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4-1. 아리스, 한 아리 (18)
결국은, 아리를 어쩔 수 없었다. 수상하게 행동하면 더 수상해진다. 이제껏 충분히 수상했으니, 지금이라도 실책을 면해야 한다. 성민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허락을 했다.
'제발, 제발.'
성민이 생각하기에, 지금 서로의 관계는 더없이 좋았다.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곰인형 몰카를 들킨다면…. 그것보다 분위기가 싸해질 수 없을 것이다.
위이잉….
컴퓨터가 소리를 내며 켜지고, 이내 화면이 켜지며 비밀번호를 요구했다. 알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아리는, 마치 음식점에서 종업원이 세팅하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는 손님처럼, 마냥 순진한 얼굴로 성민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기다리는게 심심했는지 의자 팔걸이를 가벼운 리듬으로 타닥타닥 두들겼는데, 성민은 그 소리가 마치 전쟁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무겁고 장엄하게 들렸다.
'제발, 제발, 제발….'
띠리링 띠딩.
윈도우가 켜지고, 바탕화면이 출력된다. 기본 윈도우 배경에, 컴퓨터에 기본적으로 설치된 파일과 성민이 따로 놓은 폴더. 그리고 문제의 그 동영상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와 씨발 누나 진짜 존나 꼴리네.avi]
'미친, 왜 또 제목을 저따위로….'
성민은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과거의 자신이 한 짓이었기에 화도 못 내고 안절부절하며 아리의 행동을 지켜봤다. 아리는 별 표정 없이 마우스를 딸깍거렸는데, 위기의 상황에서 잠시나마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진 성민은 객관성을 되찾은 시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누나, 생각보다 차가운 인상이구나.
정확히는 건조한 인상이었다. 막 철벽을 치고 있진 않지만, 딱히 주변에 관심도 없어 보이는. 수많은 닭들 사이에 홀로 고고이 선 학 같기도 하고, 반대로 숲에 나무를 숨기듯 군중 속에 뒤섞여 자신을 감추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건 평범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이제까지의 일을 떠올려보면 평범하다는 말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았다.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플 정도였다.
"와, 진짜 야동이 있구나. 남자애들은 바탕화면에 막 놔두네. 어… 근데, 제목이 좀…."
"느헉."
괜히 다른 생각을 성민은 사레가 들릴 뻔했다. 가까스로 진정하고, 그 동영상 파일로 향하는 마우스를 막았다. 손목이 잡힌 아리는 다 안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괜찮다고 했으나, 성민은 절대 괜찮지 않다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에이, 확인만 해볼게. 그냥 궁금해서 그래."
"진짜, 진짜 안 돼요. 누나…."
"에이, 잠깐만 본다니까."
….
그렇게 잠깐의 실랑이가 있었다. 결국은, 성민의 패배였다. 팔까지 꽉 잡아서만류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아리가 눈에 띄게 섭섭해 하면서 표정마저 점점 굳어졌는데, 그녀의 감정 상한 얼굴을 보고 성민은 패배를 직감했다. 어떻게 이런 관계가 됐는데…. 그녀의 차갑고 건조한 표정을, 이제는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러다가 관계가 소원해지든, 아니면 동영상을 들켜서 멀어지든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어차피 게임 오버인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누나가 동영상을 보고 용서해준다는 그 작은 희망에 배팅하는게 맞다고 성민은 판단했다.
딸깍. 딸깍.
"흐응, 얼마나 야하길래 이러는 걸까…."
"하아, 누나. 한 가지만 약속해줘요."
"응?"
동영상 플레이어가 켜지고, 영상을 로딩한다. 컴퓨터의 성능이 썩 좋지 않아서, 세 시간이 넘는 고화질 동영상을 불러오는데 은근히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성민이 애원하는 심정으로 아리에게 부탁했다.
"이거 보고 나서, 적어도 말은 해줘요."
"응? 무슨 뜻이야?"
순진하게 큰 눈을 깜빡이는 아리에게, 성민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더라도, 막 입 다물고 있거나 그냥 나가버리진 말라고요…."
"에이, 뭐야. 난 사람 취향 가지고 뭐라 안 그래. 어우, 근데 좀 무섭다. 얼마나 엄청난 야동이길래…. 일단보고 생각해볼게."
"하하…."
아리는 걱정 말라며 손을 내저었으나, 성민은 이젠 될대로 되라는 듯이 뒤로 물러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일이 재생되고, 익숙한 장소와 익숙한 사람이 등장한다.
속옷만 입고 잠든 자신의 모습.
아리는 심상치 않은 상황을 인식하고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진 않았으나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
….
