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5. 델렌과 흑백 (3)
"밤에 전화로 위치 보고하고."
"네."
"넹."
매니저의 형식적인 잔소리. 휴가 중에도 연락망을 유지하고 위치를 보고하라는 지시는 마치 군대를 연상시켰다. 실제로 골든 비치는 그런 식으로 그녀들을 관리했다. 모든 여자들에게 그러는게 아니라 업소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여자에게만 이렇게 특별하게 관리를 하는 것이다. 감시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혹시 모를 불의의 사태를 대비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만큼 둘은 중요했다. 특히 델렌은 업소를 상징하는 보물이었기에.
"그럼 가 봐. 잘 놀다 와."
"넹. 나중에 봐요, 오빠."
델렌이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흔들자 매니저도 따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델렌은 손님 뿐만 아니라 직원들 사이에서도 예쁨을 독차지했다. 음지에서 몸파는 년 답지 않게 해맑은 태도가 마치 나긋나긋한 햇살처럼 직원들의 딱딱한 마음을 녹인 것이다.
물론 외모로 벌어먹는 이 바닥에서도 압도적으로 빛나는 외모가 인간관계에 큰 역할을 하긴 했다. 델렌의 외모는 예쁘기도 예쁘지만 꽤나 청순한 편이어서 인기가 많았다. 물티슈로 박박 문질러도 안 지워질 것 같은 두꺼운 화장을 한 계집들이 가득한 곳에서, 화장기 별로 없이 타고난 얼굴 만으로 1등을 먹은 델렌은 사실상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다. 진흙탕에 핀 연꽃과도 같은 아름다움에 고객들은 물론이고 음지에서 삶에 찌든 직원들도 그녀 앞에선 씨익 웃어주는게 일상이 됐다.
둘은 평소에는 평소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1층에서 5층까지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로 갈아타 건물 밖까지 나갔다.
"후아아."
"흐음."
델렌과 나나는 모처럼 맡는 바깥 공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숨을 한껏 들이켰다. 평소에도 옥상이나 발코니를 통해 얼마든지 바깥 바람을 쐴 수 있었지만, 자유와 함께 만끽하는 지상의 바깥 바람은 확실히 달랐다.
"기분 좋아 보여."
"뭐, 그렇지."
나나가 보기 드물게 델렌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창녀 일에 찌든 편이었지만, 분명 아직 한창인 젊은 여자였고 감성과 감정 표현이 풍부할 나이였다. 친구가 모처럼 기분 좋아보이자 델렌 역시 방긋 웃으며 나나의 손을 잡았다. 둘이 절친처럼 사이좋게 걸어나가려던 찰나, 입구를 시커먼 그림자가 막아섰다. 그의 정체를 알아본 둘의 표정이 묘했다. 특히 델렌은 딱딱하게 굳어서 직원들에게 꼬박꼬박 잘 하던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아…."
"어… 사장님. 안녕하세요."
사장, 윤서준. 골든 비치의 1인자. '회장님'의 아들. 그리고, 델렌의 전 남친. 나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치를 봤다. 골든 비치 내에서 둘의 묘한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 나나. 휴가 가니?"
"네…."
"그럼 잘 갔다 오렴. 난 델렌을 바래다줄 테니까."
델렌과 윤 사장님. 사이 좋은 연인이었다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지금은 전에 사랑했던 만큼이나….
그러나 나나는 순순히 말을 듣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서준의 말투 자체는 부드러웠으나, 마치 길을 막는 방해물을 보는 듯한 냉랭한 눈빛이 두려웠다.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델렌, 나중에 보자."
"응. 안녕~."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드는 델렌. 이윽고 제 3자가 사라지자 서준은 본색을 드러냈다. 표정은 무표정했으나 눈빛과 분위기는 딱딱하고 냉랭했다.
"휴가 가냐?"
"네."
싸늘하고, 상대방을 경멸하는 듯한 말투. 델렌은 평소처럼 발랄하게 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눈마저 마주치려 들지 않자 그가 눈을 들라고 명령했다. 강압적인 말투에 움찔한 델렌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서준과 눈을 마주쳤다.
분노, 증오…. 델렌이 평소에 받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익숙한 건지 묵묵히 그 감정 어린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눈동자를 한층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서준의 또다른 감정이 보였다. 소유욕, 지배욕, 그리고 애증.
착, 착.
서준이 델렌의 뺨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리진 않았지만, 그의 손짓에 따라 델렌의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딱 기분 나쁠 정도의 세기. 그러나 동그랗게 떠진 델렌의 예쁜 눈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델렌의 눈을 지긋이 노려보던 서준은 엘리베이터를 잡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따라와."
"네."
둘의 분위기는 마치, 주인과 주인에게 밉보인 노예 같았다.
…
윤서준. 181의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 잘 나가는 중견 기업 사장의 아들. 대기업처럼 휘황찬란하진 않아도, 평생 어디서 꿀린 적은 없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 원한다면 당장 일시불로 고급 외제차를 뽑을 수 있을 정도로 가진게 많았고, '골든 비치'를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금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고작 31세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그는 열정이 식었다. 너무나도 빠르고 손쉬운 성공 때문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이었다. 정확히는 실연 때문에.
또각, 또각.
