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4-1. 아리스, 한 아리 (12) (51/162)



〈 51화 〉#4-1. 아리스, 한 아리 (12)

때아닌 짧은 방학이 시작됐다. 담임이 말하기론 중동에 여행갔다 왔던 1학년 학생 한 명이 전염병 의심 환자로 지목되어 학교 측에서 재빨리 휴업령을 내렸단다. 학생들은 불안해하는 한편 갑자기 찾아온 짧은 방학에 철없이 좋아하기도 했는데, 휴교랑 휴업은 다르고 이번에 쉬는 일수 만큼 방학이 깎인다는 사실을 알자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병의 잠복기가 최대 2주일이어서, 학교에선 휴업의 기간을 15일로 정했다. 양성 판정이 나오고, 학교에서 또다른 의심 환자가 나오면 휴업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건 선생님 말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병 자체가 과거에 나라를 떠들석하게 했던  병에 비해 훨씬 약한 병이고, 노인이나 병을 앓아 몸이 약해진 사람에게 위험할 가능성이 '조오금' 있다 뿐이지 대부분은 감기처럼 조금 앓다가 금방 낫는단다. 게다가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소독도 하고 있었고 학생들에게 손 소독제도 나눠줬으므로 전염 걱정도 별로 없단다. 게다가 몇 년 전에 겪어봤기에 백신도  갖춰져 있다고.

외부에서 전문가까지 찾아와서 교내 방송으로 안심을 시켜서인지 혼란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갑작스레 찾아온 짧은 방학에 기뻐해야 할지 겨울 방학이 줄어서 슬퍼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애들이  많았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의심 환자는 음성 반응이 나왔고, 일련의 소동은 다행히도 15일의 가을 방학이라는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


성민은 휴업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한 여학생을 찾아갔다. 아리 누나에게 수면제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마침 아는 애 중에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달고 사는 애가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 애가 성민의  여자친구라는게 문제였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여자 쪽의 잘못으로 헤어졌기에 먼저 말을 거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자, 여기…."

그녀가 건넨 것은 자기가 복용하던 수면제 3회분이었다. 본인이 복용하던걸 가져왔는지 10개 중 7개가 비어있었다. 성민은 별 반응 없이 그걸 받아들었다. 지금이야 시간이  흘렀고 아리 누나라는 훨씬 큰 관심사가 생겨서 상대적으로 덤덤하긴 한데, 사귈때 했던  썅년짓이 그리 쉽게 용서되는 건 아니었다.


"성민아, 그…."

"고마워."

성민은 예의상의 감사를 표하고  돌아섰다. 다소 미련이 남아 보였던 여자애는 다급한 마음에 성민의 팔을 붙잡았지만,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뿌리치는 냉정한 행동에 움찔거렸다. 그는 그저 약이 필요했을 뿐이지 여자를 용서한게 아니었다.

"서, 성민아!"

"…왜."

성민은 짜증난다는 기색으로 숨을  내쉬며 물었다. 들러붙지 말고 좀 떨어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수면제는 왜 필요한거야?"

"수면제가  필요하겠어?"

뻔한 질문에 더 이상 말도 섞기 싫다는 듯한 분위기. 더 이상 붙잡았다가는 험한 욕설이라도 들을 것 같아서 여자애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미련에, 점점 멀어지는 성민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나! 언제라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치 일본 순정만화 같은 대사였다. 성민은 지랄한다, 병신년. 하고 무시하며 갈 길을 갔다. 감흥조차 없었고, 그저  썅년과 집에 있는 여신님이 같은 종족, 같은 성별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아, 성민아. 표정 좀 풀어라."

"이새끼 여친이랑 동거한다니까. 백프로다 진짜. 그러니까 집에 못 오게 하지."

성민은 뜨끔했으나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오히려 화를 냈다.

"이 씹쓰레기들아, 니새끼들이 존나 어질러놓고,  더럽게 존나 흘리면서 처먹고, 처먹은거 바닥에다  토하고, 그 지랄을 해놓고! 양심도 없냐 개새들아. 솔직히 이쯤 참았으면 많이 참아준거 아니냐? 앙?"

