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5. 델렌과 흑백 (1)
'우리가 피땀 흘리는 동안 신은 무얼 하는 거지? 믿음으로 안식을 준다면, 내게는 차라리 그가 신이지 않는가.'
성기사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신을 믿는 신실한 종교인. 그 중에서도 교단을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서 싸우는 성기사가 할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성기사가 지칭한 '그'는 엄연히 살아있는 젊은 남자였으므로.
그러나 그런 불경한 생각을 했음에도, 성기사에겐 신의 천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천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성기사의 입에 비릿한 비웃음이 맺혔다. 뒤틀린 미소를 짓는 입술 사이로, 이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신을 왜 믿어야 하는가? 엄격한 억제만 있고 믿음의 대가가 없다면, 바위 덩어리를 섬기는 것에 비해 무엇이 더 나은가?"
이번엔 생각으로 멈추지 않고,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기를 잠재우는 엄마의 자장가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놀랍도록 불경함으로 가득찬 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천벌은 없었다. 하늘이 벌주기는 커녕, 근처에 있는 동료 성기사조차 감히 그녀를 벌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둘러싼 이들이 마치 달려들 것처럼 몸을 움츠리고 자세를 낮추는 것이 보였다.
마치 이리 떼와 같은 그 모습에 성기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번에는 조롱하는 비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새하얀 치아가 활짝 드러난다.
"하하하! 아하하하!"
기뻐서 크게 웃는다. 성기사의 커다란 가슴이 마구 들썩였다. 그녀가 갑옷과 방패, 그리고 흉흉해 보이는 메이스로 무장하지만 않았어도 미친 사람처럼 구는 그녀를 사람들은 곧바로 제지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신이다."
스르릉!
"감히!"
"오만이 끝을 모르는군!"
"우리 모두를 죽일 순 없을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한 신의 충실한 종 하나가 검을 뽑고 성기사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이 나서자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아홉, 열… 스물, 스물 하나…. 신자들이 신의 심판을 자처하며 눈덩이처럼 불어나 성기사에게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다가오는 '천벌'에, 성기사는 감히 맞섰다. 그리고….
퍼억! 콰악! 콰직! 우지직! 콰득!
부서진 철조각과 시뻘건 핏물, 뼛조각, 살점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러나 그것은 신을 모독한 이단자의 것이 아니었다. 충실한 신의 종들이 조각조각 분쇄되며 불나방처럼 '순교'하고 있었다.
성기사는 증명했다.
그녀의 뒤틀린 믿음을. 그리고, 그 믿음을 관철할 힘을.
"내겐 차라리 그가 신이다."
더 이상, 그녀의 신성 모독을 제지할 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의 독백을 들어주는 청중 또한 없었다.
…
"헤에…."
델렌. 델렌 한. 용사의 다섯 여자 중 하나. 여자들 중 키와 가슴이 가장 크고, 여자들 중 가장 아래를 홀로 자처하는 자. 전직 성기사. 현직….
"야, 델렌. 왜 그렇게 느긋한 거야. 오늘 VIP 접대인거, 알고 있지?"
"물론이지. 흥흐흥~."
"콧노래는 씨발, 준비나 해!"
델렌의 동료가 그녀를 재촉한다. 짙은 화장을 한 동료는 몸을 가린다는옷의 기능을 부정이라도 하듯, 입은 것보다도 더 야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나야."
나나는 동료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동료를 부르는 델렌의 말투는 마치 애완동물을 부르는 것처럼 느긋하고 나긋했다. 나나는 바쁜 와중에도 느긋하게 구는 델렌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 왜!"
"일 하는거, 재밌어?"
"뭐라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진짜 뒤질래?"
씨발년이.
입이 험한 나나가 곧바로 욕을 덧붙였다.
"씨발년…?"
델렌은 그 뜻을 곱씹었다. 씹을 할 년, 줄여서 씨발년. 씹은 섹스를 뜻하니까, 섹스할 년이라는 뜻이잖아. 델렌은 오! 하고는 박수를 딱 쳤다.
"나나야."
"아, 또 뭐야."
"생각해보니까, 씨발년은 나한테 욕이 아니야. 사실이잖아!"
"미친년."
"힝. 그것도 욕이 아닌 것 같아. 인정하긴 싫지마안."
"병신년."
"으응…. 내 몸은 엄청 건강하니까… 그건 욕이 맞으려나?"
