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단편 - 군인의 주말 여친
어느 평안하고 평범한 날, 용사는 뜬금없이 눈앞으로 내밀어진 스마트폰 화면을 보았다. 그곳엔 머리를 바짝 깎은 빡빡이의 사진이 있었다.
-이병 천광석
어쩐지 표정이 어리버리해 보인다 했더니, 역시 이등병이었다.
스마트폰을 내민 사람은 미라였다. 이번엔 군인 여친 컨셉인 건가. 근데 군인은 자주 보기가 힘들어서 재미 보기 어려울 텐데. 미라는 저주 때문에 즐기기 위한 조건이 좀 까다로울 뿐이지 성욕이 약한게 절대 아니었다. 저주에 걸리기 전에도 꽤나 솔직하게 섹스를 즐기는 여자였고, '씨받이' 저주가 걸린 후에는 어지간한 젊은 남자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성욕이 강해졌다. 사실 '씨받이' 때문에 성욕이 강해진건 모든 여자가 다 마찬가지이긴 했다.
"자기. 이 남자, 재밌을 것 같아."
"여자가 고픈 상황이긴 하겠네."
"아침에 톡으로 얘기 좀 해봤는데…."
"톡? 요즘은 싸지방을 평일 오전에도 여나?"
군필인 용사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용사의 군생활은 10년 이상 지난 과거의 이야기였고, 매년 매년 좋든 나쁘든 혁신적으로 바뀌고 있는 요즘 군대를 구닥다리인 용사가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요즘 애들은 핸드폰도 하잖아. 몰랐어?"
"세상 참…."
"물론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는데 몰래 몰래 한 거지. 다들 그런대."
나름 구세대 군번인 용사는 항상 군인에 대한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들이닥치니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관심이 뚝 떨어졌다. 핸드폰 있다고 군생활 빨리 끝나는 것도 아니고. 불쌍한 녀석들.
"그래서, 아무튼…. 톡을 해봤는데?"
"딱 봐도 발정이 났더라고. 여자가 고픈가봐. 그래서 재밌을 것 같아. 머리 빡빡 민 애가 여자랑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이잖아."
뭔가 좀 슬픈 얘기였다. 어쨌든 그런 애를 미라가 달래준다면 엄청난 위로가 될 것이 분명하다. 미라 같은 여신과 섹스하는, 돈 주고도 못 살 최고의 경험을 할 테니까.
그러나 걸리는게 한 가지 있었다.
"미라. 근데 너는 별로 못 즐길 것 같은데."
"으응? 아니. 괜찮아."
미라는 그 특유의 쿨한 분위기로 여유 있게 웃어보였다.
"사실 몇 번 시험해봤는데, 은근히 괜찮았어. '씨받이' 스킬이 세져서 오히려 저주의 조건이 완화된 것 같아. 꼭 사귀지 않아도 충분히 느끼더라고. 물론 사귀면 더 기분 좋겠지만, 더 이상 필수 조건은 아니게 됐어. 그래서 요즘 좀 홀가분한 기분이야. 굴레를 벗어던진 것 같아."
"어… 자, 잘 됐네."
시험? 도대체 언제?
물건이 반응하여 조금 섰다. 나중에 큐피드 영상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미라의 변화에 놀라기도 했다.
"음, 그 까다로운 미라의 다리가 이젠 좀 잘 벌려지겠네. 좋은 일이야."
"아이, 자기이? 말이 좀 짓궂어?"
연인의 성희롱에 미라가 어깨 툭 치며 까르르 웃었다. 자기가 예쁜걸 잘 아는 그녀는 고양이처럼 도도하게 굴다가도 강아지처럼 친근하게 달라붙는게 매력이었다. 밀당을 잘하고 끼도 잘 부린다고나 할까. 하는 짓만 보면 어장이 아주 큰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친한 사람에게만 저런다. 애교나 끼 부리는 건 자기 연인한테만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은 미라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물론 '바람기'의 대상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울타리 안과 밖의 구분이 엄격하다. 다른 여자 동료들과 자기 연인에겐 따뜻하지만 외부인에겐 냉랭하다. 미라 뿐만 아니라 다섯 여자들 모두의 공통점이었다. 그 성격이 겉으로도 드러나는게 레이아, 아리스였고 그래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구는게 델렌과 지나였다. 미라는 기분파여서 그때그때 다르다. 마냥 냉랭하지는 않지만 선을 확실히 긋는다.
