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1. 아리스, 한 아리 (4)
"흐읏… 으읏…."
"생각보다 예민하군."
과연, 씻지 말라는건 이런 뜻이었나. 아리스가 속으로 생각하며 무심결에 새된 신음을 내뱉었다.
"흐응!"
"하하, 뭐야. 생각보다 귀여운 아가씨였구나."
아리스의 돌기를 집중적으로 괴롭히던 남자가 짓궂게 웃는다. 아리스는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질척, 질척.
경기를 마친 아리스가 '애프터 매치'를 치르게 될 경기장은, 다름 아닌 커다란 욕실이었다. 크레스트 남작이 경기 전에 찾아와 애프터 매치 전에 향유를 바르라고 했던걸 생각해보면, 그냥 눈앞의 남자가 즉흥적으로 무대를 바꾼 듯했다.
"으응…."
아리스 입장에선 크게 나쁠 건 없었다. 일단 땀에 환장하는 변태는 아닌 것 같고, 목욕과 애프터 매치를동시에 하니 조금이라도 덜 귀찮긴 했다. 다만….
"흣, 흐으읏! 그, 그만…."
문제가 있다면, 이 남자는 애무에 환장했다는 점이다. 여자를 괴롭히는게 좋은 건지 몸을 만지는걸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피곤한 타입이었다. 아리스 입장에선 빨리 사정시키고 들어가서 쉬고 싶었으나, 분위기를 보니 편한 밤을 보내기엔 글렀다.
후끈한 습기가 가득한 욕실 한가운데에서, 목욕 의자에 앉은 남자는 아리스를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로 열심히 손장난을 쳤다. 남자는 더브 만큼이나 덩치가 커서, 키가 큰 아리스가 남자의 품에 쏙 들어갔다. 더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근육이 아니라 살이라는 점이다.
질컥!
아리스가 몸을 크게 떨었다. 뭍으로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한 차례 펄떡거리자 갈라진 틈에서 투명한 꿀물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의 능글능글한 웃음기를 보니, 앞서 치른 혈전보다 목욕을 빙자한 오일 마사지를 버티는게 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특히나 돌기를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리스의 성감이 올라오자 유두를 손톱으로 톡톡 튀기기도 하고 음부에 숨어있던 콩알을 마구 문질러대며 반동으로 딸려오는 아리스의 몸짓을 즐겼다.
"생각보다 예민하구만."
"으흑!"
남자가 아리스의 귓가에 속삭이며 귓볼을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말캉한 혀가 귓바퀴를 훑자 아리스가 파르르 떨었다.
예민하다라….
예민할 수밖에.
아리스는 혼곤한 와중에도 자신의 룸메이트 더브를 떠올렸다.
크레스트 남작은 철두철미한 자였다. 그가 괜히 더브와 아리스를 붙여놨겠는가. 여러 목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아리스의 몸이다. 더브는 하루에도 몇번씩 시도때도 없이 아리스에게 섹스를 요구했는데, 아리스는 더브를 거부하지 말라는 크레스트 남작의 명령 때문에 언제나 몸을 대줄 수밖에 없었다. 더브는 더브대로 크레스트 남작의 명령에 따라 섹스할 때마다 아리스를 집요하게 애무했다. 아리스의 성감을 개발하고 몸을 예민하게 유지시키는 것이다. '고객'에게 먹음직스러운 상태로 내놓기 위한 일종의상품 보존이었다.
부차적인 이익도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남자 검투사들의목적 의식 부여였다. 남자들에게 있어 아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검투사이자 가장 따먹고 싶은 여자였다. 아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그녀를 자기 밑으로 깔아뭉개고 범하는 것만큼 강렬한 유혹은 없다. 크레스트 남작은 그걸 이용하여, 최고의 남자 검투사를 아리스와 합방시켰다. 그렇게 태어난괴물이 더브였다. 원래 더브는 별다른 목적 의식이 없어서 적당히 높은 위치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남작의 발표 후 순식간에 치고 올라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아리스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시도 가능했다. 더브는 크레스트 남작의 또다른 눈이 되어, 혹시 아리스가 이상 징후를 보일 경우 즉각 보고한다. 아무리 아리스가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 할지라도, 몸까지 섞으면서 일상 전체에 깊게 얽혀있는 더브를 속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남작은 아리스를 믿기에, 정확히는 아리스가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 믿기에 더브의 감시 역할에 큰 비중을 두진 않았다. 그저 일종의 보험 역할이었다.
그래도, 이러저러한 이유 중 으뜸은 역시 쾌락이었다. 콜로세움에 갇혀서 결투만 하고 사는 것보단, 섹스라는 오락거리가 있는게 훨씬 낫다. 이건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였고, 남작은 아리스 역시 예외가 아닐거라 확신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아리스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섹스의 쾌감을 받아들였다. 섹스할때 만큼은 쾌락에 휩싸여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걸 깨달은 후로, 그녀는 더브가 들이대는 것에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오락거리가 생기고 스트레스가 풀리면 내면에 품은 독기도 자연스레 빠질 테고,남작 입장에선 관리하기가 더 편해진다. 더브와 아리스의 합방은 남작이나 당사자들에게 있어 얻는 것이 있는, 상당히 남는 장사였다.