성민은 마치 벌을 서는 기분으로, 어느새 벗은 몸에서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동영상 자체는 아리의 자는 모습이 전부여서, 비슷한 내용이 지속될 뿐이었다. 그러자 아리는 말없이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세 시간 쯤 되는 영상의 중간중간 부분을 클릭하여 빠르게 영상 전체를 확인했다.
….
침묵이 이어졌다. 아리는 마우스를 움직여 동영상을 껐고, 이내 입을 열었다.
"성민아."
"……."
"야."
"…네."
학교에서 빡센 선생한테 기합을 받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민은 벌벌 떠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고개 들어봐."
"…죄송합니다."
"하."
고개를 들자, 별 표정 없는 아리의 눈과 마주보게 됐다.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으나, 아리가 한 번 더 부르니 더 이상 시선도 피하지 못하게 됐다. 오늘따라 뼈저리게 느끼는, 아리의 무표정의 무서움. 성민은 심정적으로 바짝 움츠러들어서, 하루 종일 흉흉하게 서있던 자지조차 조그맣게 쪼그라든 채로, 그렇게 불쌍한 모습으로 풀죽어 있었다.
"이리 와."
아리가 손짓하자 성민이 다가갔다. 적어도, 약속대로 말없이 관계가 끝나진 않았다. 작은 희망의 불씨에 아직은 움직일 동력이 있었던 성민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아리의 판결을 기다렸다. 아리는 갑자기 무릎을 꿇자 살짝 당황해 하다가, 성민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요, 요, 요 녀석."
꽈아악!
"끄흐으윽!"
아리가 양손으로 성민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리의 손은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매웠기에, 성민은 진심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건, 순수한 육체적 고통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에휴, 어린 애가 못 하는게 없어."
"죄송합니다…. 으윽…."
정말, 진짜로 아팠던 성민은 사과하면서도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마음 속은, 물에 빠졌다가 다시 건져올려진 것처럼 개운했다. 예상치 못하게 나쁜 짓을 걸렸지만, 너그럽게 용서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것도, 예전에 했던 일이니까 봐줄게. 막 알몸이 찍힌 것도 아니니까."
"헤헤, 고마워요. 누나."
"울다가 웃다가, 너도 참…."
아리는 포기했다는 듯이 실소하며, 다시 엉겨붙으려는 성민을 손과 발로 밀어냈다.
"어쩐지 수상하더라. 내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닌데 곰인형이라니."
"흠흠. 저의 열렬한 사랑이었던 걸로…."
"죽을래?"
성민은 아리가 다시 꼬집으려들자, 진심으로 두려워서 몸을 빼냈다. 둘 다 한 차례 피식한다.
그렇게 분위기는 진정되고, 한 차례의 풍파가 지나가자 분위기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근데, 이게 전부야?"
"네."
"…흐음, 믿기지가 않는데. 이렇게 짐승 같은 애가, 속옷만 보고 만족했다고?"
"그… 속옷만 본건 아니긴 한데. 영상으로 남긴건 이게 전부에요."
대화가 이어졌고, 아리의 질문에 성민은 전부 솔직히 대답했다. 자신의 속옷 차림으로 열 발을 넘게 쌌다는 말을 듣고, 아리가 짐승 보듯 하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외엔 딱히 별일 없었다.
"하아, 내가 야동의 주인공이 될 줄은…."
"헤헤…."
"별 일을 다 겪네. 그치, 성민아?"
말로 한 번 더 꼬집는걸 마지막으로, 아리는 쿨하게 용서해줬다. 용서 후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성민은 여유를 되찾았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를 올리고는 고개를 들었고, 그제서야 아리를 정상적으로 마주볼 수 있었다. 일단 일어섰다. 무릎 꿇은 자세를 너무 오래 했더니 뻐근해서 두둑하는 뼛소리와 으윽하는 신음이 같이 났다. 뻐근한 몸을 일으켜서 의자에 앉은 아리를 내려다보니,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나?"
마음의 빚을 모두 청산한 성민은, 뭔가 묘한 분위기의 아리를 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내뱉었다.
"혹시, 흥분했어요?"
"…."
아리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하, 왜 조용해졌나 했더니. 그녀가 흠칫하자, 성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샤워해서 뽀송뽀송할 터인 가랑이를 기습적으로 훑었다.
"음."
끈적한 액이 묻어나왔다. 방금 샤워한 여자의 가랑이에서 물기도 아니고 끈적한 액이 묻어 나온다는 것은….
성민은, 방금 전까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던 것을 즉시 잊어버리고는 짓궂게 물었다.
"누나, 변태네요?"
"…."
아리는, 말이 없었다.
"흐흐흐."
성민이 건수 잡았다는 듯이 음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