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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4-1. 아리스, 한 아리 (5) (44/162)



〈 44화 〉#4-1. 아리스, 한 아리 (5)

"아리스."

크레스트 남작이 문을 열었다. 남작의 눈에 들어온 아리스는 방 한가운데에서 정좌를 하고 있었다.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 마치 조신하게 밤일을 기다리고 있는 처녀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가부좌나 정좌 따위를 모르는 서대륙인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잡념을 떨친 남작은 왠지 모를 복잡한 표정으로 아리스를 보았다.

"피곤한가?"

"그다지."

"어제 경기는 그렇게 힘들진 않았나보군. 다행이야."

아리스는 애프터 매치가 훨씬 힘들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의미 없는 말이었기에 도로 삼켰다. 사실 아직도 허리나 다른 부분들이 좀 뻐근했다. 몸을 움직이는데 전혀 무리가 없지만, 전투도 아닌 일에  상태가 왔다갔다 하는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 예정에 없던 특별 매치가 잡혔다."

"음?"

아리스가 의문을 표했다. 크레스트 남작은 그 누구보다도 경기의 퀄리티에, 그리고 흥행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리스의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수준 높은 경기를 위해, 희소성 있는 경기를 위해 아리스의 스케줄을 적당히 조절한다.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경기를 잡는 경우는 처음 봤다.


…왠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초 동안 짧게 침묵하던 아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매치는  시간 후다."

"특별히 준비할건?"

아리스의 질문에 남작이 침묵했다.


"…."

꽤 긴 침묵 끝에, 남작이 입을 열었다.

"마음의 준비."

"…그래."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남작이 너무나도 불친절했다. 그녀는 대충 눈치를 챘다. 평소와는 다른 어두운 분위기, 간헐적인 침묵, 의미를 알 수 없는 통보.


왠지  것 같았다.


끼익, 쿵.


어둠 속에서 아리스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었다.


 눈빛과 분위기를 본 적이 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봤던 장남의 눈빛. 처음엔 원망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락으로 떨어질 여자에 대한 진득한 악의였다. 방금 전의 남작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르릉.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명검을 천천히 꺼내보았다. 날의 상태를 점검하고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는, 예전에 비해 다소 거칠어진 검집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


"결국, 너만 남았구나…."

아리스의 표정이, 보기 드물게 감상적이었다.




"기대되는군."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전하."

"전하?"

"아, 죄송합니다. '각하'. 흐흐…."

딱 보기에도 높아보이는 청년과 딱 보기에도 음흉해 보이는 남자가 대화를 나눴다. 청년의 신분은 제 2 왕자, 에르슈미츠였고 음흉한 남자는 처형대장이었다. 왕자의 왼쪽에 자리한 처형대장이 씨익 웃으며 반대편을 본다. 왕자의 오른쪽엔 크레스트 남작을 데려온 사내가 있었는데, 그의 직책은 수호대장이다.

아는 사람이 본다면 긴장할만한 광경이었다. 왕국의 실세인 2왕자와, 왕자의 창과 방패 혹은 왼팔과 오른팔로 불리는 처형대장과 수호대장이 같이 서있었다. 그들의 권세는 왕조차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수호대장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는 처형대장의 비릿한 미소를 보고는 마치 썩은내가 난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왕자의 앞쪽에 있었기에 그 표정은 옆에 있는 처형대장과 앞에 있는 크레스트 남작만이 볼 수 있었다.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군.'

수호대장은 2왕자에게 발탁되기 전부터 기사 신분으로 자작이라는 작위까지 수여받은 실력자이자 귀족이었다. 그러나 처형대장은 천한 신분이었으며, 심지어 암살이나 납치, 인신매매 등 음지의 일을 전문적으로 해온 더러운 자였다. 수호대장은 그런 자와 같은 선상에 놓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만이었다.

사실 수호대장이 마냥 꽉 막힌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실력 있는 기사라면 응당 신분 상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꽤나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처형대장은 천한 신분이나 더러운 과거만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에도 큰 문제 덩어리였다.

2왕자의 지저분한 악취미. 그리고 그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는 처형대장.


차라리 처세술이나 더러운 술수로 신분 상승을 했다면 모를까, 실력만큼은 정말 뛰어나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2왕자를 실시간으로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 옆에 서있는 처형대장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며 예쁜 금발이 눈에 띄는  소녀가 들어왔다. 이제 막 성년을 넘긴 듯한 앳된 얼굴, 그에 비해  발달된 육감적인 몸매, 그리고 그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노출도 높은 의상. 소녀가 가까워지자 주변에 좋은 향기가 감돈다. 값비싼 향수는 물론이고 몸에 향유까지 발라서 말 그대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원래라면 치렁치렁한 액세서리로 치장까지 했겠으나,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2왕자의 앞에 서는 만큼 쓸데없는 장난질을 치지 못하게 장신구는 일절 금하였다. 수호대장이 눈앞의 유혹 덩어리를 무심한 얼굴로 검문했다.

"제법 괜찮군."

"황공하옵니다."

크레스트 남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2왕자의 시중을  소녀의 이름은아이사. 아리스를 제외하면 콜로세움에서 가장 비싼 여자였다. 경국지색의 아름다움과 여성으로서의 최대치에 가까운 황홀한 몸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기품이 있는 데다가 남자 경험이 없는 순결한 처녀였다.

아이사는 한참 어렸을 때부터 온갖 자원을 쏟아부어 키운 아이였다. 그녀는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교접하는 쇼걸이 아니라, 지금처럼 중요한 VIP를 대접하기 위한 일종의 헌상품에 가까웠다. 원한다면 첩으로 들이기 위해 데려가도 좋다. 물론 그만큼의 대가는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후후, 참 예쁘구나."

