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0화 〉#5. 델렌과 흑백 (2) (100/162)



〈 100화 〉#5. 델렌과 흑백 (2)

쏴아아….


여자들의 숙소. 긴 밤을 보낸 뒤, 여자들은 술과 땀으로찐득찐득한 몸을 이끌고 쉴 곳으로 돌아갔다. 골든 비치에서는 관리하기 편하도록 4인실이나 6인실을 내주는게 일반적이었지만, 엄청난 매출을 올리는 넘버 원과 넘버 투는 특별히 2인실을 쓰게 해줬다. 그냥 2인실도 아니고, 다른 방의 두세배는 되는 크기의 2인실이었다. 그만큼 그녀들이 가져다주는 이득은 엄청났다.

끽.


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나나는 여전히 온갖 체액으로 더럽혀진 채 누워있는 델렌을 보고 질렸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안 찝찝하냐?"

"응. 익숙해서 딱히."

새하얀 도화지 같던 델렌의 몸은 마치 물감을 군데군데 찍은 것처럼 붉은 자국과 허옇게 말라붙은 자국으로 가득했다. 나나의 몸에 난 자국에 비해 훨씬 많았다. 델렌이 얼마나 많이, 얼마나 거칠게 사용당했는지 한 눈에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나나는 씻기 귀찮아하는 델렌을 잡아 일으켜서 욕실에 던져버리고는 이이잉 하는 앙탈을 뒤로 한채 자기 침대에 누웠다.


'넘버 투는 무슨.'

골든 비치에서 델렌이 가지는 위상은 엄청났다. 북적거리는게 싫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2인실을 배정해줬고, 심심하다는 말에 원하는건 대부분 갖다줬다. 문짝을 가로로 눕혀놓은듯한 대형 TV나 게임기가방 안에 들어왔고, 컴퓨터도 빵빵한 것으로  대 배치됐다. 일개 창녀에게 베푸는  치고는 스케일이 엄청났다.

델렌이 무슨 매출의 절반 이상을 당겨와서 그런게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VIP룸만을 담당하며, 돈이든 권력이든 힘을 가진 남자들을 상대한다. 외모도 엄청났지만 특히나 하드한 플레이를 능숙하게 받아들였기에 단골이 많이 생겼고, 델렌에게 껌뻑 죽는 VIP가 수두룩했다. 그녀와 즐기려면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수많은 단골들이, 엄청난 매상은 물론이고 돈으로  수 없는 것들을 골든 비치에 헌납한다. 빌딩 하나를 거의 다 쓰면서도 사업에 이렇다할 태클을 받지 않고 돈을 쓸어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2위가 된 것은 물론 뛰어난 자질도 있었지만, 델렌이 가장 좋아하는 동료라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 1위를 보필하라는 의미의 2위인 것이다. 하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가끔씩은 애 돌보는 보모 같다는 느낌도 받지만, 그래도 그녀와 지내다보면 순수한 친구 하나를 사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창녀와 순수함은 도저히 연결 고리가 없어 보였지만, 델렌은 달랐다. 델렌은 특별하니까.

….

샤워를 마친 델렌이 문을 열고 나왔다. 마치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그녀의 나신이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물기가 살짝 남은 몸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촉촉해 보여서, 남자가 있었더라면 분명 달려들어서 맛보고 즐겼을 것이다. 이런저런 말라붙은 자국들을 닦아내니 델렌의 몸에 남아 있는 것들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배꼽 주변을 선명하게 두르고 있는 문신. 그녀의 배꼽 왼쪽을 둥글게 두른 꽃과 나비 문신이, 도화지처럼 순결해 보이는 그녀의 피부에 퇴폐미를 한껏 끼얹고 있었다.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본 상당수의 고객들은 델렌의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피부를 좋아해서 더 이상 문신을 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배꼽 주변의 문신이 눈에 띄었다. 달콤한 꿀을 찾아 날아드는 나비 그림은 마치 델렌의 상황을 보는 듯해서  어울렸다.

