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4-2. 개입 (26)
[무아지경] 스킬.
아리스가 가진 비장의 수. 현역 시절엔 수많은 마왕군과 간부를 쓰러트린 비기였고, 지구에선 [외강내유] 저주에 대한 보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외강내유] 스킬은 아리스의 마나를 억제하는 저주였고, [무아지경]은 마나가 아닌 또다른 초자연적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스킬이었다.
[외강내유] 저주 스킬은 남자들이 아리스를 원하여 들이댈 때마다 발동되고, 그때마다 그녀는 마나가 억제당해서 평범한 여자가 된다. 단순히 마나만 억제했다면 실전으로 단련된 검객를 일반인들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저주는 마나를 억누를 뿐더러 그녀의 신체 능력 역시 무력화 시킨다. 단련된 탄탄한 몸도, 초인적인 운동 신경도, 실전에서 쏠쏠하게 써먹었던 격투술도 사용할 수 없다. 평범한 지구의 여자, 그 이상의 힘이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아지경] 스킬로 마나가 아닌 또다른 에너지를 끌어다 쓰면, 그녀는 여전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마나와 신체 능력은 억제당했을 지언정, [무아지경] 스킬을 통한 제 3의 에너지는 사용할 수 있다. 저주 때문에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는 아리스가 자유롭게 돌아다닌 것은 이런 든든한 보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아지경] 스킬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총 세 종류였다. 아리스는 이 세 가지 에너지를 각각 '진원진기', '생명력', '기'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무아지경] 스킬로 사용한 에너지는 오직 '기'뿐이었다.
세 종류의 에너지 모두 판타지 세계 동대륙의 대(大)가문에서만 터득할 수 있는 특수한 에너지다. 대가문 중 으뜸인 연 가문의 천재 후계자 아리스는 비록 연 가문에 있었을 때에는 오빠의 배신으로 수련이 끊겨 이 에너지를 다루는 법을 몰랐으나, 이후에 용사를 만나고수련을 재개한 뒤 독학으로 깨달음을 얻어 자신만의 독특한 기술을 만들어 냈다. 그게 바로 [무아지경] 스킬이었다.
'진원진기'는 본질적인 에너지. 정확히는 마나의 근본인 '마나 서클'의 에너지를 뽑아다 쓰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로 따지자면 심장에 비유할 정도로 중요한 데다가 한 번 사용하면 절대 재생되지 않기 때문에 죽기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도 사용을 고민할 정도로 사용하기 부담스러운 에너지였다. 말 그대로 미봉책인 것이다. 한 번 사용하면 마나 유저로서의 능력을 크게 잃는다. 아리스는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다.
'생명력' 역시 본질적인 에너지였다. '진원진기'가 마나의 근본을 가져다 쓰는 것이라면 '생명력'은 말 그대로 생명의 근본을 갖다 쓰는 것이다. 한 번 사용하면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이 가고 수명에도 큰 영향을 끼치지 때문에 '진원진기'보다도 사용하기 껄끄러운 에너지였다. 적어도 '진원진기'는 사용 후 일반인으로서 살아갈 수라도 있겠지만, '생명력'은 장애를 얻고 폐인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생명력' 역시 아리스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기'. [무아지경]의 세 에너지 중 아리스가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였다. 마나의 사촌 쯤 되는 느낌의 에너지인데, 마나를 뭉치고 힘을 가하면서 진득하게 정성을 들이면 만들어진다고 아리스가 설명했지만 이해한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효율성 측면에서 마나보다 특출나게 뛰어난 에너지도 아니었기에 동료들은 마나를 여전히 사용했고, 연 가문의 기술과 궁합이 매우 좋았기에 아리스만이 '기'를 사용했다. 지구에 온 뒤에는 사용할 일이 없을 줄 알았지만, 저주 때문에 여전히 쓰고 있다.