지금 성민이 있는 곳은 친구 집이었다. 평일 오전에 때아닌 방학이 시작돼서 그런지 집이 빈 애들이 많았고, 그 빈집들 중 하나로 가서 점심도 먹기 전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성민은 친구 무리 중에서 은근히 머리 노릇을 해왔는데, 이제까지 본의 아니게 물주 노릇을 해서 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성민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큰 관심을 갖진 않았지만, 작은 사업이나마 성공해서 그런지 돈 하나만큼은 잘 보내줬다. 일개 학생이 쓰기엔 너무 많은 돈인 데다가 집 나가서 연락도  하는 누나년의 몫까지 받고 있어서 성민의 씀씀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널따란 2층짜리 단독주택까지 항상 쓰게 해줬으니 자연스럽게 입지가 높아진 것이다. 축구공만 가지고 다녀도 친구들이 몰려드는 나이대이니, 또래 답지 않은 물주로서의 능력에 더해서 성격도 좋고 외모도 준수하며 놀기도 좋아하는 성민은 자연스럽게 리더가 됐다.

그런 이유로, 뜬금없는 가을 방학식을 한 직후 친구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성민이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좀….' 하면서 거절하는 성민의 양팔을 잡고 오토바이에 앉혀서 그대로 출발하니, 사실상 강제로 끌려온 셈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이 양심은 있는지 이제까지 신세  성민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공간도 친구들끼리 상의해서 정하고, 술이나 안주 등  들어가는 일도 성민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대접해줄테니 몸만 오라는 친구들의 배려에, 성민도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솔직한 속마음은, 지금 이상하게 굴면 의심받을테니 얌전히 있자는 작전이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집을 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이면 진짜로 동거하는 여자가 있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술이나 마시지 뭐.'

은근히 마인드 컨트롤 능력이 뛰어난 성민은, 조급해하는 대신 지금 얻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나마 챙겨가기로 했다.

"짠!"

 개가 넘는 술잔이 서로 부딪쳤다.





묘하게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쭉 달려서 다들 반쯤 취했을텐데 지금은 뭔가 진지한 느낌이었다. 술을 위해 모인게 아니라 모였으니 술을 곁들이는 듯했다. 딴 생각을 하느라 지나쳤는데, 잘 생각해보니 언제나 몇 명씩은 끼워주던 술자리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없었다. 지금 있는 애들은 전부 성민의 무리에 포함된 애들이었다.


"슬슬 본론을 얘기해야지."

마치 성민의 생각에 답하는 것처럼,  녀석이 주제를 꺼내들었다.

"준식이 얘기?"

애들이 모여서 진지하게 꺼낼만한 대화 주제를 생각하던 성민이 물었다. 정답이었다.


"그래. 우리가 이유 없이 엄한 애들 패고 다니는 일진은 아니지만, 친구가 맞았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준식이.

성민은 저쪽에 있는 골치 아픈 녀석을 떠올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사실 별로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다. 웬일로 안 잤던 국어 수업 시간에 우연히 들었던 사자성어인 호가호위(狐假虎威)가 녀석을 표현할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막상 자기는 싸움도 별로 못하고, 그렇다고 깡이 좋은 것도 아닌 별볼일 없는 녀석인데 성민의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조금씩 나대기 시작했다.

그런 주제에 띠껍게도 자기 포지션을 정말  아는 녀석이기도 했다. 왕따를 괴롭히거나 엄한 애한테 시비를 걸기도 해서 성민과 민성은 준식을  좋아하는데, 친구들 생각은 조금 달랐다. 대놓고 일진 짓을  생각은 없긴 하지만, 성민과 민성은 너무 신사적이어서 오히려 독이 된다는 생각이다. 교내에서도 교칙에 어긋나는 일을 심심찮게 하는 만큼, 적당히 무서워야 다른 애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화장실에서 담배를 핀다던가 할때, 자기들이 만만하면 대놓고 얼굴을 찡그리며 선생한테 쪼르르 달려가 찌른다. 그건 진짜 짜증나는 문제였다. 그런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는 준식은 말하자면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 서열은 정말 확실히 따져서, 약한 애들은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으며 높은 애들에겐 싹싹하고 잘한다. 그래서 친구들은 준식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했고, 다들 그러니 성민이나 민성도 어쩔  없이 준식을 끼워주는 중이었다.


그러던 녀석이 사고를 쳤다. 옆 학교까지 가서 삥을 뜯다가 되려 오지게 얻어맞고 팔에 깁스까지 했다. 일단은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축구하다 다쳤다고 둘러댔지만, 가만히 넘어갈 순 없었다. 친구가 맞고 왔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게다가 준식의 말에 의하면 삥을 뜯으려던 애한테 맞은게 아니라, 걔가 부른 다른 녀석들 여럿에게 밟혔다고 한다.

