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4-1. 아리스, 한 아리 (3) (42/162)



〈 42화 〉#4-1. 아리스, 한 아리 (3)

더럽혀지고노예가  후, 5년이 지났다. 그러나 가끔씩 찾아오는 악몽은 항상  순간을 빌어먹도록 선명하게 선사한다. 누군가가 몸을 흔들자 정신을 차린 아리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꿈과 현실이 구분이 되지 않은 것인지 어두운 안색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안색은 어스름한 방의 그림자에 묻혔다.

"어이."

"…으음."

"웬일이냐. 네가 나보다 늦게 일어날 때도 있군. 끙끙거리던데, 악몽이라도 꿨나?"

"…."

"하, 빌어 처먹을 년. 대답 좀 하라니까."

덩치의 말을 무시한채 아리스는 끌어안고 있던 검을 보았다. 검집은 울고 울었던 그때처럼 더러웠지만, 그 안의 검날도 그때처럼 날카로웠다. 검을 정식으로 배운 날에 아버지께서 선물해줬던 고르고 고른 명검이었기에, 열악한 환경에서도 날이 제대로 살아있었다.


스르릉.


차가운 소리를 내며 섬뜩한 검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쌔액!

서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외날검이 바람을 가르며 예리한 검풍을 일으켰다. 그 누구보다도 외날검을 잘 다루는 아리스는 무기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는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방 안에서 칼질좀 하지 말라니까."

남자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잔소리를 한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힘줄이 잘렸던 여자가 다시 검을 잡고 휘두르는 것도, 노예 둘이서 귀족이나 쓸법한 고급스럽고 널찍한 방에서 같이 살며 몸을 섞는 것도, 노예인 아리스에게 그녀의 검이 들려있는 것도, 칼을 들고 있음에도 쇠사슬로 구속되지 않은 것도, 마치 이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사연을 따지자면 길고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정말 비싼 치료를 받았다. 몸이 완치됐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서대륙은 보수적인 동대륙과 달리 다양성으로 가득했다. 인간이 전부인줄 알았던 아리스는 인간을 닮았으나 확실히 인간과는 다른 수많은 종족들을 보았다. 활과 정령마법에 능통한 아름다운 종족 엘프, 의외로 문명과 지성이 있어서 몬스터가 아니라 힘  야만족에 가까운 오크, 못생긴 난쟁이지만 누구보다도 뛰어난 대장장이 종족인 드워프 외에도 동대륙의 요괴와 비슷한 고블린이나 피부색이 새까만 흑색 피부의 인간까지. 서대륙은 문명 구성원이 정말로 다양했다.


종족 뿐만 아니라 능력도 여러가지였다. 동대륙이 검이나 창, 도끼, 봉, 추 등의 근접전 전용 병기에 통달했다면 서대륙은 그런 근거리 병기들의 수준은 좀 낮아도 활이나 마법, 정령술 등 생소한 분야에서 엄청난 성취를 보였다. 특히 마법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의 힘이어서 아리스의 흥미를 이끌었다.


그녀가 최상급 검객임에도 마법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폐인이 된 몸을 예전의 상태로완벽하게 복구한 것이 저명한 서대륙 마법사의 치료 마법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죽도록 재활을 해야 했지만, 예전의 경지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망가져버린 아리스에게 다시 한 번 삶의 원동력을 부여했다.

물론,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재활이 끝난 아리스는 활력을 되찾긴 했으나 안 그래도 무뚝뚝했던 성격이 악화되어 냉소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할  있겠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몸도 조금 더 성장했다. 여자는 빨리 성장하고 빨리 멈춘다고 하는데, 아리스는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도 꾸준히 자라서 예전보다도 더 길고 늘씬한 몸을 갖게 됐다. 동대륙인이 서대륙인보다 평균적으로 더 작음에도, 그녀는 남자들마저 종종 내려다볼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키가 무척 크지만 신체의 밸런스가 잘 잡혀있고 비율이 상당히 좋아서 길쭉하게 뻗은 허리와 다리 라인이 그리는 곡선은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뭘 입어도 섹시했고, 입지 않으면 더더욱 섹시했다. 묵직한 느낌마저 주는 큼지막한 가슴은 원초적 본능을 자극했고, 타고난 골반은 잘 발달되어 가슴 만큼이나 강하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검술과 신체 단련에 미친 것 치고는 근육이 전혀 과하지 않았고, 몸이 부드러웠다. 피부도 딱딱하다기보단 탄탄한 느낌을 줘서 상대방에게 아무리 만져도 질리지 않는 촉감을 선사했다.

