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5. 델렌과 흑백 (9)
사람은 주변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좋든 싫든 성장 과정에서 주변의 환경과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물드는 것이다. 아동 학대를 당했던 아이가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 똑같이 자기 자식을 학대하는 것처럼, 심지어 싫어하고 증오했던 것에도 사람은 종종 물든다. 마치 하얀색이 가장 잘 더럽혀지는 것처럼, 순수했던 아이가 시커먼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으읏, 흐응…."
델렌도 예외는 아니었다. 윤서준에게 이끌려 저렴한 모텔에 끌려온 그녀는 현재 밧줄에 손발이 묶인 채로 괴롭힘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괴로운 신체의 상황과는 달리, 델렌의 얼굴은 자신이 느끼는 순수한 쾌감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수습 기사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남자들에게 시달렸던 10여 년. 그리고 감금되어 성고문을 받았던 지옥 같은 1년. 분명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였으나, 그 와중에도 성감이 꾸준히 개발되었고 몸이 점점 잘 느끼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성격과 성향이 자리를 잡아가는 성장기에 그런 일을 겪은 델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가 떠오르는 강압적인 섹스에 더 흥분하는 기질을 갖게 됐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묶여서 당한다던지, 억지로 윤간당하거나 자유를 잃은 채 마구 따먹힌다던지.
싸구려 모텔 특유의 큼큼한 냄새가 델렌의 후각을 자극했다. 5성급 호텔 못지않게 고급스러운 골든 비치의 VIP 룸에서 엄청난 돈을 지불해가며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려는 남자들이 아주 줄을 서있다. 그런 남자들 대신, 돈 한 푼 안 내고 민박집 수준의 값싼 모텔에서 자신을 따먹으려는 전 남친에게 꽁꽁 묶인 채 다리를 벌리고 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좋아하기는 커녕 증오하고 있었다.
델렌은 상황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흥분하여 애액을 줄줄 흘렸다. 안 그래도 나른해 보이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술에 취한 것처럼 아예 풀려 있었다. 좋아서 정신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서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치켜들었다.
차악! 차악!
"좋냐? 씨발년아, 좋냐고."
"흐으응, 으읍, 읍…."
볼개그가 채워진 델렌은 당연히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준은 대답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델렌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렸다. 이미 불긋하게 물든 엉덩이가 다시금 내리치는 매서운 손길로 인해 화끈한 열을 느꼈다. 엉덩이를 몇 차례 때린 후 터트릴 듯이 거칠게 주무르던 그가 엉덩이골 사이의 작은 구멍에 중지를 쑤셔넣었다.
쑤욱!
"흐그웃! 우으으!"
뒷구멍에는 윤활제 하나 없이, 흘러내린 애액이 조금 묻은게 전부였다. 아무리 애널이 능숙할지라도, 윤활제와 더불어 삽입 전에 구멍을 충분히 풀어놓지 않으면 누구라도 아파한다. 고통에 가까운 뻑뻑한 감촉에 델렌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에도 중지는 점점 깊게 삽입됐다. 한 마디, 두 마디, 그리고 세마디, 끝까지 전부. 서준은 남자 중에서도 손가락이 길고 굵은 편이었고, 델렌은 거의 꼬리뼈까지 들어와 내벽을 자극하는 뻐근한 이물감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분명 아팠지만, 아팠지만….
그렇게 체벌과 거친 애무가 번갈아가며 이루어졌다. 홍수난 것처럼 애액을 줄줄 흘리는 델렌이 눈빛으로 애원했다. 서준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보다가 결국 모든 구속을 풀어줬다. 마침내 손발이, 그리고 입이 자유로워진 델렌은 자기발로 기어가 개처럼 바짝 엎드려서 서준의 발가락을 빨았다. 완벽한 복종의 표시였다. 남자들의 어두운 로망 중 하나인 여자의 복종. 그러나 서준은 전혀 기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 씨발년."
애증. 서준의 눈에 애증이 강하게 투영됐다. 싫어하지만 사랑한다는 그 모순된 감정이 델렌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기왕이면 조금 더 싫어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델렌은 혀를 내밀어 서준의 발치에 다가갔다. 발에서부터 다리를 혀로 핥으며 올라가 마침내 우뚝 선 자지를 정성스레 핥고 빨았다. 짧지만 정성스러운 봉사를 끝마친 델렌은 슬슬 삽입하고 싶은지 두 허벅지를 비비적거렸다. 그러나 원하는걸 쉽게 내줄 그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델렌을 제지하며 머리를 손으로 꾹 내리눌렀다.
"어딜. 기다려."
"히잉. 그치만, 좀 있으면 들어가야 되는데요?"