그러면서도 네토남들과 어울릴 때면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아양을 떨고 매력을 어필하는게 참… 여러 의미에서 아름답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차가운 냉기가 있음에도 겉으론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살랑거릴 수 있다니. 가끔은 여자들이 대단해 보였다. 어쨌든 여자들이 다른 남자에게 홀라당 넘어가버릴 염려는 없어서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미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했다.
"그래도 좀 아쉽기도 해."
"뭐가?"
"내가 바람 피울 때마다 자기가 아닌척 은근히 신경쓰는게 좋았거든. 이젠 예전처럼 관심 받긴 힘들겠지, 아마?"
그 말을 듣자 피식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라, 다 알면서도 이렇게 굴다니. 여우 같은 깜찍한 기집애. 사랑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쪼옥.
"우음…."
진한 키스가 이어진다. 미라는 마치 이걸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감고 혀와 입술, 입 안의 감촉에 집중했다.
미라. 인간의 둥근 귀를 가진 하프 엘프. 그래도 엘프의 피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 가끔씩 귀를 토끼처럼 쫑긋거린다. 주로 느낄 때 그러는데, 볼 때마다 귀엽다. 미라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 포인트였다.
"후우, 하…."
마지막에 조금 거칠게 했더니 입을 뗀 미라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살짝 젖어 있었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우 같았던 미라가 토끼처럼 귀여워지자 머리를 쓰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손바닥을 간질인다. 폭신폭신한 감촉을 느끼면서, 미라가 원하는 대답을 내줬다.
"알면서 그래. 난 항상 너한테 관심이 많아. 신경도 많이 쓰고. 아주 많이 사랑하고."
"후훗. 비록 자기의 마음의 5분의 1이긴 하겠지만, 그 말을 들으니 기뻐."
미라의 뼈 있는 말. 씁쓸하긴 하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오히려 공평하지 않은 상황을 더 걱정한다. 한쪽으로 사랑이 기울어지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영 좋지 않게 되니 말이다. 작은 하렘이긴 하지만, 하렘 주인 노릇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항상 공평하게 잘해줘야 하고, 똑같이 사랑한다는 태도를 보여줘야 하니까.
하지만 연인에게 느낄 수 있는 사랑 역시 다섯 배로 늘어난 느낌이어서 행복했고, 이게 피곤하거나 귀찮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응."
미라는 이미 속이 꽉찬 캐리어를 현관문 앞에 놓은 상태였다. 배웅을 해주러 나가면서, 미라에게 한 마디 덧붙인다.
"미라."
"응?"
"네가 편하게 즐기는게 내게 가장 큰 기쁨이야. 알지?"
항상 생글생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미라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응. 사랑해, 자기."
"나도."
약 이틀 정도의 짧은 이별. 연인은 가벼운 입맞춤을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
찰칵.
우우웅…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는 버스의 안에서, 턱을 괸 채로 멍하니 창밖을 보던 미라는 문득 어떤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많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이 널널하게 앉아 있는 고속버스의 건너편 좌석에서 들려온 소리는 핸드폰 카메라의 촬영음이었다.
"어…."
한 남자와 미라의 눈이 마주쳤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미라를 몰래 찍은 남자는 미라가 이렇게 빠르게 반응할 줄은 몰랐는지 사진 찍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저, 그게…."
궁색한 변명조차 안 나와서 말을 질질 끄는 남자를 표정 없이 바라보던 미라는 자기 옆좌석을 툭툭 쳤다. 마치 옆에 앉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당황한 남자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더니 이내 미라의 옆자리로 조심조심 다가가 앉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미녀의옆자리에 앉았다는 기쁨보단 긴장감이 조금 더 강해 보였으나, 그러면서도 향긋한 미라의 향기를 맡고 팔과 팔이 자연스럽게 맞닿자 내심 좋아하는게 보였다.
'단순하긴.'