이렇게 나열했음에도 그녀의 매력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희소성이다. 키 크고 늘씬하고 몸 좋은 여자? 아리스처럼 완벽한 몸매는 찾기 매우 어렵겠지만 없진 않을 것이다. 찾다보면 있겠지. 의외로 많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동대륙인 특유의 새카만 머리칼과 흑요석처럼 검게 빛나는 눈동자라던가, 다소 염세적이지만 퇴폐미를 뽐내는 분위기라던가 하는 부분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수많은 매력을 가진 여자가  클래스의 검투사,  엄청난 강자라는 것은 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아리스만의 엄청난 매력이자 경쟁력이었다. 돈으로도 살  없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희소성. 힘줄이 잘린 폐인의 신체를 원상복구 시키는 최고 수준의 회복 마법이 일개 노예인 아리스에게 베풀어진 것은 결코 기연이, 선의가 아니었다. 꽤나 큰 돈이 걸린 하나의 투자이자 거래였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자 세상의 그 어떤 간섭도 무시할 것 같았던 아리스가 반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리스."

"마스터."

한 남자가 들어오자 아리스가 가볍게 목례했다. 목례라고 하기엔 고개를 까딱거린 수준이지만, 그녀에게서 먼저 인사를 받아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자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콜로세움 마스터, 크레스트 남작.


아리스가 말한 마스터는 콜로세움 마스터를 줄여서 부른 마스터였다. 그녀의 주인이기도 했기에 중의적이긴 했지만, 아리스는 크레스트 남작을 주인 취급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크레스트 남작 역시 그녀를 노예보다는 대등한 거래자로 대우해줬다. 둘 다 여러 의미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남작은 가진 거라곤 더럽혀진 몸밖에 없는 아리스를 선뜻 치료해줬고, 아리스는 자신의 가치가 천문학적이지만 남작의 의사에 따라 콜로세움의 검투사 계약을 유지해줬다. 투자와 계약 치고는 둘의 행동에 제법 유연성이 있었다. 물론 정 따윈 없는 딱딱한 관계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오늘 매치가 있는건 알고 있겠지?"

"그래. 무슨 매치지?"

"레이디 나이트."

"…."

"경기 끝나고 깨끗이 씻도록.향유도 좀 바르고. 뭐, 알아서 잘 하겠지. 처음도 아니니까."

아리스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처음 하는 일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거부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우, 몸단장하는 아리스라니. 존나 꼴리군. 나도 돈만 있었으면…."

"더브, 너도 매치가 있잖나. 놀지 말고 준비해라."

아리스와 몸을 섞은 룸메이트, 더브가 남작의 잔소리를 듣고선 얼굴을 찌푸렸다.

"거 참, 말투 보소. 얘랑 나랑 온도 차이가 너무 심한거 아니오."

"너랑 아리스가 같나?"

"퉷. 더러워서  살겠군, 개 같은 세상. 읏차!"

더브가 우람한 근육질 몸을 일으켰다. 남작과 제법 편하게 말을 나누긴 했지만, 그는 엄연한 콜로세움의 노예 검투사였다. 즉 남작과는 주종 관계인 것이다. 다만 지금은 최강의 자리에 있는 만큼 대우를 받는  뿐이다. 단련을 게을리 한다면, 몸이 무뎌진다면 몰락은 한 순간에 일어난다. 비록 입으로 불평은 했지만, 더브는 그걸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을 하기 시작한 더브에게서 눈을 뗀 남작의 시선이 다시 아리스에게로 향했다. 신체 곳곳에 더브와 몸을 섞은 흔적이 가득했으나, 그 정도론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도 이 정도니, 깨끗한 상태라면 훨씬 더 아름다울 것이다.


"아리스."

남작의 말에 아리스가 눈을 마주쳤다. 더브에게 했던 것처럼 잔소리를 하려던 남작이 말을 삼켰다. 차갑지만 성실하니, 그녀에게 잔소리는 무의미함을 넘어서 역효과만 일어난다. 효과 없는 실언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항상 했던 것처럼 하면 돼."

"알았어."

더 용건이 있냐는 듯한 시선에 남작이 먼저 움직였다.

"그럼 경기장에서 보도록 하지."

"응."

드르륵.


겉모습은 좋지만 보안은 다소 허술해 보이는 문을 닫고, 남작이 밖으로 나왔다. 말초적인 남자 냄새와 여자 냄새가 섞인 묘한 냄새가 감도는 방에서 나오니 상쾌하기도 하고, 뭔가 아쉽기도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발기된 성기를인식하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복도를 걸었다.