….
아무튼, 결론은 아리스의 몸이 민감하는 것이다. 게다가 매치 전까지만 해도 더브와 붙어먹었기에, 지금의 집요한 애무가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질퍽, 질퍽….
'이거, 확실히….'
아리스는 끈덕지고 미끌거리는 오일에 분명 다른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아무리 민감한 몸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애무가 자극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흐읏, 으읏! 흐으읏!"
"후후, 귀여운 아가."
느끼한 말과 끈적한 애무로 아리스를 갖고 놀던 사내가 마침내 자신의 육봉을 잡았다. 더 이상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확 달아오른 아리스는, 무의식적으로 튼실한 페니스에 시선을 빼앗기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츠걱!
"아으으응!"
검투 대결에서 멋진 기합을 지르던 최고의 검투사 아리스의 입에서, 탕녀가 내지를 법한 음란한 교성이 흘러나왔다.
…
뭔가 이상하다.
낙찰자에게 아리스가 안기는 것을 본 크레스트 남작이 무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얼굴에선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으나, 그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근무 상황 글로리를 발생시킨 고객, 에르슈미츠 제 2 왕자. 그는 처음부터 아리스를 보기 위해 콜로세움을 찾아왔다. 일정에 없던 레이디 나이트 매치를 억지로 밀어붙인 것도 그였다. 그래서 당연히 아리스를 낙찰해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왕자는 경매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리스의 검투 경기를 흥미롭게 보다가, 승패가 결정되자마자 관객석에서 나갔다.
'직접 안으실 생각이 없으신 건가.'
심지어 낙찰자는 왕자와 아무 관련 없는 타국의 상인 출신 하급 귀족이었다. 일단 남작의 정보는 그러했다. 조사를 시켜두긴 했으나, 당장 그의궁금증을 만족시킬순 없었다.
'모르겠군.'
그렇게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남작의 시야를, 어떤 시커먼 것이 가렸다.
"누구… 으읍!"
"쉿. 콜로세움 마스터. 위대한 분께서 찾으신다. 가만히 있도록."
남작을 뒤에서 덮친 사내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행동으로 남작의 눈과 입을 막았다. 무례한 명령조가 다분한 목소리였으나, 높은 사람을 많이 상대해본 남작은 금세 침착해지며 상황에 맞게 대처했다.
끄덕끄덕.
"좋아. 나쁜 일로 부르는게 아니니 안심하게."
"…."
왠지 나쁜 일일 것 같은데. 남작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순순히 사내의 지시를 따랐다.
…
…
적막, 그리고 어둠. 아리스의 방은 늘 그랬다. 널따란 방 한구석에 놓인 어스름한 촛불 몇 개가 조명의 전부여서 글씨조차 읽을 수 없었다. 또한 더브와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살을 섞었기에, 방 안에는 남녀가 교접했다고 알리는 것처럼 살 섞인 냄새가 배어 있었다. 마치 '그때'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이곳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 아니 멍청함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몸으로 직접 배웠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아리스는 의도적으로 방 안의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한다. 현명하지 않으면 죽는다, 날카롭지 않으면 죽는다, 독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천재가 맞았다. 가주를 단5년의 수련으로 꺾고, 자기보다 더 필사적으로 수련한 오빠를 압살했다. 둘 다 압도적인 검의 재능을 보였음에도 아리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지금은 콜로세움에서 남들을 죽이는 것에 도가 튼 검투사들을 압도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그녀는 강자의 경지에 이르러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도, 이 질문엔 대답할 수가 없다.
'내가 정말 강한가?'
외날검을 다루는 일이야 가장 잘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강해서,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오빠에게서 배웠다. 강함은 칼 다루는 기술이 전부가 아니다. 몸을 움직이는 보법이 전부가 아니다. 몸에 붙은 근육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강함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강하다. 명예가 높은 사람도 강하다. 신분이, 권력이높은 사람도 당연히 강하다.
물론 아리스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를 원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칼잡이가 명검을 원하는 것과 같았다. 그 엄청난 무력을, 그리고 아름다운 검투사라는 희소성과 경쟁력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아리스가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신은 강한게 맞으나 더욱 강한 자들이 너무 많았다. 정면으로 맞선다면 필패….
"음."
상념에 빠진 아리스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진동이 느껴진다. 이곳에 가까워진다. 더브는 아니다. 발걸음에 무게감이 다르다. 시간대로 보아 방을 청소하는 이들도 아니다. 그럼 남은 사람은 하나.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