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5. 델렌과 흑백 (6)
하이라크 교단. 정의와 규율의 신 하이라크를 섬기는 이들이 만든 교단. 판타지 세계는 여러 종교가 왕성하게 발전했었으나, 마왕과의 긴 전쟁이 이어진 후에는 하이라크 교단만이 남았다. 이유는 신성력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신성력은 종교에서 다루는 특이한 성질의 마나였고, 각 종교마다 신성력의 성질이 조금씩 달랐는데, 하이라크 교단의 신성력이 마왕군에게 압도적으로 효율적이었다. 수 년 전, 온 세상을 위협하는 마왕군의 침략에 대응해 모든 종교가 칼을 뽑아들었고, 재앙이나 다름없는 지독한 소모전을 치른 후에는 하이라크 교단만이 세를 잃지 않고 온전했다.
원래부터 하이라크 교단은 급진적 강경파에 속해서 무력 사용과 성기사 육성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전쟁 전에는 무자비한 이단 심문으로, 전쟁 후에는 강력한 신성 군단으로 그 위세를 떨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단은 전쟁을 밑거름으로 크게 성장했고, 교단의 심장인 성도 미카엘라는 도시에서 국가로 거듭났다. 델렌이 성장할 무렵엔 하이라크 교단만이 유일하게 건재한, 아니 강성한 종교 국가였다. 그 모습은 군사 강국만이 살아남아 다른 나라들을 흡수한 비종교권 신흥 강대국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때문에 소녀 시절의 델렌은 교단의 성기사를 동경했다. 과거가 어땠건 지금은 마왕군을 가장 잘 상대하는 세력이었고, 성기사는 델렌에게 가장 든든한 존재였다. 번쩍이는 성기사의 순백의 갑옷은 어린 아이들이 동경하지 않을 수 없는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했다. 델렌의 아버지가 독실한 신학자인 것도 델렌이 교단에 몸을 담게 되는 강력한 계기 중 하나였다. 성기사를 지망한 데에는 여러한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강력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어렸을 때, 델렌은 길가에서 여자 성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비록 덩치는 남자들에 비해 작았지만, 여성용으로 제작된 은빛의 갑옷은 더 아름다워서 델렌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했다. 동료인 남자 성기사들이 서슴없이 다가가 친근하게 구는 모습에서 델렌은 남녀의 경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미래의 델렌이 봤더라면 이상하리 만치 터치에 거리낌이 없는 남자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너무 뻣뻣하게 서있는 여자 성기사의 굳은 모습에서 분명 무언가를 알아챘겠지만 그때의 델렌은 순수한 어린 아이였다. 그저 여기사도 실력만 있으면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구나,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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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를 맞이한 델렌은 결국 교단의 성기사를 자원했고, 뛰어난 마나 유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단번에 수습 기사 과정을 밟게 됐다. 평생을 수습 기사로 머무는 재능 없는 이들도 있었지만, 델렌은 자신에겐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열심히 훈련하고 훈련했다.
당장 델렌을 건드리는 이들은 없었다. 가끔씩 짓궂게 성희롱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고개를 푹 숙여서 빨개진 얼굴을 감추면 더 놀리진 않았다. 마치 조카를 놀리는 삼촌 같은 모습이었고, 델렌은 부끄럽긴 했지만 다 친해져서 장난치는 거라며 오히려 안심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는 날이 갈수록 미녀로 거듭났다.키가 훌쩍 커졌고, 가슴이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서 곤란할 지경이었다. 골반 역시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유려한 곡선이 형성되었고, 소녀 역시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이 기쁘게 느껴졌다. 한창 때의 소녀만이 가질 수 있는 싱그러운 자태. 소녀처럼 순수하고 어른처럼 요염했다. 델렌은 자신을 향한 남자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꼈지만, 아직 순수했기에 예뻐지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렸다.
동경했던 아름다운 여자 성기사의 길. 소녀의 장밋빛 미래가 깨진 것은 초경을 시작한 이후였다.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가 성도 미카엘라로 떠난 시기와 겹쳤다. 부녀가 헤어지던 날, 델렌의 아버지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며 델렌에게 기나긴 이별을 고했다. 보호자마저 사라진, '여자'가 된 소녀. 마침내 남자들은 신사의 탈을 벗고 짐승으로 거듭났다. 얼마 전에 여자가 된 것을 축하받았던 소녀는, 그날 여자로서의 '신고식'을 아주 모질게 당했다. 그녀가 울상만 지어도 껄껄 웃으면서 봐주던 어른들은 충격과 공포로 울부짖는 소녀를 절대 봐주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른 새벽부터 찢어질 것 같은 사타구니의 고통을 참고 추기경에게 찾아간 델렌은, 오히려 그 늙은이가 더한 놈이라는 것을, 악의 근원인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 후. 델렌은 자기 편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한달 후. 델렌은 이 지옥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삼개월 후. 델렌에게서 순수함이 사라졌다. 점차 표정을 잃어갔다.
반년 후. 델렌은 더 이상 자신을 성기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창녀조차도 고개를 가로저을 화장실의 배설구로 생각했다.
1년 후. 델렌은 소속 지부 뿐만 아니라 하이라크 교단 전체가 썩었음을 깨달았다. 성도에서 내려온 고위급 신관에게 접대부마냥 다리를 벌려주면서 느낀 점이었다.
2년 후. 델렌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경지가 상당히 오른 것을 느꼈다. 이따위로 죽지 못해 사는 데도 성기사로서의 자질과 신성력은 점점 더 빛나기 시작했다. 수련을 게을리 하지만 않으면 항상 성취가 뒤따랐다.