아리스. 평생을 관리 받으며 살아온 어지간한 귀족 영애보다도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가진 그녀에게 욕정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남작은 아리스의 상급자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내심 동경했다. 강하면서 아름답고, 그러면서도 속세에 찌든 퇴폐미를 갖고 있다. 방 안에 감돌던 그녀의 체취는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그녀와 잔 더브가 부러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콜로세움 마스터라는 것을 자각하며 인내했다. 과일 상인이 자기 과일을 먹어 치우지 않는 것처럼,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아리스를 건드려선 안된다. 고집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 고집이, 고작 남작에 불과한 그를 콜로세움 마스터로 만들었으니.


콜로세움은 서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들의 음지 문화였다. 심지어 왕족들도 심심찮게 찾아온다. 촌수를 따지기도 어려운 방계 나부랭이가 아니라, 엄연히 계승권이 있는 직계 왕손이 말이다. 그런 엄청난 거물들이 찾아오는 만큼 콜로세움 마스터는 실제 작위보다 훨씬 높은 대우를 받는다. 자존심이 강한 수준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한 백작에게도 존대를 받으니, 왕국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백작 급은 된다.

예전에도 유명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콜로세움의 인기가 이토록 높아진 것은 방금 출전을 통보한 아리스의 공이 매우 매우 컸다.


어느새 옆에 따라붙은 콜로세움의 직원들이 뒤를 따른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아리스의 레이디 나이트 매치가 있거든."

남작은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고, 모두에게 말했다.

"완벽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은  완벽해야 해.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해야 하고, 어떤 술을 찾더라도 바로바로 나와야 한다. 가면을 쓰고 있더라도 누구인지 알아채야 하고, 출전자들의 상태도 최고여야만 한다. '에프터 매치'도 완벽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내가 굳이 한 번 더 강조하겠다."

아리스. 콜로세움 최고의 인기인이자 최고의 강자. 그녀의 출전은 콜로세움의 직원들에게 있어선 비상 근무를 뜻하기도 했다. 그녀가 출전하는 날이면 콜로세움 관람객의 신분의 평균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근무 상황은 글로리(Glory)다. 움직여!"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저래 뵈도 다들 급이 되는 놈들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게 일이다. 백작도 무시 못하는 콜로세움 마스터가 내리는 명령을 직접 듣는 이들이니 급이 낮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글로리 상황이 떨어지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근무 상황은 여러 등급이 있는데, 글로리가 최고 등급이다.


근무 상황 글로리는 왕족이, 그것도 왕위와 밀접하게 연결된 실세 중의 실세가 온다는
뜻이다.

'아리스.'

지금쯤 도착한 여시중들에게 붙잡혀 뚱한 표정으로 몸단장을 받고 있겠지.

그가 무의식적으로, 피식 웃었다.

유력한 왕위 계승자마저 끌어들이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검투사. 그녀는, 남작 인생 최고의 행운이다.





다른 곳에도 음지의 문화가, 음지의 쇼가 있다. 검투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경기장 한복판에서 여자를 공개적으로 능욕하는 것도 그리 보기 드문 건 아니었다.


이름 높은 귀족들이 굳이 콜로세움을 찾아오는 이유는, 콜로세움이 보기 드물면서도 만족스러운 쇼를 펼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수준이 높다. 똑같은 검투 경기나 능욕쇼를 펼쳐도 이곳은 질이 좋다.


기사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검투사들이 서로의 심장을 노리며 결투하고, 패자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무리 지체 높은 귀족이어도 육성과 유지에 어마어마한 자원이 들며, 자신의 기득권을 목숨 걸고 지켜주는 기사를 소모품으로 사용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이 펼치는 경기는 귀족들이 열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싸움이다. 물론 기사들도 결투를 통해 서로의 목숨을 취하는 치열한 대결을 벌일 수야 있다. 그러나 결투는 대부분 귀족들의 명예와 권위에 직결되어 있기에, 즉 정치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결코 남의 일처럼 편하게 관람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싸움과 순수한 열광은 오직 콜로세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여자를 능욕하는 쇼 역시 여자들의 수준이 아주 높았다. 귀족들은 단순히 외모만 보고 뽑힌 계집들에게 원할 때마다 밤시중을 받아서 눈이 아주 높은데, 그들마저 만족시킬만큼 콜로세움의 여자들은 수준이 높았다.


참고로 이쪽이 압도적인 순이익을 안겨다준다. 제 아무리 경국지색의 여자라도, 여자의 가치는 대부분 신분에서 결정되기에 검투사보다 훨씬 저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력보다 가치가 높은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둘의 가격 차이는 더 벌어진다. 게다가 경기 한 번으로 소모되는 검투사와는 달리 여자들은 얼마든지 다시 써먹을 있다.