미라는 겉으론 무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론 피식했다. 당장 체포되진 않더라도 경찰 조사 정도는 받을 수도 있을 만한 위험한 상황인데, 그 와중에도…. 예쁜 여자 앞에 선 남자들의 단순한 모습은 미라에게 항상 흥미와 재미를 선사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라는 분위기를 잡았다. 마치 이런 일에 질렸다는 듯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여전히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본다. 말이 없자 남자는 긴장하는 건지 기대하는 건지 몸을 굳히며 가만히 있었다.
척.
남자에게 미라의 손이 내밀어진다. 무슨 뜻인가 곰곰이 고민하던 남자는 미라의 부연 설명이 없자 멍하니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미라가 고개를 돌려 짜게 식은 눈으로 지긋이 바라본다.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결국 말로 지시한다.
"핸드폰 달라고요. 뭘 찍었는지 보게."
"아, 아… 죄송…."
선생님한테 혼나는 초등학생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남자. 미라는 피식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이런 모습은 익숙하지만 항상 재밌었다. 어떻게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건지.
이쪽 세계의 남자들은 대부분 둘 중 하나였다.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하고 들이밀거나, 반대로 위축되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거나. 자존심인지 나름의 전략인지 관심 없는 척을 하는 남자도 종종 있었으나, 아예 관심이 없는 남자는 정말 극소수였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남자들 중 손가락에 꼽을 정도. 눈부시게 예쁜 데다가 자연스러운 레몬빛 금발에 보기 드문 녹안을 가진 이국적 색감의 미녀에게 관심이 안 모일 리가 없었다.
잠금을 해제하고 앨범 앱을 켠 후 남자는 핸드폰을 미라에게 건넸다. 미라가 사진들을 확인했다. 자신을 찍은 사진은 딱 한 장. 창밖을 보는 미라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보정 하나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햇빛이 비추는 그녀의 얼굴은 여신과도 같았다. 아무리 봐도 순수한 의도였던 것 같아서 미라는 안심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기분이 묘했다.
"허락 없이 함부로 사진 찍으면 안 되는거 아시죠?"
"죄, 죄송합니다. 바로 지울…."
"음. 아니."
남자의 말을 미라는 뚝 자르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새하얀 치아가 살짝 보이는 얕은 미소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고 빛이 났다.
"이건 봐줄게요. 예쁘게 찍혔으니까. 다음부턴 허락 받고 찍어요."
"어… 아, 감사합니다…."
"그 사진, 이리저리 퍼뜨리지 마세요. 그럼 가 봐요."
미라의 말에 남자는 뭔가 미련이 남았는지 머릿속에서 할 말을 정리했다. 살짝 웃기까지 하는걸 보니 기분이 나쁜건 아니라고 확신한 남자는 모처럼 용기를 냈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미라는 익숙하게 남자의 말을 잘랐다.
"남자친구 있어요."
그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
군부대 앞. 주말 외박을 하는 군인들이 몇몇 보였다. 입구쪽에 있는 면회실에서 가족이나 연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이도 있었고, 동료들끼리 들뜬 얼굴로 걸어 나가는 이도 있었다.
용기 있는 자부터 죽여버리는 잔인한 전쟁을 겪었던 미라는 군인들의 즐겁고 생기 있는 표정이 썩 괜찮아 보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 보였고, 정해진 복무 기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의 군생활을 지탱하고 있었다. 눈은 퀭하고 살은 깡마른 채 죽지 않아서 살고 있는 현역 시절의 군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건 그들이었으나, 실제로 살인을 해본 자는 수백 명이 지내는 이 넓은 군부대 안에서 미라가 유일하리라. 심지어 한두 명을 죽인 것도 아니다. 그 생각을 하자 미라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상념에 잠긴 그녀는 이내 어떤 기척을 감지하고는 시선을 그쪽을 향했다.
'아.'
살짝 마른 얼굴을 가진 빡빡이가 위병소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입대 전의 멀쩡한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많이 못생겨졌다. 마치 까만 꼴뚜기 같았다.
'실제로 말하면 엄청 상처받겠지?'
저 멀리서 걸어나오는 천광석을 보며 미라가 생각했다. 평범한 키에 체형은 살짝 말랐고, 외모는 군인이라 그런지 좋게 말해주기 어려웠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점은, 여자에 대한 열망이 번들거리는 저 눈빛과 얼굴이었다. 미라는 오로지 그 하나만을 기대했기에 천광석에게 합격점을 부여했다.