델렌은 마치 놀리는 것처럼 욕설에 하나하나 코멘트를 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틀림없이 시비 걸거나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사실 델렌은 순수한 감상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말을 딱히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게 특징이었다. 나나도 델렌의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나나야."
"하아…."
드디어 욕을 멈춘 나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델렌을 콱 잡고 끌고 갔다. 그 와중에도 델렌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나나를 멍하니 보던 델렌이 그녀의 볼에 쪽 뽀뽀했다.
"난 네가 좋아."
"아아, 진짜 짜증나!"
둘의 태도에 있어 흥미로운 점은, 나나는 짜증을 내면서도 은근히 델렌을 잘 챙겨준다는 점이었다. 둘이 친하냐고 물어보면 나나 본인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누가 봐도 둘은 꽤 친해 보였다.
"나나야."
"…또 뭔데."
"일, 재밌게 하자."
"난 모르겠고, 넌 항상 존나 재밌게 일하더라. 오늘도 꼭 즐겨라."
어느새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한 둘. 문 위에는 [VIP 룸]이라고 짤막하게 써있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방. 손님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접대도 아무나 할 수 없었다.
"델렌."
"어, 응?"
모처럼 나나가 먼저 불러주자 델렌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러나 그 입에서 상냥한 말이 나올 일은 없었다.
"이제 그만 닥치고 몸이나 팔아, 창년아."
"음."
일반인에겐 수위 높은 욕설이었으나, 델렌은 오히려 웃으며 장난스럽게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했다.
"옛 썰."
델렌. 용사의 여자, 초인급 마나 유저, 전직 성기사, 그리고….
현직, 창녀.
…
골든 비치. 델렌의 직장. 비치는 해변의 비치(beach)이기도 했고 암캐의 비치(bitch)이기도 했다. 언어유희를 위해 일부러 영어가 아닌 한글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16층의 커다란 빌딩 중 1층부터 4층까진 일반 상가였고 5층부터 꼭대기 까지가 골든 비치였다.
골든 비치는 가격이 평범한 가게보다 훨씬 비쌌지만 그만큼 질이 좋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싼 '상품'이 바로 VIP룸에 전속 근무하는 나나와 델렌이었다. 순위를 매기자면 1위가 델렌, 2위가 나나였지만 1위와 2위의 격차는 압도적이었다. 델렌이 골든 비치의 에이스라는 뜻이다.
델렌의 장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굳이 꼽으라면 첫째는 포용력이었고 둘째는 내구성이었다.
"양팔 붙잡아."
험난한 세상에서 베짱이마냥 느긋하고 유순한 성격은 여자가 아닌 창녀로서도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골든 비치에서 포용력은 곧 취향의수용을 뜻했다. 델렌은 일반인 축에 속하는 손님들이 가질 법한 성적 취향들을 대부분소화했다. 딥 쓰롯이나 애널 플레이 정도는 능숙하게 할 수 있었고, SM 플레이 중 M 역할도 잘 소화했다. 정말 죽도록 두들겨 패지 않는 이상엔 고통도 잘 느끼면서 받아들이며, 아프면서도 느끼는그 표현력이 수준급이었다. 그 외에도 골든 샤워라던가 목조르기, 속박 플레이 등등… 신체가 손상되는 하드코어 플레이나 배설물과 관련된 더티 플레이 같은걸 제외하면 대부분 좋아하는게 장점이었다. 이게 하드코어 야설이었다면 델렌의 이 장점이 마음껏 발휘됐으리라.
두 번째 장점인 내구성은, 말 그대로….
"간다."
처업!
"끄흑!"
미끌미끌한 오일이 발린 복부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델렌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온몸의 근육이 오그라들며 바르르 떨린다. 하지만 양옆에서 각각 팔을 붙잡고 있는 두 여자 때문에 뒤로 밀려날 수도, 맞지 않기 위해 버둥거릴 수도 없었다. 그저 삼키지 못한 침이 입가에 주르르 흘러내릴 뿐이었다.
정면에 선 남자는 씨익 웃으며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초점이 흐릿해진 델렌의 연갈색 눈동자에 다시금 꽉 쥐어진 단단한 주먹이 비친다. 그녀의 얼굴에 공포감이, 그리고 일말의 기대감이 떠오른다. 그걸 캐치한 남자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희열로 가득찼다.
