까지 해주기 때문에 상당히 완성도가 높았는데, 거기서 안주한게 아니라 마법을 한 단계 더 진화시켰다. 이른 바 '언어 이식 마법'.
레이아가 원래 자기 혼자만 알고, 머릿속에 있는 것을 잘 설명을 못하는 스타일이라 마법의 원리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잘 설명했어도 다들 마법에 정통하지 않아서 들어봤자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알기 쉽게 말하자면, 대상의 두뇌 속으로 들어가 의식과 무의식 깊은 곳에 박힌 언어 체계를 복사하여 이식하는 마법이다. 이는 단순히 입 밖으로 나온 것을 번역해주는 통역 마법보다 훨씬 우월한 상위 마법이었다.
통역 마법을 초월하는 언어 습득 마법.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일본어의 경우 남성어와 여성어가 따로 있다. 그래서 통역 마법을 할 경우 이 부분에서 어색한 부분이 발생하는데, 언어 이식 마법은 그럴 걱정이 없는 것이다. 여성에게서 언어 체계를 추출한다고 쳐도,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어를 모르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마법의 완성도도 높아서, 생각조차 그 언어로 하기도 한다. 원래는 생각을 한국어로 했었는데 갑자기 일본어로 생각을 하는걸 자각하고는 이질감을 느낀 적도있었다. 앞서 말했듯 마법의 완성도가 높아서, 적당히 의식만 하고 있으면 언어 간의 혼동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추출 대상에게 부담이 가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면 이식된 언어를 다시 추출해낼 수도 있어서 엄청나게 유용한 마법이었다.
문득, 미라에게 말을 배웠던 때가 생각이 났다. 판타지 세계에 뚝 떨어진 후 쉴 틈 없는 여정에도 틈틈이 말을 배웠는데, 그런 과정에서 둘이 자연스럽게 붙게 됐고 결국 연인까지 관계가발전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미라는 용사의 첫 동료였다. 하지만 당시엔 각자의 사정으로 아주 날카로운 상태여서, 초창기엔 빈말로도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악연이 겹치면 인연이라던가. 불가항력으로 긴 시간 동안 동료로 지내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등을 맡길 만큼 친해졌다.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용사와, 엘프와 인간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혼혈 떠돌이는 은근히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혼자 사는 법만 알았던 그들은 점차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아갔다.
악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연인이 된다.
말 그대로 죽도록 힘든 시기였지만, 그래서인지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 추억이 된 것 같다.
"하으음…."
미라는 노천온천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탁 트인 주변 환경과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프엘프 궁수의 날카로운 감으로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는 이쪽을 돌아본다.
"응?"
그녀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인 부드러운 색감의 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크고 동그란 눈매가 이내 부드럽게 휘어진다. 반달 모양의 매력적인 눈웃음은 예전의 미라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사실 용사도 남자인지라, 당시의 날카로웠던 미라를 보고 지금처럼 눈웃음을 지으면 참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덮쳐들기 직전의 사나운 고양이 같은 눈이어서 농담도 하기 힘들었다.
…용사 본인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날카로운 분위기였으나 자각하진 못한 듯하다.
아무튼, 지금의 미라를 보면 예전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좋은 변화였다. 날카로운 성격이었다는건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그만큼 압박감을 줬다는 뜻이고, 지금의 새침한 성격은 적어도 지구에서의 삶이 나쁘진 않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미라의 본성을, 내면의 따뜻한 심성을 알고 있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부드러운 눈인사를 주고받으니 다른 여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여자들. 지금 보니 성격의 변화도 모두 달랐다. 레이아와 미라는 처음 봤을 때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심지어 레이아는 최근에 한 번 더 성격이 바뀌었다. 반대로 지나는 성격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무희시절과는 달리 오직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살지만,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홀리는 그 여우 같은 앙큼한 성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남자로 태어난 이상 알고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앙큼함이 지나의 가장 큰 매력이다. 델렌은… 바뀐 점이 있나 싶다. 주변 환경만 달라졌지, 그녀의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아리는 논외다. 저주가 성격에 영향을 끼쳤으니까.
….
"저는 먼저 나갈게요."
아리가 일어서며 말했다. 온천욕으로 몸에 피가 돌면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은근히 귀여웠다. 키는 여자들 중에서 제일 큰데도 귀여움으론 밀리지 않는게 여러모로 재밌었다. 심지어 원래의 성격은 제법 딱딱한 편이었다.
찰박.
물에서 나오기 위해 발을 들자 그동안 잘 숨어 있었던 다리 사이의 은밀한 부분이 드러난다. 귀여운 분홍색 꽃잎을 보자 이제까지 잘 참아왔던 분신이 반응했다.
"흠."
온천욕은 충분히 한 것 같다. 앞으로도 몸을 담글 기회는 많으니, 슬슬 아우성치는 아랫도리를 진정시키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렁.
몸을 일으키자 시선이 집중된다. 다들 안 그런척 하면서도 은근히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던 모양이다. 이제까지는 나름 건전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야릇해진다. 미라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그럼 그렇지 하는 시선을 던졌고, 지나는 마치 '어머!'라고 말하는 듯이 입을 가렸지만 눈은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델렌은 그 특유의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분위기로 멍하니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 무방비해 보이는 모습이 남자에겐 치명적이다. 레이아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기도 슬슬 일어나려는 낌새를 보였다.
"어? 아… 하하…."
먼저 일어나 입구 쪽으로 향하던 아리는 자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됐다고 생각한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실 아리 때문이 맞긴 하다. 그러니 그 몸으로 수습을 해야겠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생각이다.
불끈.
'음….'
그렇게 첫 번째 온천욕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