군인이랑 해보는게 처음은 아니었다. 저번에 사귄 남친이 입대한 이후 외박이나 휴가때 섹스하긴 했으니까. 근데 너무 기다리기만 하는 일상이 지속되니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다른 여자들과는 조금 다른, 좀 더 생리적이고 지저분한 이유였으나 어쨌든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친의 군생활에 가장 힘든 시련을 내렸었다.
'잘해줘야지.'
'바람기' 스킬의 특징은, 항상 진심이라는 점이다. 사귀는 외도 상대에게서 진짜로 애정을 느끼고, 관계가 끝난 후에도 미련이 생긴다. 좀 더 잘해줄 걸, 좀 더 솔직해질 걸 등등 여러 감정의 파편이 마음 속에 남는다. 썩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이별 통보할 때 마음이 안 좋았던 예전 남친을 떠올리며, 미라는 천광석에게 좀 더 잘해주겠다고 다짐했다.
"천광석 씨?"
"이ㅂ… 아, 아 네?"
저도 모르게 관등성명을 복창하려던 천광석은 이등병 특유의 어리버리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군생활 시절 유일하게 순수할 때라 바짝 쫄아서 항상 긴장감을 품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는 했다.
"안녕하세요?"
사진으로만 봤던 여신의 실물을 보고는 입을 다물 줄 모르는 광석을 보며, 미라는 천사처럼 밝게웃어줬다.
…
택시 뒷자석에 같이 타고 오는 도중에 여러 얘기를 했다.
소개팅 앱을 통해 이미 얘기는 다 했지만, 미라는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주말 이틀 간의 짧은 만남이라고 통보하며 쐐기를 박았다. 광석은 아쉬워했으나, 당장 눈앞의 여신과 이틀 씩이나 뒹굴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며 기대감을 품었다. 왜 군인이랑 만날 생각을 했냐는 질문에 미라는 호기심이라고 대답했고, 진짜 그거(섹스)까지 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부정하지 않고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거의 애교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의 표정이 헤벌쭉해졌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미라의 태도는 진짜 남자친구와 대화하는 것처럼 나긋나긋했다.
….
총알처럼 빠르게 질주하는 택시를 타고 금세 펜션에 도착했다. 말이 펜션이지, 사실 1층짜리 평범한 가정집을 개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했고 주변에 인기척도 없어서, 여러모로 다른 숙박시설보다 괜찮아 보였다. 주말동안 오로지 둘이서만 쓰는 것이기에 좀 더 오붓하고 편한 마음이 들었고, 나무 펜스와 바닥, 테이블로 이루어진 테라스도 마음에 들었다. 초겨울 추운 날씨였기에 쓸 일은 없어 보였지만. 방이 두 개에 거실도 널찍해 보였으나, 아마 공간을 전부 쓸 일은 없어 보였다.
광석은 가면 갈수록 흥분되는지, 살짝 발개진 얼굴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향긋한 향기가 솔솔 나는 금발의 여신은 수컷의 흥분을 억제하긴 커녕, 팔짱을 끼고 팔뚝이 은근히 가슴을 스치게 만들면서 욕구불만인 군인의 가슴에 아주 불을 질렀다. 그래도 나름 신사답게 굴기 위해서, 정확히는 섹스까지 별 문제 없이 진도를 빼기 위해서 참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군복과 같은 무늬가 들어간 가방을 내려놓은 광석은 군복 안에 들어있던 소지품들을 꺼냈다. 핸드폰, 지갑, 그리고 콘돔. 간단하게 챙겨온 소형 캐리어에서 짐을 풀던 미라는 곁눈질로 보다가 말을 걸었다.
"자기, 그거 콘돔이야?"
익숙하게 자신을 연인처럼 부르는 미라를 보며 광석이 멋쩍게 웃었다.
"아, 그게…."
그러나 상황은 광석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콘돔을 보고는 음흉하다거나 짐승 같다거나 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미라는 다가오더니 말없이 콘돔을 집어들었다.
"어, 어?"
"자기."
미라가 다시금, 천사처럼 이를드러내고 웃었다.
