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5. 델렌과 흑백 (8)
"고생하셨습니다."
"아, 고생은 무슨. 수고하게."
독방을 지키는 간수들 사이로 델렌을 진득히 괴롭혔던 남자가 걸어나갔다. 후끈하게 코를 찌르는 냄새만으로도 그가 안에서 뭘 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간수들은 별말 않고 형식적인 예를 취할 뿐이었다.
"앞으로도 빛이 함께하시길, 이단 심문관이시여."
"아아, 그래. 그럼 이만."
이단 심문관. 전쟁 전에도 공포의 상징이자 교단의 권력자였던 자들. 수십의 성기사와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다니며 이단을 색출하고 벌하는 자. 성기사들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인 기사단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권력자가 바로 이단 심문관이었다.
델렌이 처형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권력자들의 눈에 띄어서였다. 세상에 그녀 정도 되는 재능을 가진 자는 분명 있었고, 그녀 정도의 외모 역시 소수이지만 있었다. 그러나 재능과 외모 둘 다 가진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주 희귀한 상품이 들어오자, 권력자들은 그녀를 처형하는 대신 조용히 감금해놓고 즐겼다. 마나 유저의 보지는 아주 특별하다는 세간의 속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게 사실인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델렌을 살려둔 것이었다.
그게 크나큰 실수인지도 모른 채로.
….
1년. 그녀가 수감된지 1년이 지났다. 교단은 '약' 하나를 믿고 델렌을 가둬놓았다.
딱 1년하고 하루가 되는 날, 델렌은 간수 열 다섯 명을 죽이고 탈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살인과 같은 수의 사람을 살해한 것이다.
이후 급하게 파견된 조사단이 원인을 파악했다. 분명 신성력을 망가트렸는데 어떻게 탈출한 건지. 혹시 누군가가 도운 건지.
결론은 델렌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신성력이 아닌 마나를 사용하여 탈옥한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
조사단장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신성력은 마나와 은근히 비슷하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성질이다. 팔다리가 똑같이 두 개씩 있다고 해서 원숭이와 사람이 같은건 아니잖는가. 엄연히 다른 성질을 가진 신성력과 마나를 동시에 다룰 수는 없다.
그 말인 즉, 수감자 델렌은 1년 동안 쌓아 놓은 신성력을 모두 포기하고 새로이 마나를 수련했다는 뜻이었다. 비록 기사가 아닌 병사이긴 하지만,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간수 열 다섯을 죽일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고작 1년 사이에 어떻게….
"괴물…."
괴물이 풀려난 것이다. 교단에 엄청난 악의를 가진 괴물이.
"당장 추격대를 파견해."
"예? 추격대는 진작에 출발했습니다, 단장님."
"그걸 내가 모르는 것 같나? 기사단! 기사단을 파견하란 말이다! 그년은 잔챙이론 절대 잡을 수 없는 괴물이야!"
….
….
….
델렌. 교단에서 끈질기게 추격하는 범죄자. 살해한 성기사만 해도 세 자리수가 넘어가는 학살자. 그러면서도, 마치 교단을 비웃듯 성기사의 갑옷을 입고 다니는 기만자.
델렌에게 걸린 현상금은 천문학적이었다. 그녀는 교단에서 최초로 현상금을 내건 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단 심문관이라는 무자비한 사냥꾼이 존재하는 교단이 내부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교단의 끈질긴 추격과 현상금 사냥꾼의 집요한 사냥. 다시 한 번 괴물로 거듭난 델렌이었으나 모두를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는 점차 지쳐갔다. 피냄새가 너무나 익숙해서 후각이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한계를 시험하는 나날이 반복될수록 그녀의 수준 역시 급격하게 상승했으나, 결국 죽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하아, 하아…."
숨 쉬기가 힘들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점점 눈이 감긴다. 잠이 온다.
'이제… 끝인가.'
델렌은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며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떠올렸다. 이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각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그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저벅, 저벅….
'두 명…. 고작 두 명….자신감이 너무 과하군.'
천진난만하게 다가오는 네 개의 다리. 발걸음의 무게감으로 짐작하건데 한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아무리 다죽어간다지만, 고작 두 명이라니. 델렌은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저 둘을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결심을 했다.
두 명이 다가오고, 델렌이 뛰쳐나가려던 찰나.
"잠깐. 무기 내려. 적이 아냐."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델렌의 몸을 멈추게 만들었다. 아니, 델렌은 사실 멈출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죽을 힘을 다해 발걸음을 뗐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철퍽!
차가운땅 위에 쓰러진 델렌은 점점 의식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지금의 감각을, 그녀는 최대한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낯선 두 명의 목소리가 귓가를 흐릿하게 파고든다.
"이 사람, 내버려두면 죽을 것 같은데."
"그러게."
뭐야,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거야?
"으음, 살려야겠지?"
"쫓기는 것 같은데."
델렌은 순진하게 눈앞의 사람을 살리려는 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인심은 급격하게 나빠졌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면 살리려 들기보단 주머니를 뒤지는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린다. 두 사람이 반응했다.
"성기사다."
