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1. 아리스, 한 아리 (7)
….
퍽퍽, 퍽퍽퍽, 타악. 그가 몸 안을 들락날락거리던 육봉을 최대한 밀어넣었다. 익숙한 감각이다. 자궁 안에 뿌려지는 정액의 불쾌한 뜨뜻함을 느끼며, 아리스의 눈빛이 탁해졌다.
마치 진흙탕에서 뒹구는 느낌이었다.
'진흙탕이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버린 자신의 고향, 연 가문이 떠올랐다.
연꽃. 천민 출신의 전쟁 영웅이었던 초대 가주가 진흙탕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 꽃을 가문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직접 교육에 나선 가주, 아버지에게 가문의 역사를 배울 때, 연꽃이 되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부조리하고 더러워서, 마치 진흙탕을 보는 것 같다고. 그러나 너는 그런 진흙탕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이 되라고….
'아버지….'
아리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고향의 정원에 예쁘게 피어있던 연꽃이 떠올랐다. 추억 속의 연꽃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마치 시궁창 속에 빠져있는 아리스를 비웃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저는… 저는….'
"하, 눈물이라…. 실력도미약한데 마음까지 약하다니. 결국 너도 한낱 계집에 불과하구나. 흥이 좀 식는군."
왕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리스의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입가에 희뿌연 액체가 묻어 있는 아이사를 물리고 다시금 거만하게 다리를 꼰 왕자가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대단한 연 가문의 아가씨라길래 기대했지만, 역시 환상은 환상일 뿐인가."
아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콜로세움 마스터도 몰랐던 것을! 그가 자신의 정보력으로 알아낸건지, 아니면 사실 콜로세움 마스터가 알고 있어서 그 정보를 전해준건지….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기야, 수준 낮은 오라비와 그 패거리에게 강간당할 정도니.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아리스의 눈이 더없이 크게 뜨였으나, 이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흑요석처럼 세련된 빛을 머금고 있던 검은 눈동자가, 마치 칼에 급소를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를 잃어갔다.
마치 박제된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들은, 이 방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그녀의 더럽혀진 인생을 낱낱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미 나신이었지만, 그러고도 한 번 더 발가벗겨지는 듯한 수치심이 몰려왔다.
자신을 지탱하던 끈이 툭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그저….
'죽고 싶어.'
아리스의 눈이 완전히 죽어가기 직전, 이변이 일어났다.
콰과광!
….
아리스가 정신을 차렸을 땐,사실상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처형대장과 수호대장을 처치한 붉은 머리의 사내를 비로소 인식했고, 무너진 천장으로 뒤이어 들어오는 세 명의 예쁜 여자들을 멍하니 보았다.
채앵.
저만치에서 아리스의 검이 날아와, 정확히 주인의 앞에 착지했다.
"…아."
아리스가 초점을 되찾고 고개를 들자 붉은 머리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매력적인 홍안을 직시하자, 그녀는 내심 부끄러움을 느꼈다. 알몸으로 무방비하게 맨가슴이나, 희뿌연 정액이 흘러내리는 비부를 보여서가 아니다. 아리스는 그의 붉은 눈에 새겨진 수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그를 돌파한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존경심이 드는 듯한,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자 했던, 스스로 불꽃을 꺼뜨리고자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눈앞의 남자의 강인함에 이끌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네?"
그는 자기 발 밑에 깔린 왕자를 신발코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왕자는 어느새 그 광기와 오만함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저 겁에 질려 벌벌 떨 뿐이었다.
"하."
아리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넘볼 수 없었던, 태산처럼 높게만 보였던 그가 너무나도 한심하게 보였다. 장차 한 나라를 다스릴 지고한 위치에 있으면 힘으로 굴복당할 순 있어도 마음만은 꺾이지 않아야지 않는가. 발길질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바짝 엎드리다니, 도대체 뭐하는 추태인가.