3년 후. 무언가를 깨달은 델렌은 남는 시간을 쥐어짜내어 죽어라 수련했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자, 급이 낮은 놈들은 더 이상 자신을 건들지 못했다. 델렌은 수련광이 됐다.
4년 후.
5년 후.
6년 후.
7년 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늘어난 것이라곤 나이와 실력과 성경험 횟수 뿐이었다. 더 이상 잔챙이들에게 당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급 높은 이들이 더 많이 탐했다. 범해지는 시간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진이 다 빠지는 윤간 대신 한두 사람과 진득하게 몇 시간을 성교하는게 달라진 점이었지만, 그걸 발전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8년 후. 여전히 달라지는건 없었다. 그러나 마치 만개하는 꽃처럼, 그녀의 재능이 더더욱 발전했다. 지부의 다른 성기사들 중 델렌보다 뛰어난 이가 없었다.
9년 후. 놀랍게도 더더욱 실력이 발전했다. 이제는 감히 그녀에게 도전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식 성기사로 서임되는 일은 없었다. 수습 기사는 지부에서 자율적으로 다룰 수 있지만, 정식 성기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이리저리 파견되기 때문이다. 델렌을 독점하기 위해 추기경이 앞장서서 델렌의 실력을 평가절하 했다. 지부의 모든 기사들이 공범이었다. 그러나 델렌은 부당한 조치에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반짝이던 갈색 눈이 탁하게 죽은 것은 한참 옛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하루 종일 섹스하고 수련할 뿐이었다.
10년이 되는 해.
그 사건이 일어났다.
…
델렌은 분명 영웅이 될 수도 있는 인재였다. 하루 종일 남자에게 시달렸음에도 남는 시간을 짬짬이 아껴서 기사 수련을 했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자 잠을 줄여가며 신학을 공부했다. 단순한 신체 단련이나 기사 훈련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신학자인 아버지의 저서를 몰래 구해 신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시작한 델렌은 모처럼 성취감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성적으로 종교의 근본을 탐구하는 것은 이제껏 이러저러한 일에 몸만을 써왔던 델렌에게 생소한 재미를 선사했다. 신학자인 아버지가 왜 학문 하나만을 붙잡고 살아왔는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델렌은 자신의 공부를 철저하게 숨겼다. 종교에 대한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공부는 자연스레 타락한 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델렌은 바보가 아니었고, 자신을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교단을 섣불리 비판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언젠가는 찾아올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준비할 뿐이었다. 묵은 때로 가득한 교단의 실태를 기억하고, 종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공부하며, 그것을 실현할 힘을 길렀다.
그러나 저주받을 세상은 이미 한 번 그랬듯, 순수한 이상으로 가득찬 델렌을 다시금 현세라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처박았다.
면죄부 사건.
하이라크 교단은 전쟁이라는 지독한 소모전을 유일한 종교 국가로서 마땅히 감수해야만 했다. 그 대가는 신도들의 자발적인, 혹은 강제적인 봉헌. 그리고 대륙에서 얻는 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그에 따라오는 수많은 이득이었다. 교단은 사람을 소모해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득에 만족하지 못한 건지, 그들은 선을 넘고야 말았다. 인간의 죄를 씻어내려야 할 교단은 현세에서, 현세의 재물을 통해 죄를 사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어나는 것은 성국의 신민들이었다. 감히 종교 국가의 백성인 자가 재물이 있음에도 죄를 사면받지 않으려는 것은, 즉 면죄부를 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은 사실상 신도들에게 강매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각 비판이 쏟아졌다. 하이라크 교가 아닌 일반 국가들도 반발했고,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내부의 반발을 대표하는 이는 신학자 니트람(nitram), 델렌의 아버지였다. 그는 하이라크 교단의 심장부인 성도 미카엘라에서 '59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면죄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면죄부를 발행하기 한참 전부터 선을 넘었던 타락한 교단에겐 더 이상 거리낄 일이 없었다. 그들은 즉각 59개조 반박문을 전량 회수, 폐기하고 니트람을 신성 모독죄로 체포하여 감금했다. 전시 상황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반발을 군사력으로 억제했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성도의 지하 감옥에서 니트람이 무슨 일을 겪었을 지는 불보듯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니트람의 죽음이 외부로 알려졌다는 점이었다. 면죄부에 반발하는 내부와 외부의 세력이 니트람의 신변을 집요하게 캐물었고, 교단은 병사(病死)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교단은 이미지에 타격을 받았으나 여전히 건재했다. 면죄부는 엄청난 부를 교단에 축적시켰다.
이러한 일들은 더 이상 델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유일한 가족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람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저 교단의 잘못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원래는 때를 기다렸을 테지만, 가족을 빼앗겨 이성을 잃은 델렌은 결국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것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델렌의 작은 반란은 작은 성과만을 남긴 채 당일에 진압됐다.
-일개 수습기사가 한 지부의 성기사 열 다섯을 살해했다.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교단의 상급 기사로서 인정받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일개 살인범, 불신자였다.
아무리 각 개인이 뛰어나다 한들, 군대와 전면전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델렌은 잘못된 판단을 했고, 더 이상의 피해를 내지 못한 채 진압용 그물에 휘말려 생포당했다. 진압군이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그물이 아니었고, 낯선 공격에 델렌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진압군의 숙달된 행동은 이런 일이 얼마나 잦은 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위험한 불신자, 살인자를 굳이 생포하는 이유는 과시용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에서 공개 처형을 당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막강한 교단의 힘을 공포감을 통해 실감한다. 하지만 성기사 열 다섯을 죽인 중죄를 지은 델렌이 처형되는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