"이쪽으로 온다. 누군가를 쫓는 움직임이야. 그러고보니 교단에 쫓기는 유명인이 한 명 있던데…."
"아, 그 여자? 이름이… 델렌이였던가. 흠."
정체를 들켰다. 델렌은 그들이 자신을 교단에 넘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상금도 현상금이지만, 감히 교단에 거스를 이유가 없으니까. 잔뜩 화가 난 교단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죽을 때까지 쫓기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아아…. 드디어, 끝….'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청각이나마 유지하던 델렌은, 결국 의식을 잃었다. 두 남녀가 남긴 마지막말을 듣지 못한 채로.
"미라. 전투 준비해. 나무 위에서 저격해줘."
"좋아. 바라던 바야."
…
"아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고 아리스가 짤막하게 감상을 내놓았다. 델렌은 파티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악명이나 다름없긴 해도, 지금은 교단에 앙심을 품은 자가 너무 너무 많아서 델렌의 유명세가 그리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는 콜로세움에 갇혀 살았기에 바깥 소식을 전혀 몰랐고, 얘기를 들은 후에는 마치 다시 봤다는 듯이 눈동자를 빛냈다. 델렌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델렌은 교단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사람 좋아 보이는 착한 언니처럼 행동했었다. 마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것처럼. 그런 순둥이 같은 모습을 보고 끔찍한 그녀의 과거를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 옛날 얘기지."
"…현재 진행형 아닙니까."
아리스가 핏물로 붉게 물든 저쪽 땅을 보며 말했다. 멀찍히 떨어진 이곳으로 야영지를 옮겼으나 바람을 타고 오는 혈향은 여전히 진했다.
"달라. 그때는 목적 없이 바보처럼 놈들에게 홀로 맞설 뿐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델렌이 파티원을 주욱 훑어보았다. 아리스, 지나, 미라, 그리고 용사. 용사에게 유독 오래 시선을 준 델렌은 가볍게 웃었다.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고, 내 목표 역시 전과는 완전히 다르니까."
"그래요? 지금의 목표는 뭐죠?"
"사랑."
일부러 작게 말한 델렌은 자기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은 용사에게 윙크를 했다. 용사가 피식 웃었다. 듣지 못한 아리스가 되물었다.
"저. 죄송한데, 뭐라고요?"
"글쎄. 못 들었으면 굳이 말 안 할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흐음."
아리스는 궁금해 했으나 델렌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인 아리스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제가 사과할게 하나 생겼군요."
"엥? 사과? 뭘?"
"처음에 봤을 때, 성기사 님이라고 불렀잖습니까. 생각해보니 불쾌하실 수도 있었겠…."
델렌이 손을 뻗어 말하고 있는 아리스의 입술을 검지로 꾹 눌러 막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뜬 아리스의 모습은 퍽 귀여웠다. 델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불쾌? 전혀. 아리스, 내가 왜 계속 성기사 갑옷 입고 다니는지 알아?"
"으음? 음…. 글쎄요?"
"하아, 내 얘기 대충 들었구나?"
아리스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자기만 모르자 아리스가 델렌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어째서죠?"
"그야 물론, 내가 성기사기 때문이지."
마치 말장난 같은 델렌의 말. 하지만 델렌은 알맹이 없는 빈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리스가 진지한 태도로 잠시 생각한다.
과거 얘기를 하는 동안, 델렌은 꾸준히 교단을 비판했다. 그들의 악행과 타락한 신앙심, 자정 작용마저 방해하는 썩어빠진 권력자들. 그녀는 부패한 하이라크 교단 전체를 꾸준히 비판했다. 그 말인 즉….
"아, 알겠습니다."
"후후, 알 것 같지?"
교단에 대항하는 사람은 델렌 뿐만이 아니었다. 델렌과 함께 활동하며 공범이 된 용사 파티도 있었고, 중간중간 델렌을 알아보고 협력해준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중 상당수는 하이라크 신을 믿는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델렌의 입장에선 모든게 완전히 반대였다. 자신과 신념 있는 신자들이 진정한 하이라크 교단이고, 교단을 자칭하며 델렌을 추격하는 자들은 타락한 악의 세력인 것이다.
'참 재밌어.'
델렌이 피식 웃었다. 기묘한 인연이었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사람만 모였는지. 본인은 교단에게 쫓기는 현상수배범. 아리스도 콜로세움에서 탈주한 신세였기에 쫓기는 입장이었다. 지나는 애초에 떠돌이 집시였고, 미라는 인간에게도 엘프에게도 버림 받은 하프 엘프. 그런 그들을 품은 용사 역시 다른 세계의 이방인. 어디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델렌의 얼굴엔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성기사 델렌 님."
아직 무장을 풀지 않은 델렌이 자신을 부른 아리스를 보았다.
"불침번 초번, 수고해 주십시오."
침낭에 들어가는 파티원들을 보며, 델렌은 대답 대신 찡긋 윙크했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그랬듯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불행했던 과거의 상처가 모두 지워진 것처럼.
….
….
그러나, 어둠 속에서 홀로 경계를 서는 델렌의 얼굴은 표정 없이 무거웠다.
그녀는 아직 낫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상처가 완치되는 것은, 한참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