"다시, 꽉 붙잡아."
다시금, 처억! 주먹이 꽂혔다. 그나마 오일이 발려있어서 충격이 약간이라도 줄어드는게 델렌으로선 다행이었다.
….
….
"델렌. 이리 와."
"히잉. 미워. 아팠어요."
"하하, 내가 오늘 좀 흥분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화해의 뽀뽀, 어때?"
성숙해 보이는 여성의 앙탈. 언뜻 보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척 같기도 했으나, 그게 그녀의 진정한 매력인 백치미인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델렌의 복부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남자는 아까의 흉흉한 기색을 지우고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델렌을 제 품으로 이끌었다.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고 부드럽게 말하자 델렌이 마지못해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VIP룸에 옷을 입은 사람은 없었고, 가까이 앉은 남녀의 맨살이 꼬옥 맞닿았다.
남자의 옆에 앉은 델렌은 익숙한 동작으로 자기 입에 술을 털어넣은 뒤, 마우스 투 마우스로 남자에게 술을 넘겨줬다. 얼굴이 벌개진게 딱 봐도 취기가 한껏 도는 남자가 델렌에게 말했다.
"평소보다 엄청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왜 그래?"
"그건 때린 사람 생각이구요오."
"아이구, 그래. 그렇구나. 많이 아팠어?"
"으음, 아뇨. 조오금?"
델렌이 엄살을 부렸지만 남자나 룸 안의 다른 사람들 모두 그녀가 거의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여러 가지 음습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도 델렌의 맷집에는 혀를 내둘렀다. 여자를 때리는 가학적인 플레이는 보통 다치지 않도록 도구를 써서 하는데, 델렌은 남자에게 맨주먹으로 복부를 퍽퍽 얻어맞아도 항상 멀쩡했다. 온몸이 딱딱한 근육으로 가득한 보디빌더도 아니고, 딱 만지기 좋게 탄력적인 정도인데 말이다.
그녀의 불가사의한 맷집은 골든 비치의 최대 미스테리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았다. 그것 때문에 찾아오는 VIP가 꽤 많이 있었고, 그로 인한 이득 역시 상당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아프니?"
의자에 편하게 앉아있음에도 군살 하나 삐져나오지 않는 델렌의 복부를 남자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내장까지 상했을만한 남자의 주먹질은, 델렌의 복부에 멍자국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남자는 한두번 겪은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기하다는 듯이 델렌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참 신기한 몸이야. 나도 그렇게 맞으면 죽는 소리가 나올 텐데. 너 진짜 몸 팔게 아니라 가서 격투기 선수라도 해야 되는거 아니냐?"
"에? 싸우는건 싫은데요오."
델렌이 느릿하고 말꼬리가 늘어지는 그녀 특유의 말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전 가학적인 욕구를 마구 풀어낸 남자는 한껏 부드러워진 표정과 자상한 말투로 델렌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알맹이 없는 시시콜콜한 얘기였으나 남자는 충분히 즐거워 보였고, 델렌은 여전히 천진한 얼굴로 남자를 상대했다. 남자가 마치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처럼 델렌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하아, 진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니까. 델렌. 이리저리 몸 팔지 말고 나한테 와. 얼마를 불러도 괜찮으니까. 난 내 여자한테 돈 아끼는 스타일 아니거든. 어때?"
"싫어요."
"아니, 왜? 이유라도 좀 알려줘."
델렌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이켰다.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하지만 완전히 침묵하는 대신 몇 가지 힌트를 건넸다.
"일단 한 사람에게 얽매이는건 싫고요. 으음… 골든 비치에 빚이 좀 있어서? 돈으로 갚을 수 없는 빚. 대충 그런 이유에요."
"하, 진짜 아쉬운데. 어쩔 수 없구나. 너무 질척거리는 것도 싫겠지?"
남자가 자신의 탐욕을 자조했다. 하지만 델렌은 멀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헤에, 그래도 나 좋아서 그러는 거면 싫진 않아요."
"…음."
화악!
앉아있던 델렌이 순식간에 밀쳐저 소파에 눕혀졌다. 남자의 튼실하게 선 자지가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뜨겁게 솟아올라 있었다.
"못 참겠다, 이 요물 년!"
즈컥!
"으으응~."
델렌은 오늘도 즐거운 나날을 보내며 1등 창녀로서 골든 비치의 매출을 잔뜩 올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