"난 이런거 필요 없어."
콘돔이, 휴지통 안에 툭 떨어졌다.
잠깐의 딜레이 후에 그 의미를 깨달은 광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수백 번은 상상했던 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
"하아, 하아…."
"후우, 후… 하하…."
불꽃이 절정으로 타오른 뒤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금 부활하여 화르르 타오를 것을 알았기에, 미라는 굳이 남자를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군인이라 그런지 옷 벗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겨울이라 꼭꼭 껴입었을 텐데, 순식간에 팬티 바람이 되어서는 이제 막 상의를 벗으려고 하는 여자를 순식간에 다 벗겼다. 여자 옷도 잘 벗기는 것으로 보아, 군인이라서 빠른게 아니라 그냥 벗고 벗기는데 소질이 있는 듯했다.
스윽, 슥.
"으…."
미라는 자기 보지에서 크림파이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군대 안에서 잔뜩 묵힌 누런 정액을 손으로 스윽 훑더니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역하다 아니다 이전에, 너무 찐득하고 진해서 오히려 신기했다. 물처럼 묽어진 정액은 많이 봤어도, 풀처럼 찐득하고 끈적한 것은 볼 기회가 드물었다. 아마 입대하고 나서 한 달이 넘도록 묵혀뒀을 테니, 미라가 본 것 중 가장 진한 정액일 것이다.
"아, 안에 싸도 괜찮은 거야?"
"자기, 그건 싸기 전에 물어봤어야지."
미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자 광석도 따라 피식했다. 콘돔을 버린 순간부터 이미 모든 합의를 끝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광석은 원나잇 경험이 있었지만, 미라 같은 예쁜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이러나 싶기도 했다. 물론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주어진 천금 같은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으, 좀 춥다."
"저렇게 입고 있다가 벗으면 추울 수도 있겠네."
미라는 구석에 겹겹이 쌓인 광석의 옷가지를 보며 말했다. 사실 저것도 외박이었기에 덜 입은 편에 속했다. 광석은 난방이 충분하지 않은 건지 추워하는 기색이었다. 반면 멀쩡해 보이는 미라는 대충 깔린 이불에서 벗어나 새하얀 나신을 일으키며 물었다.
"추워?"
"응. 좀. 내가 추위를 타는 편이라서."
"날씨가 점점 추워질텐데 힘들겠네."
"하, 그러게."
거실로 나간 미라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난 추위 하나도 안 타는데."
"초소 근무 서보면 그런 말 못할걸."
"흐응, 진짠데."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호기심 가득한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보여줄까?"
"뭘?"
"나 추위 진짜로 안 타는거."
"어떻게?"
멍하니 누워 있는 광석을 뒤로 한 채, 미라는 창문을 열고 테라스에 그대로 걸어나갔다. 산길에 드문드문 세워진 펜션이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뜬금없이 초겨울에 야외노출을 하는 미라의 대담한 모습에 광석은 입을 떡 벌렸다.
"예에~."
"뭐하는 거야."
마치 한여름 해수욕장에 온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들뜬 그녀의 모습을 보던 광석은 결국 껄껄 웃으며 테라스에 따라나갔다. 광석이 깨달은 사실은, 미라가 정말로 추위를 안 탄다는 것이었다.
"으, 춥다."
"그래? 그럼 따뜻해지자."
알몸으로 밖에 나온 한 쌍의 남녀는 다시금 엉겨붙었다. 광석은 군인 치고도 부활이 빨랐고, 미라도 여자 치곤 성욕이 왕성했다. 잘 맞는 임시 커플의 입술이 부딪치며 뱀처럼 혀가 얽혔다.
"후음, 자기, 그거 알아?"
"후욱, 후, 뭔데?"
"나, 엄청 유연해."
또다른 재주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미라가 한쪽 다리를 잡고는 그대로 쭉 들어올렸다. 마치 피겨 스케이팅이나 발레에서 본 것처럼 일자로 쭉 벌어지는 다리를 보며 광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라는 자세를 유지한 채로 악마적인 유혹을 광석에게 쏘아보냈다.
"이 자세로 해본 적 있어?"
"…아니."
"그럼, 해볼래?"