아리스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온몸을 맴도는 '기'가 보이는 형태로 방출되는 것이었다. 처음엔 아리스도 의도치 않게 눈동자가 빛나는 것에 당황했지만, 은근히 멋있는 데다가 적을 위축시키는 효과도 있어 굳이 원인을 찾아 해결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
'시간은… 널널하네.'
아리스는 흘끗 시계를 보며 여유롭게 생각하기로 했다. [무아지경]의 지속시간은 꽤나 길어서 적어도 세 시간, 많으면 여섯 시간은 지속할 수 있다. 굳이 끝까지 유지해서 평소에 모아 놓은 '기'를 다 쓸 이유는 없긴 한데, 어차피 무아지경 스킬을 한 번 사용하면 당분간 기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아끼려 들 필요도 없었다.
드드득.
뽀얀 아리스의 맨발이 박살난 cctv의 잔해를 짓밟고 지나간다. 지금 쯤이면 박민우가 있는 3층, VIP 층은 이상 징후를 감지했을 것이다. 떠들석하던 이들이 쓰러져서 별장에는 낯선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감이 좋은 자라면 심상치 않는 기류를 감지했겠지. 아니면 하다못해 cctv가 전부 고장난 것이라도 눈치챘을 것이다.
저벅, 저벅.
그리고 마지막 방. 아리스는 2층 여자 숙소의 앞에 섰다. 3층을 제외한 마지막 방.
"무, 무슨 일이야?"
"어떡해, 어떡해…."
문 건너로 불안에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 감지된 것은 여자들 뿐이었다. CCTV 역시 감지되지 않는다. 발을 동동 구르는 요란스러운 동작을 마지막으로 초감각을 거둔 아리스는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콰아앙!
…
"한아리! 너, 너 대체…. 잠깐만, 다가오지 마! 오, 오, 오지 마!"
"악감정은 없어."
별장의 여자들 중 일인자였던 유란. 박민우와 질펀하게 뒹굴고 여자방에서 쉬고 있던 그녀는 저택을 조용하게 잠식하는 검은 그림자를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분명 여우 같은계집애지만 남자들 앞에선 대놓고 여우 짓을 하며 귀엽게 굴면서 실리를 취하고 별장이라는 작은 세상에서 나름의 권력을 구축했으나….
"무, 무섭게 왜 그래…. 오지 마…."
우아하면서도 강력한 야수와도 같은 박력을 지닌 아리의 금빛 눈동자. 감정없이 무미건조하게, 그저 응시할 뿐인 서늘한 시선이 유란에게 미지의 공포를 선사했다. 여자방에 쳐들어온 아리는 방 안에 있던 여자들에게도 가차없이 손을 써 기절시켰다. 최대한 고통 없이, 최대한 부작용 없이 의식만 잃게 했기에 후유증도 없을 것이다. 나름 최대한의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러나 유란의 눈에는 손날치기 한번으로 사람이 픽픽 쓰러지는 무서운 광경이었고, 그녀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리에게서 죽음의 공포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가느다란 다리가 오들오들 떨린다.
"제, 제발 살려…."
"괜찮아. 무서워할 것 없어."
계속해서 뒷걸음치던 유란은 어느새 벽에 등이 닿자 아찔함을 느꼈다. 아리는 그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가가 벌벌 떠는 유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오들오들거리며 눈을 꼭 감고 있던 유란은 아무 고통도 없자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해칠 것 같던 한아리는 그저 자신의 양 어깨 위에 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아리는 행동을 취하는 대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유란에게 말을 건넸다.
"자, 심호흡 한 번 해 봐."
"으, 으응?"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유란은 입 안까지 올라온 말을 목구멍 안으로 다시 넘기고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흐으읍… 후우우…."
"옳지, 착하다.한 번 더."
유란은 잔뜩 위축된 상태여서 호흡마저 얕고 가빴기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머리에 산소가 돌면서 한층 편안하고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아리가 자장가를 불러주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주듯 말하자, 유란은 방금 전까지 느꼈던 공포가 상당 부분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가 눈에 띄게 풀어지는 것을 확인한 아리는….
