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4-2. 개입 - 에필로그 (4)
"뭔가 했더니."
이대로 냅두면 아리스가 리타이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왕 카이사는 아리스가 생각보다 약한건가 싶었으나, 신념에 죽고 사는 녀석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굳은 신념으로 감히 마왕에게 이빨을 내보였잖는가. 그렇게 굳고 단단한 신념이 뚝 부러져 버리면, 아마 엄청 아프겠지. 다시 활동하지 못할 정도로. 죄책감은 신념으로 움직이는 이들에게 치명적인 독이었다.
"흐음…."
시공의 수호자는 그저 미래를 보여줄 뿐이었다. 선택은 알아서.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카이사는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아주 짧았다.
"물론 그런 미래는 절대 납득할 수 없지."
그녀가 용사 파티에 바라는 점은 딱 하나.
100% 완벽한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난 너희들이 너무 너무 맘에 들거든. 여섯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그 멋진 팀플레이가…."
카이사는 용사 파티를 좋아했다. 여섯 명이 완벽하게 하나가되어 같은 급의 마왕, 아니 알 두 마르의 대군주인 '파괴의 바알'을 무찔렀다. 물론 그 녀석이 자기 힘을 다 쓸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택도 없었겠지만, 예전에도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타 차원에서 마왕의 힘은 무조건 제한을 받는다.
어쨌든 마왕은 생명체의한계를 초월한 살아있는 재앙이었고, 용사 파티는 단 여섯 명이서 그 재앙을 몰아냈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역할 분배 역시 이상적이어서 엄청나게 시너지를 냈다. 판타지 세계의 미련한 인간들이 대륙 연합군이니 백만 대군이니 하며 쪽수로 밀어붙여도 실패했던 일을, 단 여섯 명이서 성공한 것이다.
카이사는 용사 파티가 더없이 영리해 보였다. 힘은 예리할수록 효율적이다. 팔뚝만한 굵기의 두꺼운 쇠몽둥이 보다는, 그보다 훨씬 얇은 창칼이 더 살상력이 큰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인간들은 단순히 크게 뭉쳐서 마왕의 대군과 정면으로 붙는 바보 같은 짓을 했고,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애초에 태생이 다른 자들이 모였기에 제대로 뭉치지도 못해서 밀도가 낮았고, 쓸데없이 덩치만 커서둔하고 무식했다. 반면 용사 파티는 최대한 소수 정예를 고집했고, 날카로움을 최대한 살린 채 기민하게 움직여 중요 요인이나 지휘관 등을 암살하고 빠져나갔다. 물론 한 번만 미끄러져도 죽을 정도로 위험한 길이었으나, 결국은 단 한 번의 실패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핵심 중의 핵심, 머리이자 심장인 마왕까지도 물리쳤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치명적인 비수. 카이사는 용사 파티가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몸보단 머리를 쓰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었고, 항상 똑똑하게 움직였던 현역 시절의 용사 파티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목숨 바쳐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 보다도 더.
시공의 수호자가 예견한 미래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간 가장 마음에 드는 명검이 부러질 위기에 처했다. 단순히 여섯 명 중 한 명이 없어지는 것이, 6분의 1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가 무너지면 절대 완성된 형태가 아니게 되고, 그들이 가졌던 전력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이 날라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안 돼. 절대로."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들이 무너지는 것은. 적어도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 외엔 절대 납득할 수, 허락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사랑이려나?'
상관없지.
카이사는 의미 모를 얕은 미소를 지으며 '계획'을 세웠다.
…
최악과 최악이 겹쳐 사건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그 최악 중 몇 개를 제거하면 될 것이다.
일단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리스와 소년의 관계였다.
남성민과 한아리가 이어지지 못했다. 둘은 아직 남남 같은 관계였고, 그래서 남성민의 포기와 체념이 빨랐던 것이다. 만약 가족 같은, 연인 같은 관계였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결책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둘을 이어주면 된다. 둘 다 성욕이 아주 왕성하니까 불씨만 뿌려주면 아주 활활 타오를 것이다. 끝.
사실 이것만 해도 충분하지만, 모처럼 미래를 봤기에 카이사는 좀 더 치밀하게 하기로 했다. 실패하는 극소수의 경우의 수마저 제거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레이아. 귀여운 꼬마 흑마법사.
