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1. 아리스, 한 아리 (1)
"아니, 저 그러니까 그만 빼시고 번호 좀…."
"됐다고요."
남자가 여자에게 작업하고, 여자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이면서 빠져나간다. 몇 차례 더 엉겨붙던 남자도 슬슬 자존심이 상한 듯, 팔을 뿌리치고 멀어지는 여자를 더 이상 잡지 않고 눈썹을 찌푸린다.
"씨발, 걸레년이 존나게 튕기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화났다고 광고하는 듯한 거친 동작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연기를 깊숙히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멀어진 여자의 등 뒤로 걸레니 뭐니 하는 모욕을 던지며 화풀이를 했다.
….
"후우…."
아리스 한. 지구에서는 한아리라는 이름을 쓰는, 남색 긴 생머리가 눈에 띄는 매력적인 여자.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나온다. 심정이 복잡했다.
온천에서 강화된 저주가 적용된 후에도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겉으로는 말이다. 다들 내색하지 않을 뿐,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싸우고, 혹은 타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천성. 타고난 성품이라는 뜻으로, 타인이나 환경 등의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쉽게 바뀌지 않는 각자의 성격이다. 사람을 해하지 못하는 유순한 성품도 천성이고, 도벽처럼 자타 모두가 인지하고 있으나 쉽게 고쳐지지 않는 심각한 단점도 천성이다.
하지만 마왕의 강력한 저주는 그 견고한사람의 천성마저 바꿔버렸다. 천성적으로 외면과 내면 모두 강했던 여검사는 현재 수컷의 구애를, 교미를 거부하지 못하는 외강내유형 인간이 돼버렸다.
스윽, 스윽.
공중 화장실로 들어간 아리는 주변의 기척을 탐지하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고 양옆으로 젖혔다. 물때가 진득히 낀 탁한 거울에 아리의 하얀 속살과 브래지어가 비쳤다. 브래지어의 프론트 후크를 풀자 함께 했던 모든 남자들을 만족시킨 풍만한 가슴이 물방울 모양으로 예쁘게 자리잡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역시…."
아리는 옆구리를 간신히 가리는 블라우스를 더 젖히며 자신의 피부 상태를 확인했다. 맨살이 어깨까지 드러나면서 그녀의 상반신은 팔을 제외한 전부가 거울에 비쳤다. 마치 순백의 도화지에 물감을 들인 것처럼, 일반인이었다면 제법 오래 갈 것이 분명한 불긋불긋한 자국들이 몸 곳곳에 골고루 분포하고있었다.
아리는 용사의 다른 여자들과 비교해도 유독 키스마크를 많이 달고 다니는 편이었다. 남들과 비교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리는 그저 남자들이 키스마크 남기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행동에 대해 뚜렷한 원인을 규명할 순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리의 분위기가 여러 골칫거리들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치 새하얀 눈밭과도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녀를 거쳐간 남자들이 마치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듯이 아름다운 몸에 흔적을 남기기를 좋아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더 순결하진 않았다. 굳이 줄을 세우자면 용사를 만나기 전부터 문란하게 살아왔던 지나가 가장 음탕할 것이고, 용사에게 처녀막이 뚫린 레이아가 가장 순결할 것이다. 아리는 미라, 델렌과 함께 중간권이겠지. 이제 와서 이런걸 따져봐야 무의미하다. 연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며 네토 플레이를 해대는 걸레 같은 여자들을 보며 누가 더 순결하고 누가 더 음탕한지 따지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리 입장에선 썩 괜찮은 기분이긴 했다. 순결함이니 음란함이니 하는 것은 네토 플레이를 수용하면서, 아니 그보다도 훨씬 전에, 용사를 만나기도 전에 그녀의 사전에서 지워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좋게 봐준다니까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골치가 아픈 것이, 지금처럼 처음엔 좋다고 달려들어 놓고선 일 치른 후에 걸레니 뭐니 매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추락도 강해지는 것이다. 섹스 한 번 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되는 관계였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
외강내유.
아리는 속으로 네 글자를곱씹으면서 낮게 한숨을 쉰 후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화장을 고쳤다. 정말 골치가 아팠다. 저주가 강화된 후 남자들의 대시를 거부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남자가 조금만 더 질척거리며 달라붙으면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한 번 대주기로 결정하고 다리를 벌리는 자신을 자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한다.
'자동문.'