발소리가 묵직하게 울리는 지하주차장에서 서준은 평소 타던 외제차 대신 몇 배는 저렴한 국산 고급 세단 쪽으로 걸어갔다. 주로 눈에 띄지 않아야 할 일, 사적인 일을 할 때 사용하는 차량이었다. 그는 길가에서 누가 알아볼 정도의 유명인은 전혀 아니었지만, 항상 최악을 염두하는 아버지의 성향을 물려받아서인지 세세한 것에도 신경을 썼다. 떳떳하지 않은 음지의 업소, 골든 비치의 사장이었기에 조심하는 면도 있었다.
서준과 델렌은 자연스럽게 각각 운전석, 조수석에 앉았다. 델렌이 가지고 있던 캐리어는 트렁크에 들어갔다.
"어디 가냐."
"사장님도 아시는 곳이요."
델렌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말끝을 늘리거나 생글거리고 눈웃음을 짓지 않았다. 서준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게 아니라,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밉보인 델렌이었기에, 서준은 조심하는 모습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잡아먹냐? 왜 답지 않게 굳어 있어."
"…."
차의 시동이 걸렸으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던 차량의 시동이 꺼졌다. 델렌이 조심스레 흘끗 보니, 서준은 대놓고 델렌을 훑어보고 있었다. 델렌은 눈이 마주쳤음에도 아무 말 없는 서준의 눈빛이 불편해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왜요…."
"걸레 같은 년이 청순한 척 차려입은게 마음에 안 들어서."
모처럼의 휴가를 맞아 차려입은 델렌은 마치 여대생처럼 청순하고 어려보였다. 화장기가 연해서 앳되어 보였고, 옷도 캐주얼하게 잘 입어서인지 그녀의 정체가 골든 비치의 에이스 창녀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서준의 손이 델렌의 상의에 거칠게 파고들었다. 목 안으로 파고든 억센 그의 손이 델렌의 가슴을 예쁘게 받쳐주던 브래지어를 능숙하게 약탈해갔다. 하필이면 프론트 후크여서 서준은 보다 손쉽게 그녀의 속옷을 빼앗을 수 있었다.
속옷 안에 갇혀있던 유두가 옷 위로 툭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상의도 얇은 편이어서 통통하게 솟아 있는 유두가 아주 잘 보였다. 곱게 접어 뒷좌석에 놔둔 외투를 입는다면 가려지겠지만, 아마 서준이 그렇게 놔둘 것 같지 않았다.
"아…."
"이제 좀 마음에 드네. 팬티도 벗어."
델렌은 머뭇거렸으나 서준이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로 재차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치마를 입었기에 안에 손을 넣어 바로 팬티만 벗으면 됐다. 시트에 앉은 채로도 충분히 벗을 수 있을 정도로 치마 길이도 짧았다. 델렌은 스윽 벗어내린 팬티를 조용히 서준에게 제출했다.
돌돌 말아서 꼭 쥐면 한 주먹 안에 들어올 만큼 작고 얇은 팬티. 오늘 아침에 꺼내 입었을 텐데, 벌써 섬유 유연제의 향보단 델렌이 가지고 있는 달콤한 여인의 향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속옷을 빼앗기고 움츠러든 델렌은 서준에게서 평소에 비해 월등히 강해진 애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전히 밉긴 밉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하고 몸을 탐하고 싶은 것이었다. 특히나 몸을 원하는 남자의 욕망이 아주 강렬해 보였다. 육욕 역시 사랑의 밑거름 중 하나였고, 남녀가 성애(性愛)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였기에, 델렌이 보기엔 서준의 눈에서 사랑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준이 델렌의 입안을 뱀처럼 파고들어 순식간에 탐했다. 침을 약탈해가고, 반대로 침을 흘려보내 억지로 삼키게 만들었다. 속살 만큼이나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혀를 마구마구 핥고 빨면서, 마치 꽃에서 꿀을 찾는 나비처럼 델렌을 마구 탐했다. 격렬한 타액의 향연에 델렌은 머리가 어질할 정도였다.
"하아, 하아…."
둘 다 숨을 헐떡일 정도로 격렬한 키스였다. 서준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마치 뱀파이어처럼 델렌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갔다. 아플 정도로 세게 빨아들이는 감촉에 델렌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잠시 후, 서준이 입을 떼자 델렌의 목덜미에 새겨진 불긋한 자국이 드러났다. 서준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시를 내린다.
"머리 옆으로 넘겨. 키스 마크 잘 보이게."
"…네."
쇄골까지 내려오는 진노랑색 머릿결이 델렌의 손에 의해 옆으로 넘겨졌다. 지독하게 빨린 왼쪽 목덜미가 드러난 언밸런스 헤어가 이질적이었다.
델렌의 청초한 얼굴과 한쪽으로 넘긴 생머리가 잘 어우러져 청순한 여대생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마치 일부러 보여주는 것처럼, 드러낸 목덜미에 짙게 남아 있는 키스 마크와 가슴쪽에 선명하게 도드라진 유두가 그런 밝은 분위기를 순식간에 덮어 버렸다. 높을수록 세게 추락하는 것처럼, 청순한 이미지에 음란한 이미지가 덧씌워지니 더더욱 야해 보였다. 델렌은 조금 과장해서 수치심을 모르는 걸레처럼 보였다.
"좋아."
만족한 서준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