그녀를 계획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개입'하기 위해 써먹으려던 수단이었다.
흑마법은 일반 마법에 비해 효율성이 좋고 강력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마법이었다. 위험한 이유는 안 좋은 일에 쓰여서도, 너무 강력하고 잔인해서도 아니었다. 흑마법은 더 큰 흑마법에 잡아먹히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강한 흑마법사는 자기보다 약한 흑마법사를 너무나도 쉽게 제압할 수 있었고, 복종시킬 수 있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마왕을 섬기지 않는 흑마법사들이 대체로 혼자 활동하던 이유가 그 때문이다.
레이아가 현역 시절, 흑마법사로서 마왕에게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마왕 '파괴의 바알'이 극단적인 육체파였기 때문이다. 바알은 마법을 상당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법에 아주 조금, 새끼 손톱 만큼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레이아는 절대 활약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알의 수하에 마법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레이아는 꽤나 강력한 흑마법사였고 바알 진영의 마법사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썩 좋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레이아가 마왕군의흑마법사를 사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법사 계열 마왕인 카이사에게 레이아는 그저 다루기 쉬운 인형에 불과했다.
카이사는 레이아를 딱히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개입하기 쉽게 써먹을 뿐.
마왕이 그녀를 이용하는 이유는, 비유하자면 자신의 지문이 남지 않게 남의 손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마왕의 마나를 조금이라도 남기면 용사 파티는 비상이 걸릴 것이다.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감각이 예리해서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문이 찍히지 않도록, 즉 마기를 들키지 않도록 레이아의 손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계획이었다.
'계획은 완벽하긴 한데….'
조금 심심한 면이 있었다. 카이사는 자극적인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모범적이고 밋밋한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더 화끈하게 세부 사항을 수정했다.
….
그 결과.
레이아의 '개입'으로 성민과 한아리가 이어졌고, 연정이건 떡정이건 성민은 아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레이아를 직접 무대에 집어넣어 성민과 민성이 떡치도록 만들었다. 등 떠밀린 줄도 모르고 무대에 나선 레이아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행동했고, 소년들과 하루 종일 떡치는 모습을 본 카이사는 역시 자극적인게 최고라고 평가하며 만족했다.
다 좋게 좋게마무리됐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레이아의 기억을 지우고, 혹시라도 문제를 만들 수 있는 레이아의 장난감, 관음 기계인 '큐피드'를 처리해야 했다. 정체를 숨기는데 신경쓴 카이사가 큐피드에 찍힐 염려는 없었지만, 어쨌든 찝찝하게 만드는 녀석이었으므로 내버려둘 이유도 없었다.
카이사는 일을 질질 끄는 성격이 아니었고, 일이 해결된 다음 날에 바로 레이아를 불렀다. 그녀를 최면 마법으로부터 해방시켜줬고, 큐피드의 촬영 기능과 기록을 없앴다. 녀석들은 눈치가 빨랐기에 큐피드의 이상 증세를 바로 알아채겠지만, 설마 마왕이 개입했다곤 상상도 못하겠지.애초에 마왕이 여러 명이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레이아의 기억을 살짝 조작했다.
좀 대충 일처리를 하는 감이 있었지만, 어차피 나중에 만날 날이 올테니 상관없었다. 당장 알아채지만 못하면 장땡이었다.
일을 완전히 끝낸 카이사는 의식을 잃은 채 인형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는 레이아를 조금 데리고 놀다가 시공의 수호자의 공간에서 나와지구로 옮겼다.
'킥킥킥.'
깨어난 레이아는 뜬금없이 아저씨와 떡치고 있는 상황을 자각하고는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항상 차분하던 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이 장관이었다. 소리 내어 웃지 않으려고, 아저씨로 변신한 카이사는 엄청나게 인내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카이사는 레이아의 보지 맛이 참 훌륭하다는 등 다른 생각을 하며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
덜컥, 쿵.
차문이 열리고, 닫혔다. 차에서 내린 레이아가 점점 멀어지는 걸 보면서, 카이사는 본모습으로 돌아와 차 안에서 한참을 킥킥 웃었다.
"또 보자. 다음엔 진짜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까, 기대해."
만남을 예고하는 카이사의 눈동자는 마치 장난감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기쁨과 기대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