마나 유저의 신체 복원 능력은 상당해서, 어지간히 깊게 새긴 문신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몇 주 내에 다시 뽀얀 살로 채워진다. 그럼에도 델렌의 문신이 지워지지 않고 이렇게 오래 버티는 이유는, 레이아가 새겨진 문신에 추가로 마법을 덧씌웠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원리를 통해 문신이 남아있게 만들었다는데 델렌은 별 관심이 없어서 기억하지않았고, 아무튼 용사의 여자들 중 유일하게 문신을 갖게 됐다. 고고하고 순결한 여자들 사이에서 퇴폐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 것을 델렌은 썩 좋아했다. 그녀는 특유의 멍한 분위기와 백치미 때문에 실제 성격과는 무관하게  순진해 보였기 때문이다.

봉긋 솟아있는 가슴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며 문신에 대해 생각하던 델렌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침대에 쏙 들어갔다.


"…왜 일로 오냐."

"나나야. 같이 자자."

"하…."

"나 내일부터 휴가인건 알지?"

델렌의 말에 나나가 짜게 식은 눈으로 델렌을 흘겨봤다.


"물론이지. 근데, 나도 내일부터 휴가인건 알지?"

"어? 어어?"

"썅년아. 같이 나가자고 저번에 말했잖아."

"어…. 아, 맞다."

"멍청한 년."

델렌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기뻐하며 나나를 꼭 끌어안았다.


"헤헤, 같이 나가네. 어디 놀러갈까?"

"같이 가긴 어딜 가. 난 혼자 집에 갈 거야. 그리고 허벅지에 보지 문대지 마라. 뒤지기 싫으면."

"히잉, 문댄건 아닌데…."

"아, 됐고. 나 졸리니까 좀 닥쳐. 잠 좀 자자."

나나는 그렇게 말하곤 똑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델렌은 심심한 건지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려 했으나, 짜증난 나나가 으르렁거리자 곧바로 입을 뚝 다물고 나나를 옆에서  끌어안았다.

누가 봐도 죽이  맞는 둘은 그렇게 사이 좋은 자세로 잠들었다.





"저, 궁금한게 있습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며 용사 일행을 둘러싸던 냉기와 칠흑같은 어둠을 걷어냈다. 불꽃의 온기와 빛이 몸에 닿았고,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잡담을 나눴다. 용사, 미라, 델렌, 지나, 아리스.  다섯 명. 당시 레이아는 아직 파티에 합류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파티에 합류한 아리스는 그녀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델렌에게 질문했다.


"으응? 뭔데."

"델렌 님은, 그… 성기사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신성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니까."

현역 시절의 델렌은 은근히 차가운 면이 있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예리해서,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흠칫했다. 그러나 델렌이 동료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몇 년 째 겪고 있는 골치 아픈 일 때문에 항상 날카로운 감각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리스는 그녀의 상황을 십분 이해했기에, 설령 매섭게 자신을 훑어보더라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왜…."

아리스가 바닥에 놓여 있던 검집을 조용히 움켜쥐며 모닥불 밖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리고, 스르르 일어서며 하던 말을 끝맺었다.

"교단이 이토록 집요하게 추적하는 겁니까."

스륵, 사사삭.


수십 개의 발소리. 조용하던 야영지가 낙엽 차는 소리와 수풀 소리로 요란해졌다. 어둠 저편에서 튀어나와 용사 일행을 둘러싼 십수 명의 괴한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낸  '적'에게 겨냥했다. 수십 개의 예리한 칼날이 오직 한 사람을 겨눴고, 자신에게 집중되는 짜릿한 살기를 느낀 델렌은 차갑게 씨익 웃었다.


"그건 말이지."

용사 일행은 익숙하게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서로가 등을 맞댄  수적 열세에 전혀 개의치 않고 전의를 차갑게 불태운다. 하나 같이 신을 믿는 하수인들을 상대하는 것 치고는 덤덤하고 익숙해 보였다. 델렌은 옆에 있는 아리스에게 찡긋, 윙크해 보였다.

"나도 쟤네도, 서로를 아주 죽도록 사랑하거든.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동료에게 옅은 미소를 보인델렌은 그대로 쏘아지듯 앞으로 돌진하여  누구보다도 파괴적으로 적들을, 교단의 개들을 분쇄했다. 교단의 기사들은 메이스에 머리가 으깨지면서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고, 델렌은 마치 새디스트처럼 잔혹하게 웃으며 그들의 조용한 고통을 지독히도 즐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