2왕자가 자연스럽게 아이사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품평하듯이 말했다. 아이사는 이제까지 교육받은대로 정중하면서도 교태롭게 웃으며 눈앞의 남자를 유혹했다. 일이 잘만 풀리면 무려 왕위 계승자의 첩실이 되는 것이므로, 지금 상황이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이사와 크레스트 남작은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자 내심 만족했다. 좋은 분위기라고 해봐야 2왕자가 다소 풀린 표정으로 아이사를 주물러대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았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흐르고,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가 됐습니다."

"들라 하라."

"예, 각하. 들어 오거라!"

처형대장의 다소 거들먹거리는 목소리가 실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이번엔 칼을  여인이 들어왔다. 콜로세움의 상징, 아리스였다.


아리스는 아이사와 마찬가지로 거의 속옷만 입은 수준의 노출도 높은 복장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옷만 비슷할 뿐이지 아이사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고급스러운 향수의 향기 대신 수련에서 비롯된 후끈한 땀의 냄새가 났고, 몸은 값비싼 향유 대신 땀으로 번들거렸다.


"저, 저런…."

크레스트 남작의 안색이 나빠졌다. 이것은 노골적인 도발이자 반항이 아닌가. 아이사처럼 향수와 향유로 몸을 한껏 꾸며도 모자랄 판국에…. 그러나 상황은 남작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후후후, 재밌군."

남작을 제외한 세 명의 남자들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눈동자에 이채를 띠었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원한건 강인한 여자 검투사지, 창녀가 아니었다. 아리스는 의도치 않게 그들이 원하는 완벽한 상태로 온 것이 돼버렸다.

게다가 딱히 추레하다는 느낌도 없었다. 땀냄새라지만 여자의 것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아리스가 체향을 타고나서 그런지 묘하게 남자를 홀리는 향이 느껴졌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도 꾸준한 신체 단련으로 인해 잘 발달된 여체가 부각되어 특별한 매력을 뽐냈다. 특히 2왕자가 관심을 보였는데, 아이사를 주무르던 왕자는 어느새 그녀는 뒷전으로 두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외날검이구나. 계집아이야,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왕자는 거만하고 강인한 말투로 물었다. 아리스는 가볍게 목례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실력이 굉장한 사람 둘을 호위로 두고 있으시니 높은 분이시겠죠. 다만, 취향은 좀 독특하시군요. 여자를 거의 벌거벗기면서 칼을 차게 하다니. 이렇게 입고 나오긴 처음입니다."

"큭큭, 소문대로 제법 자존심이 있구나. 좋아, 난 예전부터 마냥 좋다고 달려드는 계집보단 좀 튕기는 계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턴 제법 싸움 좀 한다고 이름 날린 계집들만 찾게 되더구나."

왕자의 때아닌 취향 고백에 뒤에 있던 아이사의 표정이 살짝 안 좋아졌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리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왕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저를 취하실 건지요."

"글쎄…."

왕자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처형대장 쪽을 보았다. 처형대장이 비릿한 미소를 보이자 왕자 역시 위엄보다는 비열함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한쪽에선 수호대장이 표정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무덤덤하게 상황을 관조하던 아리스의 몸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이내, 왕자가 다리를 꼬고 턱을 괴면서 오만하게 일렀다.

"일단. 내 눈을 만족시킬만한 수준인지… 실력을 좀 보자꾸나."

"흐압!"

그 말과 동시에 처형대장이 기합을 내지르며 크게 도약했다. 그는 도움닫기는 커녕 준비동작 하나 없이 순식간에 아리스의 앞에 착지했다. 한 번의 도약임에도 아리스는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난 자다. 적어도 나보단 몇 수 위….'

처형대장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리스는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아까 크레스트 남작도 그렇고, 눈앞의 남자도 타락한 오빠를 연상시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좀 달랐다. 장남은  두 합으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의 차이가 컸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어쩌면 손도 못쓰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형대장의 기세가 압도적이었다.

"수호대장."

왕자가 수호대장을 부르자, 그가 무언가를 처형대장에게 던졌다.


'봉?'

동대륙에서나 보던 무기가 처형대장의 손에 잡혔다. 아기 손목만한 두께에 길이는 아리스의 외날검보다 조금 더 길었고, 소리를 들어보니 속이 비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딱 봐도 둔기 치고는 살상력이 약했다. 아마 진압용이거나, 사망할 걱정 없이 마음껏 두드려패는 용도의…  썩 좋지 않은 용도의 무기였다.

"크, 볼수록 내 취향인 아가씨군. 아가씨께서 꼴릿하게 벗고 계시니 나도 벗어주는게 예의겠지!"

그가 호위용으로 입고 있던 경갑을 과격하게 벗어던졌다. 옷을 벗는 단순한 동작임에도 깔끔하고 빈틈이 없었다. 순식간에 드러난 그의 탄탄한 근육질 몸은 우락부락하다기보단 민첩하게 압축된 느낌이었다. 곱게 자라지 않았다고 자랑하듯 흉터가 이곳저곳에 있었고, 유일하게 입은 속옷 안에 있는 물건이 터질 듯이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이거….'

아리스가 곁눈질로 황자 쪽을 보았다. 처형대장의 어깨 너머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뭔가 뒤틀린 욕구로 가득했다. 여자가 넘치고 넘치니 취향이 이상한 쪽으로 발전한 건가. 언제든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짐승들이 군침을 뚝뚝 흘리는 듯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 시작해라."

아리스는 제대로 된 무기보다 더 불길하게 느껴지는처형대장의 봉에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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