언젠가 들었던 말. 아리는 그 단어가 걸레년이니 씨팔년이니 하는 노골적인 욕설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처음 들었을 때는 내심 감탄했다. 판타지 세계에서 지구로 넘어오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컬쳐 쇼크 중에서, 사람을 인식하고 알아서 문을 열어주는 놀라운 기술에 충격을 받고 감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사람한테 비유할 생각을 한 것도 신기하고, 묘하게 자신의 처지와 들어맞기도 해서 기분이 막 나쁘다기보단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불쾌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순탄치 않았기에, 이제와서 '타인'의 말 몇 마디로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외강내유 스킬은 남자의 대시를 거절하기 힘들어지는 것 뿐이지, 정말로 내면이 약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면 내면의 특정 분야가 약해진달까.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멘탈'은 여전히 강했다. 물론 이건 타인을 상대할 때의 기준이고, 연인인 용사나 가족으로 생각하는 다른 여자들에게 나쁜 말을 들으면 당연히 상처받는다. 아리는 타인에게 강직한 만큼, 가까운 사람에겐 더 큰 상처를 받는 성격이었다.
우우웅.
초면인 남자와 진하게 살을 섞은 후 흐트러진 몸을 다시금 가다듬기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 녀석'에게서 온 문자톡이었다.
[누나 뭐해요??]
….
우우웅.
답장이 없자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문자가 온다.
[누나]
[누나 자요?]
"흐음…."
아리가 한숨인지 뭔지 모를 낮은 호흡을 내쉬며 답장했다.
[이 시간에 자겠니]
[누나 제발 읽씹좀 하지 마요 ㅠㅠ]
끈질기게 달라붙는 녀석은 근래 들어 번호를따간 남자들 중 하나였다. 다른 남자들과 차이점이 좀 있었는데, 일단 세상에 여자가 아리 하나뿐인 것처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신체접촉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만큼 꾸준히 일방적으로 톡을 보내왔고, 관계가 이어지길 원했다.
아리는 그 자리에서 섹스로 이어지는 경우가 아니면 남자들과 대화조차 잘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서, 매너를 갖춘 상식적인 남자들은 예외 없이 전부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리가 아무리 예쁘고 몸매 좋은 최상급의 여자라고 해도 일주일이 넘도록 꾸준히 보낸 문자가 죄다 씹히면 남자들은 찝쩍거리기를 포기한다. 번호를 줬지만 이후의 연락을 무시하는 여자가 아리 뿐만이 아니기에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한 것이다.
'….'
사실 그게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지만 아리는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남자들이 너무 깔끔하게 넘어가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현대에 비해 야만적이고 여자의 위치가 낮은 판타지 세계, 그중에서도 최악의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현대 사회 중에서도 남자들의 매너가 썩 괜찮은 편에 속하는 이곳이 오히려 낯설었다. 물론 좋은 의미의 이질감이었다. 여자 입장에서 편하니까 좋았다.
아무튼, 그렇게 읽씹의 여왕 노릇을 하며 외유내강 스킬의 지배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남자들에게 철벽을 쳤던 아리였으나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온천 여행에서 저주가 더 진행되면서 모두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일단 용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의 언행은 겉보기엔 크게 달라진 점 없이, 예전처럼 다른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는 여자들의 음란한 모습을 관음하며 재미를 봤다. 그러나 그것은 제 3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의 얘기고, 용사와 누구보다도 가까운 여자들은 그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쉽게 말하자면 관람에서 방치로 바뀌었다.
예전의 용사는 초월적인 방관자였다. 모든 상황을 원하는대로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여자들에게 압도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정력을 가진 존재로서 저만치 높은 위치에서 마치 관람을 하는 것처럼 관음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여전히 그의 강대한 힘과용사로서의 경험이 단단한 지반이 되어 저주 강화라는 커다란 충격과 혼란을 버텨냈지만, 결국 여자들을 꽉 쥐고 있던 '강인한 자' 능력을 상실했다. 이상 성욕 스킬은 더 강해져서, 이젠 네토 플레이가 아니고선 쉽게 흥분과 쾌감을 얻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여자들은 저주 강화로 인해 바깥으로 나돌고자 하는 외도성이 더욱 강해져서, 이제는 용사의 네토 취향과 별개로다른 남자들을 갈구하게 됐다. 사랑이 식었다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저주가 피워낸 불가항력의 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작용이었다.
용사의 [이상 성욕] 저주 스킬이 [이상 성욕(Lv.2)]로 강화된 것처럼, 여자들의 [씨받이] 스킬 역시 [씨받이(Lv.2)]로 강화되었다. 1레벨 만으로도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강력한 저주가 한 단계 더 강력해졌고, 그에 따른 변화는 사람의 의지로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 역시….
우우웅.
[누나... 진짜 한번만이라도 보면 안될까요?]
….
"후우…."
띡띡띡띡….
아리의 섬세한 손가락이 액정에 띄워진 자판을 연주하듯이 가볍게 톡톡톡 누른다. 사용자의 입력에 반응하여 핸드폰이 효과음을 낸다.
아리는, 처음으로, 용사의 허락 없이 다른 남자와 접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