광석의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활짝벌어진 보지로 향했다. 아직 누런 정액이 남아있음에도 그녀의 꽃잎은 그 어느 것보다도 아름답고 탐스러워 보였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헤. 으음, 흐읏…. 아읏!"
군인의 주말 여친 미라는 죽여도 죽여도 부활하는 광석의 자지에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
광란의 밤을 보내고 광석이 깨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뜬 점심 무렵이었다. 어제는 정말 짐승같은 하루를 보냈다. 박고 싸고, 박고 싸고,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뭐 좀 먹고, 또다시 박고 싸고….
멍한 정신으로 어제 하루를 되돌아본 그는….
'햐, 최고였다….'
평생 이런 날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적어도 휴가 만큼은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늘, 그것도 저녁 전까지라는게 그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9박 10일짜리 정기 휴가든, 1박 2일짜리 외박이든 복귀하는 날에 마음이 울적해지는건 군인들의 공통된 증세였다. 심지어 군생활을 시작도 안 한 수준인 이등병에겐 오히려 잠깐의 달콤함이 눈앞을 깜깜하게 만들 뿐이었다.
'안되겠어.'
잠에서 깨어 잠시 혼자 누워 있으니 영 좋지 않은 생각만 들었다. 미라와 함께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일어나서 거실로 나섰다.
"으음."
거실은 마치 가정집 아침 같은 분위기였다. 주방에서 따뜻한 음식 냄새가 피어올라 코를 향긋하게 자극하자 한 박자 늦게 허기가 돌았다. 먼저 일어난 미라가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와우."
미라처럼 예쁜 여자를 처음 본 광석은 그녀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게 마치 특별한 재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그녀의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다. 그 바람직한 복장 역시 너무나도 특별했다.
"일어났어?"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포니테일로 대충 묶은 모습이 참 예뻤다. 머리 이곳저곳에 삐져나온 몇 가닥의 금색 실이 부스스해 보여서 오히려 매력을 더해줬다.
사진으로 평생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예쁜 모습이었지만, 그 아래의 모습은 더더욱 아름다웠다.
은근히 나체족 비슷한 성향이 있는 건지, 아무리 하루 종일 섹스했다지만 미라는 어제부터 쭉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그게 오늘까지 이어져서, 지금은 맨몸에 팬티 그리고 면적이 작은 앞치마만 매고 있는 상태였다. 일부러 연출한 것 같기도 했지만, 노렸든 아니든 남자를 죽이는 자태라는건 마찬가지였다. 멋진 모습에 광석은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말을 건넸다.
"직접 요리한 거야?"
"응."
언제 준비한 건지, 맛있어 보이는 해물볶음밥이 미라의 손을 타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앞치마는 크기가 작아서 말랑말랑한 가슴을 절반 가까이 드러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분홍빛 유륜까지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해서 남자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었다. 슬슬 특정 부위에 피가 몰리기 시작한 광석이 손을 뻗자 엉덩이와 부드러운 팬티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더 진도가 나가기 전에 미라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씨익 웃었다.
"밥 먹고 하자. 그래야 끝까지 안 지치지. 무리하면 오히려 손해야."
"음, 알았어."
그녀가 팬티를 입은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는 말 잘듣는 아이가 되어 얌전히 식탁으로 향했고, 요리를 내온 미라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
식사 시간은 명백한 휴식 시간이었다. 미라는 광석이 중간중간 허벅지 등의 맨살을 더듬는걸 막지는 않았지만, 더 진도를 나가려 들면 부드럽게 달래주며 제지했다. 어제 워낙 오버하면서 끼니도 대충 때우고 휴식도 잘 취하지 않았기에 오늘은 조절해줄 필요가 있었다. 광석도 어제 성욕을 엄청나게 풀어서 그런지 비교적 얌전하게 굴었다. 미라의 말대로 무리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에너지를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미라의 솜씨는 제법 훌륭했다. 인스턴트로 대충 차린 것도 아니고, 레시피를 어설프게 따라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예쁘기만 해도 감사할 따름인데 성격도 좋고 요리도 잘 하니 광석은 사랑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밥을 먹은 후엔 같이 씻었다. 알몸으로 서로의 피부를 문지르니 박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았으나, 미라의 부드러운 제지에 결국 양치와 샤워를 모두 끝마치고 난 뒤에야 결합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울리는 욕실에서 물줄기를 맞으며 매끌매끌하게 몸을 비비고 하반신을 결합하는 것은 몇 번이고 다시 하고 싶은 기분 좋은 섹스였다.