….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비판적으로 생각했으나, 자신 또한 방금 전까지 그러한 꼴을 했으므로. 누가 누구를 뭐라는 거야.
붉은 머리 사내는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택해라."
"네?"
"그 검, 네 거 아냐? 손을 뻗어 되찾던가, 아니면 잃어버린 셈치고 포기하던가."
그는 모든 것을 안다는 투로 말했다.
검은 아리스 연의 인생을 함께했다. 몸이 다 성장하기도 전부터 검에 미쳐 살았다. 검에 웃고 검에 울었다.
가족, 고향, 신분, 추억, 존엄, 자유…. 하나만 잃어도 인생의 큰 손실인데, 아리스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남은 것은 상처받은 마음과 더럽혀진 몸, 그리고 조금씩 낡아가는눈앞의 검이 전부였다.
남은 것들은 초라하지만, 이마저도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불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탁했던 눈동자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붉은 눈을 마주보던 아리스가, 거침없이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
그때의 기억이 저 먼 뒤편으로 밀릴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났다. 그때의 붉은 구원자와 인연을 맺고, 그의 여인들과도 친자매처럼 지내게 됐으며, 현재는 정인의 고향으로 차원 이동하여 같이 살고 있다. 마왕의 저주를 받아 다른 남자들과 몸을 섞는 해괴한 일상을 보내고는 있지만, 아리스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매 순간마다 확신하고 있다. 용사의 여자가 된 이후로, 골치 아픈 일은 있어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후후."
아리스가 손을 뻗어 용사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녀는 용사와 같은 침대에 누워서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몸은 섞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게 아니라, 아주 가끔씩은 이렇게 플라토닉한 잠자리를 갖는다. 둘 다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아서 맨살이 닿았고, 이제까지 해온 짓이 있기에 조건 반사적으로 몸이 살짝 달아올랐지만 둘 다 성욕보다는 순수한 사랑에 집중했다.
"내일 떠나?"
용사가 물었다. 용사의 침실 구석에는 아리스의 짐이 가득 담긴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아리스의 느닷없는 가출은 아니었다. 이미 미라와 지나는 짐을 싸고 떠난 상태였다. 처음엔 아무리 저주가 진화했다고 쳐도 너무 극단적인 행동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정인이 네토를 좋아한다고 쳐도, 짐을 싸서 며칠이 될지 몇주가 될지 아니면 몇달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는 것은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미라가 나가자, 시간이 갈수록 음습한 욕망과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용사의 눈동자를 보고 아리스도 생각을 바꿨다. 일종의 사랑 표현의 경쟁이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너무나도 사랑해서 이런 것까지 해줄 수 있다는 어필이다. 덤으로 자신의 성욕도 채울 수 있으니, 이건 도저히 안 할 수가 없잖는가.
핸드폰으로 '녀석'과 나눈 톡을 보여줬다. 학생 주제에 순진한척 위아래로 몸매를 훑어보던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애 특유의 순수함과 끈적한 본능이 혼재된 분위기가 나름 새로웠다.
녀석이 마음에 든 이유는 그런 분위기와 더불어 집안 사정이 좋아서였다. 편부 가정인 데다가 유일한 어른인 아버지는 해외 지사로 발령받아 외국에서 몇 년째 장기 체류 중이었고, 하나 있는 누나는 삐딱선을 타서 친구들과 바깥으로 나돌아 몇 달에 한 번 집에 올까 말까였다. 용사의 집 만큼이나 널따란 단독주택에 녀석 혼자 살고 있다. 귀찮은 일에 엮일 일이 없었다.
아리스는 합격점을 부여한 그 소년을 선택했다.
"사랑해."
"저도요."
둘의 눈빛은 비록 뒤틀린 욕망을 품고는 있어도,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사랑 역시 머금고 있었다. 잠시 몸은 떨어져 있겠지만, 그걸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커다란 흥분이 찾아오리라고, 그리고 그만큼 사랑 역시 더더욱 깊어지리라고 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