성민의 무리는 애매하고 묘했다. 동물로 비유하자면 박쥐고, 속담에 비유하자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자기들 입으로 일진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진이기도 했다. 하는 행동은 오토바이로 드라이브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고 술판을 벌이는 일탈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준식의 개짓거리를 방조하는 것처럼 적절하게 폭력도 쓸 줄 안다. 그러니 친구가 일대일로 싸우다 맞은 것도 아니고, 여럿에게 린치를 당했으니 돌려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 금요일에 할까?"

"주말은 좀 그렇고 평일이 낫지."

"우리 학교만 휴업이니까 시간 짜긴 좋네."

….

그렇게 술 담배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모처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타겟은 준식이가 처음에 노렸던, 준식의 말에 의하면 범생이처럼 만만하게 생긴 녀석이다. 하기야 돈을 뜯는 건데 만만한 녀석을 노리겠지. 근데 그런 만만한 녀석이 알고 보니 좀 노는 놈이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동떨어진 성민은 친구들이 알아서 작당모의를 하는 걸 보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일이 자기 손을 떠난 것처럼 느껴졌기에, 개인의 관심사로 의식이 흘러간 것이다.

'아리 누나.'

술이 뱃속으로 들어갔음에도 아리를 떠올리자 정신이 선명해진다. 이제는 정말 헷갈린다. 태양빛 같은 여신인지 유혹의 악마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면제는 선을 넘었다. 속옷이나 맨살을 보여주거나, 몸을 밀착해오거나, 등에 로션을 발라주는건 백번 양보해서 예쁜 여자가  수 있는 끼부리기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 내가 이상한 건가.'

어쩌면 진짜로 피곤한 걸지도 모른다. 수면 부족은 사람을 예민하게, 혹은 지치게 만드니까. 만성 불면증인  여친 덕분에 충분한 숙면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성민은 아주 잘 알고있었다. 걔가 본성이 나쁜 애는 아닌데, 피곤할 때마다 했던 온갖 개지랄과 썅년짓을 떠올려보면….

'미치겠네.'

확신할만한 단서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누나에게 있어 무엇인가. 지낼 곳을 마련해주고 밥도 해주니 적당한 수위로 서비스를 해주는 건가. 아니면 팔팔한 남자애랑 적당한 성적 긴장감을 주고 받으면서 심심풀이라도 하는 걸까.

애초에 아리라는 여자를 모른다. 그렇게나 예쁜데 소문도 들어 본 적이 없고, 하는 일이라곤 남의 집구석에서 뒹굴거리는게 전부이지만, 그게 그녀의 전부라는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갑작스레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불안감에 속이 타서 안절부절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마치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듯이 태연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녀를 집에 들이고서,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절대 욕심 부리지 않겠다고. 나아가더라도 안전하게. 괜히 서둘렀다가 모든 것을 날려버리지 않도록.

그러나….

이쯤 되면 참을만큼 참지 않았나.


"그래."

때가 왔다. 이제는 확인을 해야겠다. 마침 수면제도 건네줄텐데, 상황이 영 안 좋게 흘러가면…. 정말 미안하지만,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천사가 될지 악마가 될지는, 누나가 정하는 겁니다?

욕망에서 비롯된 순수악으로 짙게 물든 성민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오케이."

"응?"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뭔가 싶어서 분위기를 읽어보니, 모든 것이 결정된 분위기였다.

"봐. 성민이도 친구가 맞았는데 가만히 있진 않잖아. 이 새끼야, 친구를 의심하냐?"

"아니, 내 말이 그런게 아니잖냐. 아무튼 성민아. 우리가 알아서 할게.  친구 일이니까 내가 직접 해야지. 전부 다 우르르 몰려가는게 오히려 가오가 상할걸."

"맞는 말이야. 그 새끼 친구들까지 밟아줄 정도로만 가자. 다섯이면 되려나?"

"준식이는 팔 못 쓰니까 한 명 더 데려가자."

아하.


요컨대, 녀석들은 작당모의를 얼추 마무리 지으면서 나름 리더 역할인 성민의 동의를 구한 것이었다. 성민은 자신을 그저 물주라고만 생각하긴 했지만, 원래 물주가 발언권이 센 법이다. 생각하던 것이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그게 묘하게 아다리가 맞아서 이렇게 됐군.


'뭐, 알아서 하겠지.'

성민은 싸움을 못하진 않지만 폭력을 멀리하는 성격이었고,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니 그쪽 일은 이제 신경 끄기로 했다.

….

멀지 않은 미래에 그는, 지금 했던 이 무심한 생각을, 아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피를 토하며 후회했다.' 라는 문구가 어울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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