과감하게 투자한 검투사 매치로 관객을 한껏 끌어모으고, 여자로 순이익을 챙긴다. 크레스트 남작의 이러한 운영은 대성공이라는 결과로 이어져, 그의 지위를 한껏 이끌어 올렸다. 또한 콜로세움을 찾아오는 이들의 수준 역시 한껏 올라갔다.


레이디 나이트 매치.

그 단어에 관객석이 술렁거렸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가진 이들이 동요할만큼  매치의 기대치는 높았다.


아리스가 참가하는 매치는 크게  종류였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단순한 검투 매치와 단순한 에로틱 매치, 그리고 둘이 합쳐진매치. 레이디 나이트 매치는 분류가 조금 애매하긴 해도 마지막에 해당된다.


참고로 에로틱 매치도 여러 종류인데, 여자끼리의 누드 레슬링(?)을 통해 승자가 패자를 능욕하는 캣파이트 매치와 처음부터 그쪽으로… 즉 섹스로 승부를 보는 걸스 파이트 매치가 대표적이었다. 콜로세움 마스터는 아리스가 유명해질수록 에로틱 매치의 비중을 과감하게 줄여나갔다. 처음엔 내부 반발이 있었으나, 결국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결과가 증명했다.


레이디 나이트 매치는 아리스의 여자로서의 모습을 볼  있는 아주 드문 매치였다. 철과 피가 난무하는 결투, 그리고 섹스. 아주 원초적이면서도 남자들의, 아니 사람들의 욕망을 고루 만족시키는 구성이었다. 아리스의 인기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데, 콜로세움의 성비를 생각해보면 여자들에게서도 엄청난 인기가 있는 셈이었다.


그 대단한 레이디 나이트 매치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부, 아리스과 상대방의 결투. 2부, 경매. 경매품은 아리스와의 하룻밤. 2부는 경매를 할 때도 있고, 복권식으로 추첨을  때도 있다.  여부는 대체로 VIP의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부자들이 많으면 경매, 적으면 추첨이다. 추첨권 역시 엄청나게 비싸다.


….

"흠흠."

크레스트 남작이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당연히 경매식이다. 근무 상황이 글로리인만큼, VIP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리고, 그토록 중요한 매치인만큼 진행자는 남작 자신이었다. 그의 목구멍이 활짝 열리며, 전문가 수준의 뛰어난 발성으로 관객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신사 숙녀 여러분!"

….


….



….


"…뭐?"

여전히 거친 호흡을 차분하게 가다듬던 아리스가 되물었다. 메이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종이 다시 한 번 전달 사항을 통보해왔다.


"주인님께서, 씻지 않고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

아리스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여자의 땀냄새를 좋아하는 남자는 은근히 있었고, 겪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적당한 수준이어야지.

오늘의 검투는 치열했다. 도전자의 실력 자체도 출중했을뿐 아니라, 일종의 핸디캡으로 그녀의 명검 대신 적당히 만든 외날검으로 싸워야 했다. 무기가 부러지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으므로, 그녀는 내구성에 의심이 가는 외날검을 최대한 조심히 다뤄야만 했다.

물론, 결과는 언제나 그랬듯 생채기 하나 없는 압승이다. 심지어 깔끔하게 일 합으로 명줄을 끊고 몸을 빼내어 몸에 피조차 묻지 않았다. 의도했던 것이다. 피 튀는걸 두려워했다기보단, 전투의 흥분을 최대한 절제하고 싶었다. 자유를 억제당한 상황에서 피 맛을 본다 한들 괴로울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깔끔한 승리를 거뒀으나, 그만큼 과정이 힘들었기에 그녀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수준 높은 마나 유저는 체내의 노폐물이 극단적으로 적었고, 아리스의 땀은 사실 몸에 묻은 물기 수준이어서 그렇게 더러운건 아니었다.

'그래도.'

땀은 땀이잖는가.


"아리스 님. 주인님께서는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십니다."

"…망할."

오, 하고 시종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리스의 언동은 차가운 경향이 있어도, 의외로 거칠진 않았다. 그런 그녀가 비록 귀여운수준이긴 해도 욕설을 했다는건, 그만큼 거부감이 크다는 뜻이다.

"후후…."

"웃지 마. 하아…."

"네. 그럼 가실까요?"

시종이 능글맞게 웃으며 앞장섰다.  씹은 표정을 짓던 아리스는, 점차 침착을 되찾아가며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뒤따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