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4-1. 아리스, 한 아리 (10) (49/162)



〈 49화 〉#4-1. 아리스, 한 아리 (10)

"누나. 선물이에요."

여느 때처럼 하교한 성민이 내민 것은, 베개 하나 크기의 갈색 곰인형이었다.

"으응? 하하,  나이에 곰인형을  받아보네."

"귀엽잖아요. 누나 방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누나 방은 깔끔해서 좋긴 한데  허전해 보였거든요."

아리는 약간 민망해 하면서도 결국 웃으면서 고맙게 받았다. 성민의 은근히 번들거리는 눈빛만 봐도 순수한 호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치의 틈도 보여선 안 되는 냉혹한 판타지 세계나 오로지 살기를 뿌려대는 적군 뿐이던 마계와는 다르게 이곳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도 당장 보복을 당하지 않다보니 다들 느슨하고 허술했다. 눈빛만 봐도 심리를 얼추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조금 가소롭기도 하고, 슬슬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나 싶어 묘한 긴장감도 들었다. 그러나.

두근.


그와 동시에, 기대도 됐다. 생각보다 애가 착하게 굴어서 조금 자극적으로 나갔더니, 최근 들어 계속 번민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 녀석의 눈동자는 어둡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그 눈빛이야. 자신을 숨기고, 상대를 방심시켜. 무방비한 먹잇감의 목덜미에 단숨에 이빨을 박아넣으란 말이야.

찰나의 순간 동안, 성민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깊고 어둡고 음습한 욕망이 아리스의 눈동자에 드러났다. 그러나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서 성민은 눈을 마주보고 있었음에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가설이 하나 있다. [씨받이] 스킬이, 여자들로 하여금 다소 피학적인 성향을 갖게 했다는 추측이다. 정확히 말하면 약자의 입장에서 짓눌리거나 억압당하거나, 음학하게 짓밟히는 것에 흥분한다는 것이다. 스킬로 인해 없었던 성향이 생긴 건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던 잠재적 성향을 수면 위로 이끌어낸 건지는 모른다. 둘  뭐든 간에 인과 관계는 확실했다. 직접 겪어본 용사의 다섯 여자가 그 증거였다.

그나마 건전한 편인 미라는 남자의 요구에 마지못해 어울려주는 성향이 있다. 워낙 취향이 소프트한 탓에 정액을 먹어주거나 애널 섹스를 해주거나 하는게 대부분이었지만.


지나는 태생적으로 화끈하서 돌림빵은 기본에 속박 플레이까지 정말 제대로 즐긴다. 그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기보다 적어도 두 배는 넘는 무거운 덩치에게 온몸이 깔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강한 압박을 느끼며 범해지는 것이다. 그녀와 자주 어울리는 '회장'도 커다란 덩치고, 저번 온천 여행에서 놀았던 '파파'와도 같은 짓을 했다.


레이아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솔직해져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온천 여행에서 결박 플레이나 볼개그 같은 것도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 자질은 매우 충분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유망주였다.


델렌은 대놓고 마조다. 정확히는 서브미시브라는,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 노예 역할에,  복종하는 것에 흥분하는 취향이긴 한데, 마조 성향도 은근히 있어서 너무 강하진 않은 선에서 마조 플레이도 즐긴다고 한다.

아리스는 애초에 [외강내유]이다. [씨받이]가 없더라도 남자의 강요로 시작된 관계에 넘어가서 쾌감을 느낀다. 거기에 더해서, 성적으로 괴롭힘 당하는것을 좀 좋아한다. 페니스와 바이브레이터로양 구멍을 당한다거나, 유두를 집요하게 희롱한다거나, 클리를 마구 자극당한다거나. 그녀는 물론 더없이 음탕하지만, 특히나 유두나 클리처럼 예민한 돌기를 자극당하는 것에 약했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관계에서 더 흥분한다.


….


'좋아. 언제든지 오렴.'

성민을 자극하면서 귀여운 반응을 지켜보는건 솔직히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러나, 슬슬 본 게임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공존했다. 언제까지 간질거리는 애무만  순 없잖는가. 여자 입장에서야 진득한 애무가 기분 좋긴 하지만, 너는 괜찮겠니?

아리는 어둡고도 화사하게 웃으면서 순수악에 잡아먹힌 소년이 선물한, 독초로 가득한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인형의  부분에 실밥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역 시절에 가장 예리한 눈썰미를 보였던 아리의 눈에는 그 흔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니 직접 했을 것이고, 꼬마가 제 아무리 꼼꼼해봤자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마나 유저의 예리한 감각은 곰인형의 양쪽 눈이 서로 다른 빛을 내는 것을 감지했다. 한쪽은 검정색 콩처럼 생긴 값싼 인형눈이다. 그리고 묘하게 반짝거리는 다른 한쪽은, 마치 기계의 눈… 렌즈 같았다. 아리는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각하고는 표정을 관리했다.


"…누나?"

"어?"

"마음에 들어요? 혹시 귀여운거  좋아하는…."

우물쭈물거리는 성민에게 아리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응? 아, 마음에 들어. 책상에 놔두면 괜찮을 것 같아."

"오, 괜찮은 생각이네요. 제가 갖다둘게요?"

"그럴 필요까진 없긴 한데, 그래도 해주면 나야 고맙지."

성민이 아리의 방에 들어가 책상에 곰인형을 놓았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던 아리가 짓궂게 한마디 했다.