"아, 이런…."
잠시 시간을 망각한 서준이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까딱였다. 델렌이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허겁지겁 서준의 위에 올라탔다. 대면좌위로 앉은 채 서로 마주보게 되자 둘의 표정이 상반됐다. 서준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고, 델렌은 여전히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해맑았다. 왠지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서준은 기분이 나빠졌다. 평소엔 델렌이 움직이게 내버려두던 그가 스스로 움직였다. 델렌의 허리를 잡고 밑에서 위로 올려친다. 델렌은 모처럼 박아주자 좋아하며 말갛게 웃었다.
철썩, 철썩, 철썩.
"으응, 흐응! 아아, 좋아요…."
"닥쳐!"
척척척척척, 처억!
꿀럭, 꿀럭꿀럭….
순순히 쾌감을 주진 않겠다는 듯이, 서준은 열심히 움직이는 대신 사정감을 참지 않았다. 빨리 싸기로 마음먹은 남자는 정말 빨리 싸지를 수 있는데, 참는 남자는 맨날 보지만 그냥 싸는 남자는 볼 일이 없었던 델렌은 너무나도 이른 정액의 감촉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조루를 본 적은 있어도, 절륜한 서준이 일부러 조루처럼 빨리 싸버리자 고양감에 들떴던 그녀의 얼굴이 붕 떴다.
"어, 어어?"
"옷 입어."
델렌은 한동안 멍한 표정이었다. 잠시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서준의 지시대로 옷을 입는다. 얇은 상의 위로 유두가 톡 튀어나와 있었다. 속옷 없이 겉옷만 입은 변태 같은 차림새. 서준은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음에도 왠지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걸레 같은 년이 제 성격에 딱 어울리는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꼴 좋다기보단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미운 털인지, 아니면 미련인지. '둘 다'라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며 서준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에 델렌이 눈치를 보며 서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은근슬쩍 팔짱 끼려는 델렌의 몸짓을 서준이 차갑게 뿌리쳤다.
"뭐하자는 거지?"
"아아… 죄, 죄송… 습관적으로…."
"습관? 하…."
그 한숨을 끝으로 서준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차를 태워서 바래다주고 떠나는 순간까지도. 델렌은 그저 눈치를 보며 얌전히 있을 뿐이었다. 눈치 보는 조심스러운 눈동자마저도, 서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뭐지?'
마음이 완전히 식었나? 아직 플레이 안 끝났는데. 설마 이대로 흐지부지? 그러면 최악인데.
심상치 않은 서준의 분위기에 불안해진 델렌은 생각에 잠긴 채로 집안에 들어갔다. 어찌나 깊게 생각하던지, 자신을 낚아채는 검은 손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한때 최고의 성기사였던 그녀는 거친 손에 의해 몸이 확 당겨진 후에야 놀란 눈으로 보통 여자처럼 새된 목소리를 냈다.
"꺅!"
"쉿."
그대로 어깨에 들쳐매진 델렌은 익숙하고 탄탄한 남자의 몸을 인식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주인님'. 마음 같아서는 말과 행동으로 애정 표현을 하고 싶었지만, 조용히 하라는 명령이 있었기에 그녀는 얌전히 보쌈당한 채로 용사의 침실까지 끌려갔다.
휘익!
토옹.
용사는 침대에 델렌을 휙 던졌다. 델렌은 키도 크고 가슴도 큰 주제에 몸은 가벼웠기에 침대에 던져진 후 한 차례 가볍게 튀어올랐다가 완전히 착지했다. 다소 거칠게 침대에 눕혀진 델렌은 이내 옆자리에 눕는 용사를 바라봤다. 아직 입 열라는 말을 안 했기 때문에 말하고 싶어 죽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아침까지 계속 조용히 해."
"히잉, 주인니임…."
"흐. 물론 농담이지. 잘 왔어, 델렌."
스윽, 슥.
환영의 인사와 함께 델렌의 옷을 능숙하게 벗긴 용사는 자신도 옷을 다 벗더니, 그대로 다시 누웠다. 갑자기 따먹히는줄 알고 심장이 두근두근하던 델렌은 약간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후각을 만족시키는 용사의 은은한 체취가 기분 좋았다. 가까이 붙자 향기가 더 진해진다. 델렌의 얼굴이 배시시 풀렸다.
"오랜만에 같이 자자."
"네에."
"말하지 말라니까."
"헤헤…."
"오늘은 모처럼 푹 쉬자."
둘은 오랜만에 섹스 없이 서로를 꼬옥 끌어안고 잤다. 모처럼의 동침에 델렌은 섹스하는 것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연인과 함께 잠든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안식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