"흐으읍… 후우우…."
"그럼, 잘 자."
"어? 아으으…. 으으음…."
유란의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을 통해 유란의 몸속에 '기'를 쭈욱 흘려보냈다. 갑작스레 흘러들어오는 엄청난 밀도의 에너지. 하지만 일반인인 유란은 기운이 샘솟긴 커녕 해일처럼 덮쳐드는 과다한 에너지를 감당치 못해 쇼크를 받고 기절했다. 동료들 중 아리스만이 할 수 있는 안전한 기절법(?)이었다. 서대륙 특유의 마나 수련법을 익힌 아리스는 여러 가지 신기한 재주가 많았고, 이것 역시 그녀만의 독특한 기술 중 하나였다.
굳이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는 이유는 레이아의 주문 사항 때문이었다.
용사의 입으로 전달받은 레이아의 주문은 크게 두 가지. 첫째는 남성민과 한민성을 처리하는 동안 별장에서 시간을 끌어주는 것. 둘째는 그 애들을 끝내고 별장으로 올 때 쯤, 미리 '세팅'을 해주는 것.
세팅이란, 정신 조작 마법을 사용하기 쉽게 기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기절시키는 이유는 수술 전에 마취를 하는 것과 같다. 고통을 줄이는 이유가 아니라, 수술하는 의사 입장에선 환자가 펄떡펄떡 날뛰는 것보단 얌전히 자고 있는게 편하니까.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마취'를 시켜주고 있는 셈이었다. 순전히 레이아의 편의를 위해서.
레이아가 광역 충격 마법으로 화끈하게 전부 기절시키지 않는 이유는 마나 절약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위대한 흑마법사였기에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수십 명에게 정신 조작 마법을 거는 것은 만만찮은 작업인 데다가 마나의 밀도가 현저히 낮은 지구의 환경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산소 밀도가 매우 낮은 곳에서 거친 운동을 하는 셈이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 조심하는 것이다. 겸사겸사 아리스가 받았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을 테고.
실제로 오랜만에 초인의 상태가 되어 몸을 움직이는 아리스는 꽤나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달고 다니던 무게추를 벗어던진 듯한 홀가분함과 상쾌함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줬다. 유란을 굳이 때려서 기절시키지 않는 이유는 그냥 그녀를 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뭐랄까, 대놓고 여우처럼 굴면서 잇속을 챙기는 귀엽고도 영악한 모습이 어째 미라를 보는 듯해서… 선뜻 폭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아리스는 미라의 그런 특이한 성격을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생각했기에, 은근히 닮은 점이 있는 유란에게 자비를베풀었다. 마침 기분도 좋았고.
또한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약자를 때리는게 마음에 내지키 않기도 했다. 이빨과 발톱을 보이는 짐승을 처단하는건 익숙하지만, 바싹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약자에겐 선뜻 손을 휘두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종의 기사도 정신인데, 타고난 그녀의 천성이었다.
'이제 3층만 남았나.'
은근히 아쉬움마저 느낀 아리스는 박민우와 그 주변인을떠올렸다. 3층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 그 녀석을 생각하니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도대체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이렇게까지 못되먹을 수가 있는지. 미래에 어떤 악당이 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녀석이다.
3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아리스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세상사에 개입하는 것을 감수해서라도 싹을 자를지, 아니면 악의 씨앗을 외면하고 방관할지…. 현역 시절이었으면 1초의 고민도 없이 처단했을 테지만, 악을 사냥하던 냉정한 검사 아리스 연은 이 자리에 없다. 아리스 한. 지구에 사는 일반인 여자 '한아리'만이 있을 뿐. 용사와,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기로 맹세했기에… 피를 보는 것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아…."
낮은 한숨을 쉬며 아리스는 깊게 고민했다. 그러나 장고할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발은 꼭대기층에 있는 박민우의 방문 앞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갈등하던 그녀는, 박민우를 직접 보고 얘기를 나눈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딸깍, 끼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