"좋은 자리에  놨네. 얘는 내 방을  볼 수 있겠어. 음,난 이제 이 녀석한테 하루 종일 감시 당하는 건가?"

그 말에 성민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연기력이 너무 형편없잖아. 녀석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티가 났다고 느꼈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횡설수설했다.


"하, 하하…. 농담도 참…. 누나 혹시 그런 건가요? 왜, 사람들 중에 그거 있잖아요. 인형 눈이 사람 눈처럼 느껴진다던가. 그래서 막 불편하다던가…. 그, 그런거 아니죠?"

"에이, 아냐. 농담인데 왜 그렇게 당황해? 정말 맘에 든다니까. 사실 내가 평생 인형을 방에 놔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좀 낯선 것 뿐이야."

"아, 아하…. 하하…."

 이상 있으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거라 판단한 성민은 서둘러 방을 나왔다.

"숙녀 방에 너무 오래 있었네요. 나가볼게요."

"응. 선물 고마워."

아리는 방문까지 걸어가 성민에게 짧은 배웅을 해준 후,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쿵, 쿵.


판타지 세계에서 용사와 함께하기를 선택하고 지구로 넘어왔다. 그 대가로 용사를 포함한 모든 여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스킬들을 대부분 잃어야만 했다. 처음엔 다들 많이 불안해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목숨을 내걸고 싸워왔던 치열한 일상이 익숙했기에,가진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가지 않아 그런 불안은 사라졌다. 용사의 고향은 여러 종교에서 묘사되는 낙원과도 같은 평화로운 세계라는 것을 몸으로 직접 체감하였고, 전투라는 숫돌에 날카롭게 벼려진  같았던 그들의 몸은 빠르게 무뎌져 갔다.


그러나 마나 유저로서의 힘은 그대로였기에 그들은 지구에서도 여전히 초인 반열에 이른 존재였다. 마나의 농도는 심각할 정도로 낮았지만, 대신 마나 유저가 아예 없는 세상이었기에 오히려 더 좋았다. 마나가 풍부한 것 이상으로 괴물 같은 마나 유저가 많았던 판타지 세계는 비유하자면 흙탕물이 흐르는 갠지스 강이고, 지구는 적당한 크기의 깨끗한 하천이다. 용사 파티는 스킬 유저로서의 힘을 대부분 잃은 대신 마나 유저로서의 힘과 효율이 더 상승한 것이다.

'계속 방에 있네. 컴퓨터를 하는 건가?'

아리는 눈을 감고 마나 운용에 집중하면서 성민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일종의 초감각이었다.땅을 내딛는 발걸음의진동,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미약한 바람, 신체의 발열 등이 그대로 아리의 감각에 전달되고 있었다.

사실 초감각은 만능이 아니다. 이렇게 가만히 집중해야 하고,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중간에 끼어드는 무수히 많은 감각 신호 때문에 제대로 탐지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성민과 자신의 방은 큰 걸음으로 네다섯 걸음 정도만 걸어가면 될 정도로 짧은 거리였다. 굳이 초감각을 동원할 필요 없이 청각에만 집중해도 어지간한 사생활은 손쉽게 침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굳이 초감각을 동원하는 이유는 성민의 보물창고를 찾기 위함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곰인형의 눈이 담아낸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출력하느냐가 궁금했던 것이다. 결과는 예상대로 컴퓨터였다. 평소에는 아리에게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거실로 나와서 말을 걸고 괜히 잘 보지도 않는 TV를 같이 보기도 하던 녀석이 몇십 분째 컴퓨터에 열중한다. 그게 의미하는건 하나였다.

'흠.'

서비스를  해줄까.

아리가 생각했다. 성민은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소심한 태도로 욕망에 충실했다. 이제는 순수악에 물들어 치사하고도 귀여운 짓을 한다. 기특하게도 생각대로 움직여주니, 계속 그렇게 할  있도록 상을 줘서 동기 부여를 시켜주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이 집은 왠지 좀 덥다니까."

초겨울 수준의 날씨임에도 한여름 만큼이나 시원하게 입은 아리가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고작 가슴과 배만 가려주던 상의를 벗었고, 이내 검은색 돌핀 팬츠도 끌어내렸다. 그녀의 몸에 남은 것은 도화지처럼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연분홍색 속옷이 전부였다. 내심 궁금해져서 초감각을 다시 활성화하니 저쪽 방에서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감지되었다. 속으로 피식 웃은 아리는 초감각을 거두며 좀 더 대담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톳, 톳, 톳….

깃털처럼 가볍게 내딛는 아리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몇 번 일어난다. 텅 빈 책상 한구석을 차지한 곰인형에게로 다가간 아리는 곰인형을 꼬옥 품에 안아 들고 쪽 소리나게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하음, 피곤해. 잠깐 잘까…. 너도 같이 잘래?"

그렇게 말하며 베개 크기의 곰인형을 침대 옆자리에 눕힌다. 그리고는 사계절용 이불을 덮다가 답답하다는 듯이 도로 걷어낸다.

"아으, 덥고 답답해. 내가 원래 이렇게 몸에 열이 많았나."

이불을 구석으로 막 구겨넣던 아리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옆으로 마주 누운 인형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따뜻하지? 후후,  자."

맨몸에 속옷 차림으로 누운 아리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방 안에는 여자의 작고 고른 숨소리가 나긋이 퍼졌다.

곰인형은 옆으로 누워 잠든 아리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누워서, 그녀를 마주 보며 한쪽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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