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4-2. 개입 (20) (85/162)



〈 85화 〉#4-2. 개입 (20)

척! 척! 척! 척! 척!

[하앙! 아아앙! 흐앗! 사랑해요! 사랑해요!]

[너 남친 있다면서.]

[아앙, 몰라요! 사랑한다고요!]

[뭐야, 그럼 남친이랑은 헤어질 거야?]

[흐앙! 네! 헤어질게요! 그런 꼬마애 따위, 생각도, 하앙! 나지 않아!]

[그럼 이젠 내가 남친이네. 어때, 기분 좋아?]

[흐윽! 하악! 좋아요! 난 이제 당신 여친이야! 너무, 으응, 너무 행복해!]

[나도 너 마음에 든다. 여기 파티 다 끝나고  집으로 와. 주소 알려줄게.]

[아앙! 흐읏, 읏! 바로, 찾아갈게요! 아응, 어차피 짐도 별로 없으니까…. 아흣! 계속… 같이 살아요… 하아아앙!]

화면 안에서 선남선녀의 격렬한 섹스가 펼쳐졌다. 자세는 대면좌위. 서로 앉은 채로 마주보고 섹스하는 체위. 사랑을 속삭이기 좋은 체위였으며, 다른 사람이 관음하기에도 좋은 체위였다. 색이 짙고 윤기 있어 세련되어 보이는  남색 생머리가 찰랑찰랑, 주인의 몸과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마치 매미처럼 자기 앞의 남자를 팔다리로 꽉 끌어안고 앙앙거리며 하복부에서 올라오는 쾌락에 취해 있었다. 쾌락에 움찔움찔 하면서도 반쯤 실성한 것처럼 목이 쉬어라 남자에게 사랑을 외쳤다. 거의 울부짖는 수준이었다. 동영상  그녀의 머릿속엔 이제 그 남자밖에 없음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툭, 투두둑, 툭….

 남녀의 동영상을 재생하던 핸드폰은 진작에 침대에 떨어져서, 허공에 빛과 소리를 출력하고 있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핸드폰의 주인은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채로 울고 있었다. 어려 보이는 남자의 맨다리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끄윽, 끄으읍!"

"성민아…."

남성민, 그리고 레이아. 방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원인은 여느 때처럼 전송된 영상이었다. 평소 때처럼 그저 섹스 뿐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영상 속 한아리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성민은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외치고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차분한 성격인 그녀가 저렇게 열렬하게 구애하는 모습은 정말 새로웠다. 그 새로운 모습을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고 있다는게 큰 충격이었다.


그들의 대화 역시 화살처럼 날카롭게 소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사실 아리와 성민은 관계가 모호한 면이 있었다. 단순한 섹스 파트너인지, 아니면 진심을 교환하는 연인인 건지. 의외라면 의외로 그녀는 성민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붉은 머리 남자와의 대화에서 성민을 '남자친구'로 언급했으니까. 그러나 그 이후 성민을 버리겠다는 말을 했기에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붉은 머리 남자에게 완전히 넘어가버린 아리의 모습에 성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진정이 되는 건지 아까처럼 흐어어엉 하고 오열하진 않았다.

"에휴, 참… 유감이야. 이거 마실래?"

레이아가 뭔가를 건네자 한동안 멍하게 있던 성민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작은 양주잔에 담겨 있는 갈색의 액체였다. 얼마나 센 건지, 코를 바짝 댄 것도 아닌데 독한 향이 한가득 들어왔다.

꿀꺽 꿀꺽!

채가듯 확 받아들어 단번에 넘긴다.


"크헉! 쿨럭, 쿨럭 쿨럭!"

"바보야…."

레이아가 건넨 것은 40도가 넘는 위스키였다. 취하려는 기분은 잘 알겠지만, 단숨에 들이켜봤자 지금처럼 기침으로 다시 뱉어낼 뿐이었다. 그래도 알콜이 워낙 강해서인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오르는게 보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레이아의 앞에다가 성민이 빈 잔을 내밀었다.