씻은 후 깨달은 것은 미라가 타고난 자연미인이라는 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자애 치곤 화장기가 옅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씻은 후의 맨얼굴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서 받은 생얼의 충격 때문에 화장 안 한 얼굴을 굳이 볼 생각은 없었는데, 미라는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오히려 맨얼굴은 귀여운 인상을 줘서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자연 금발이야?"
"응. 딱 봐도 자연이잖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미라가 혼혈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어쩜 이렇게 예쁜 것만 물려받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라가 에메랄드처럼 예쁜 녹안을 강조하며 '이것도 자연.'이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들이밀자, 광석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맞췄다.
"츄웁, 으음."
"다른 털이 보였으면 딱 알아봤을텐데."
꿀처럼 달콤한 타액으로 입술이 번들거렸다. 광석은 은근히 털 한 가닥 없는 배꼽 아래쪽의 민둥산을 보며 말했다.
"아, 여기? 아무리 기다려도 털이 안 나더라. 그렇게 보면 좀 민망해?"
"아냐. 남자들은 좋아할 걸. 빽보… 아, 아냐."
광석이 말하려다 만 단어를 미라가 순진한 얼굴로 완성시켰다.
"빽 뭐? 백보지?"
"어? 어어, 응."
"히힛, 남자애들은 여자가 그런거 말할 때마다 반응하더라. 당황하거나, 아님 좋아하거나. 넌 어느 쪽이야?"
광석은 꽤나 개방적인 미라의 입술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갑자기 그래서 좀 당황스럽긴 한데, 네가 그러는건 좋은 것 같아."
"그래? 보지 보지 자지 보지. 아하핫!"
마치 유치한 단어에도 자지러지는 유치원생처럼, 미라는 야한 단어를 서슴없이 발음하며 아이처럼 꺄르륵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성인 여자의 상냥한 표정으로 변해서, 슬슬 박고 싶어서 꿈틀거리는 광석의 자지에 대고 물어봤다.
"얘. 자지야, 심심하면 우리 보지한테 놀러올래?"
허리를 숙이며 남자의 성기에 대고 묻는 미라는, 이내 광석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넌 진짜 요물이다, 요물."
미라의 제안을, 광석의 자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
흔히들 신병 휴가를 초에 비유한다. 신병 위로 휴가, 흔히 말하는 100일 휴가는 4박 5일이었을 땐 4.5초로 불렀고, 3박 4일일 땐 3.4초로 불렀다. 그만큼 일이등병의 휴가는 유독 빠르게 흘러간다. 휴가도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데, 고작 1박 2일 짜리 외박은 오죽하겠는가. 광석은 벌써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최고의 미녀와 질펀하게 뒹굴며 보내는 시간은 어떤 짓을 해도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짧게 느껴졌을 것이다.
해가 점점 산을 넘어가고, 복귀 시간이 다가오자 광석은 슬슬 섹스에도 집중을 못했다. 사실 꼭 복귀 때문은 아니었다. 너무 무리하게 연속적으로섹스를 해서 그 반동이, 이른바 현자 타임이 몸과 마음에 찾아온 것이었다. 펜션을 나와 슬슬 어스름해지는 시간대에 길을 걷는 중에 미라가 광석의 얼굴을 쓰다듬어줬다.
"불쌍해라."
얼마나 몸을 썼는지 걸음걸이도 어색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안쓰러운 것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그의 안색이었다.
당장 눈앞의 상황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고, 군인은 특히 더 그랬다. 미라는 더 섹스하는 대신 추억이나 좀 남겨줄까 생각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어제 버스에서 사진을 찍힌 일이 떠올랐다. 추억으론 그만한게 없었다.
"있잖아. 우리, 같이 사진이나 찍을까? 추억을 남기는 거야."
"사진?"
꽤 괜찮은 생각이었는지 광석은 흥미를 보였다. 목적지를 정하고 길을 좀 더 걷다보니 시골에선 나름 번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