"한 잔만  줘."

"술병 안 가져왔어. 이걸로 만족해."

"제발,  잔만 더…."

"…에휴. 기다려."

잠시 후, 레이아가 거실에서 술을 따라왔다. 이번에도 술병은 들고 오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암시였다.


"이번엔 흘리지 마."

"알았어."

꼴깍, 꼴깍….

훨씬얌전해진 태도로 술을 넘기는 성민. 그래도 워낙 독한 술이었기에 얕은 기침을 한두번 했지만 흘리지 않고 다 마셨다. 향 좋은 술을 소주 마시는 것마냥 바로 목구멍으로 넘기는 모습이 거슬렸으나, 더이상 어린애처럼 칭얼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레이아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끅끅하며 들썩거리던 소년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레이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알고 있었잖아. 결국 이렇게 될거란 걸."

"…설마 했어."

"여자는 현실적이고 감정적인 동물이야. 몇날 며칠 동안 수십 명의 남자들과 수백 번을 섹스하면, 누구라도 정신이 나가서 다른 사람을 의지하게 돼. 봐, 그 남자. 되게 잘 생겼잖아. 성격도 젠틀하고 자상해 보이고, 목소리도 되게 좋고, 몸도 멋지고. 나라도 그런 상황이었으면 분명 빠져들었을 거야. 그냥 본능적인 거야. 물에 빠지면 뭐라도 붙잡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게 진심으로 변하는건 시간 문제지."

"………."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다물고 있던 소년은 독한 술기운이 올라오는 건지, 한 번 딸꾹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취기가 올라오는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판이 잘 깔렸다고 판단한 레이아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성민아."

"…왜."

"너……."

레이아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고, 성민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레이아의 말이니 어쩔  없이 대꾸해주는 식이었다. 레이아는 별로 위로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현실적인 얘기를 하며 순진하게 여자의 정절을 믿었던 성민을 나무랐다. 소년은 중간중간 울컥해서 반박하려 했으나, 고개를  때마다 마주치는 또렷한 보라색 눈동자에 압도당해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입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성민아."

"……."

"야."

"아, 왜."

계속 귀찮게 굴자 슬슬 성과가 나왔다. 성민의 관심이 아리에게서 레이아 쪽으로 점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레이아는 다음 스탭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혼란스러울 때  치고 들어가야 효과가 좋은 법이니까.

"우리, 사귈래?"

"갑자기 뭔 소리를…."

"농담 아냐. 진짜로, 나랑 사귀자고."

갑작스러운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어라 말하려는 성민의 입을, 레이아가 검지를 뻗어  막았다. 그 상태로, 똑바로 눈을 마주보며 레이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남성민. 솔직히 이제까지 내가 너한테 뭐였냐? 한아리의 대용품조차도 아니고, 그냥 정액이나 빼주는 러브돌이었지. 너한텐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차라리 잘 됐어. 한아리랑 너는 이제 끝났어. 어쩔 수 없어. 이게 현실인걸.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어. 그러니까, 나도 이제 욕심 내도 되잖아. 빈 자리에 앉는게 나쁜 일이야? 아니지?"

"…잠깐."

"후우, 시원하다. 그동안 답답했는데 솔직하게 말하니까  살 것 같네. 결정은  맘대로 해. 이제까지  배려해주고 입조심하느라 힘들었어."

"레이아. 잠깐만."

성민이 진지하게 부르고 나서야 레이아가 다시 성민을 보았다. 둘의 눈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너, 무슨 뜻이야."

"응? 뭐가."

"사귀자는거. 설마… 진심인 거야?"

그 말을 듣자 레이아가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이내 주먹을 꽉 쥐어서 성민을 때렸다. 퍽, 퍽, 퍽. 레이아는 손이  맵다는걸 몸으로 터득한 성민은 고통을 꾹 참고 다시 물어봤다.

"레이아. 잠깐, 손 내리고… 진정해. 그래. 말로 하자, 말로…."

"그래, 지껄여봐. 이번엔 개소리 말고 사람 말을 하길 바랄게? 응?"

"으윽, 야, 야…. 질문에 대답은 해주고 때려. 아까 한 말, 진심이냐고."

"뭐? 사귀자는 거?"

"그래. 너, 진짜로 나랑 사귀자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쭉?"

레이아가 다시 주먹을 쥐자 바로 움츠러들며 방어 자세를 취한 성민은, 공격이 없자 살짝 방어를 풀며 눈치를 봤다. 그 사이로 다시 한 번 주먹이 꽂혔다.


퍽!

"아악! 아, 씨! 진짜 아프다고…."

"그래. 왜 말을 못 알아 들어? 내가 외국 말로 했어?"

"아니, 그게…."

성민은 레이아의 태도가 은근히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지, 바보처럼 헤실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네가 진심일줄은 몰랐어. 그냥  몸으로 달래주는 구나 생각했지…."

"하아, 성민아…. 여자가 마음이 안 가는데 그렇고 그런 일을 해주겠어? 내가 그렇게 싸게 굴었니?"

"아니! 절대!"

'생각해보면 엄청 비싸지는 않았던… 아니, 아냐. 말리지 말자.'

왠지 레이아의 페이스에 말리는 느낌을 받은 성민은 남자로서 우직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있어봤자 계속 혼날 것 같다는 생각에, 앞뒤 생각하지 않고 레이아를 덮쳤다.


"앗!"

"고마워, 레이아. 사랑해…."

"녀그, 흐읍! 우웁!"

무어라 말하려던 레이아의 입을 입으로 막아버린 성민은 저항하지 못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누르며, 마치 정상위처럼 누워 있는 레이아의 다리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벗은 두 남녀의 성기가 이따금 스치며 주인에게 은근한 성적 긴장감을 선사했다.


츄웁, 츄릅, 쪼옥, 춥.


소년의 저돌적이고 거친 키스가 끝나자, 혀가 떨어지면서 진득하게 늘어났던 타액이 후두둑 떨어져 누워있던 레이아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입이  차례 다물리더니, 꿀꺽 하고 목울대가 움직였다.


"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이어지는 입술 세례. 은근히 판단이 좋은 성민의 애정 공세에 레이아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평범한 여자였으면 이런 행동에 넘어가서 웃음꽃을 피웠을 것이다. 물론 상황이 별로 심각하지 않았기에 통하는 거지만. 어떤 면에선 꽤나 날카로운 소년의 행동에, 레이아는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만 솔직하게 말해. 네 양심에 걸고."

"으응? 뭔데."

"난 한아리의 그림자 따위가 아냐.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거, 그냥 슬프고 외로워서 그러는 거라면 당장 관둬. 그냥 여자가 필요한 거라면… 내가 알아봐 줄게."

"아냐! 난 진심이라고!"

"흐음…."

다소 누그러진 레이아의 태도에, 성민이 열심히 비위를 맞춰주며 레이아에게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방금 전까지 한아리 때문에 슬퍼하던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 슬퍼하던 남자는, 어느새 미끼를 문 새로운 물고기를 잡는데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아까 그랬던건 그냥 놀라서였어. 솔직히  네가  때문에 날 달래주는 줄 알았거든. 네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 내 가슴에 손 대봐. 엄청 두근거리지? 미칠 것 같아. 웃긴 게 뭔지 알아?  지금 진짜 기뻐. 진짜 방금 전만 해도 아리 누나 때문에 울었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서 눈물 날 것 같아. 진짜로. 진심이야."

"…말은  하네."

거의 넘어간 듯한 레이아의 누그러진 태도에, 성민이 헤헤 웃었다.

"근데, 네 일은 어떡해? 날 감시하고 그래야 한다며."

"좆까라 그래. 이제 관둘 거야."

"헤헤, 좋은 생각이야. 그냥 나랑 같이 살자…."

….

그렇게 둘은 누가 봐도 명백한 연인처럼 서로를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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