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9화 〉#5. 델렌과 흑백 (11) (109/162)



〈 109화 〉#5. 델렌과 흑백 (11)

[암캐].

델렌의 저주. 지나의 [음탕]과 더불어 개성이 좀 없는 저주였다. 스킬의 효과 역시 [모순], [외강내유], [바람기]처럼 좁고 깊은 다른 스킬들과는 달리 넓고 얕았다. 마치 개처럼 사람을 좋아하고 따르는 성향을 가지며, 암캐처럼 남자를 성적으로 아주 좋아하게 된다. 또한 평등한 위치에서 정을 나누기보단 수직적으로 주종관계를 이루어 복종하는 것을 원한다. 물론 야한 의미에서.

델렌은 지나가 그랬던 것처럼 저주로 인해 그렇게 큰 변화를 겪지 않은 케이스였다. [암캐] 스킬 자체가 [씨받이] 스킬과 일부 겹치는 부분도 있었고, 애초에 델렌이 그런 성향인 것도 있었기때문이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마조 성향과 섭(복종, 피지배) 성향으로 인해 용사, 아니 '주인님'과 다른 남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랫것을 자처하여 마구 따먹히며 행복을 느낀다.

용사는 모든 저주 중에서 델렌의 저주를 가장 달갑게 받아들였다. 저주의 이름은 [암캐]였지만, 용사의 눈에는 마치 그게 [해독제]로 읽히는 듯했다. 델렌의 마음 속 깊숙한 곳까지 침식한 새카만 독을 [암캐] 저주가 상당히 중화시켰으므로.

…이야기는 그들의 현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닥, 따닥.

최근에 파티에 합류한 아리스는 멍하니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캠프파이어를 좋아했다. 하루 여정을 끝마치고 안식을 알리는 불꽃이 피어나면, 온종일 예리하게 유지했던 감각과 긴장했던 몸과 바짝 조였던 마음이 편하게 풀어지기 때문이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른한 표정을 짓는 아리스의 옆으로 용사가 다가와 앉았다.

"어때, 적응은 좀 돼?"

"아, 네. 다들 너무나도 잘 대해주셔서 오히려 적응이 안  정돕니다."

"말 편하게 하라니까. 아주 반말을 하라는게 아냐. 말이 너무 딱딱하면  긋는 것 같잖아."

용사의 지적에 아리스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전우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지금의 생활이 그녀는 분명 만족스러웠으나, 오랜 시간 동안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단번에 열리기는 힘들었다. 가족의 배신, 그리고 노예로서 받았던 온갖 능욕과 농락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깊었고, 그녀는 섣부르게 정을 주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관계에서 선을 긋는다. 분명 고쳐야 할 단점이지만, 이제껏 겪은 일 때문에 알면서도 고치기가 힘들었다.

'이제는 마음을 열어야지.'

아리스는 최근 다른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특히 용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구한 사연을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기울었다.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진심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자기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딱딱한 말투부터가 문제였다. 아리스의 예의 바른 말투는 남들에게 트집 잡히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상대방이 거리감을 느낀다는 커다란 단점도 있었다. 확실히 친한 사람들에게 쓸만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래서 본인이 먼저 말투를 고치겠다고 선언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지적 받은 것이다. 습관이란게 참 무서웠다.

아리스의 표정이 자책감으로 조금 굳자, 저쪽에서 나긋한 격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확실하게 고쳐 나가는 거야. 전혀 이상한게 아냐. 나도 처음엔 그랬는걸."

미라가 물기로 촉촉한 머릿결을 매만지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생글생글한표정과 톡톡 튀는 듯한 말투.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매력적인 여자. 모두에게 배척받는 하프엘프만 아니었으면 분명 어디서든 사랑받는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감사합… 아니, 고마워요. 미라."

"후후. 별말씀을."

미라는 가까운 계곡에서 모처럼 목욕을 하고 편한 차림으로 나왔다. 지금은 아마 다음 여자의 차례일 것이다. 항상 이렇게 여유롭게 씻을 수가 없었기에, 이런 날에는 여자들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 아리스도 겉으론 딱딱해 보였지만 사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상태였고, 미라는  봐도 기분 좋아서 나긋나긋한 분위기였다.

용사 파티가 활동하는 무대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야생이나 전장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먹거나 씻거나 잠자는 기본적인 것조차 쉽게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가 좋고 상황이 적절하면 지금처럼 순번을 정해서 목욕을 하고, 나머지는 경계  휴식을 취한다. 남자여서 그런지 여유로운 상황에서도 후딱 씻는 용사가 항상 목욕 1순위였고,  후에 여자들이 여러 방법으로 순번을 정한다. 미래에 레이아가 합류하고 나서는 마법의 힘을 빌리기 때문에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지지만, 그때 당시엔 레이아가 없는 5인 파티였다. 지금 모닥불에 없는 델렌과 지나는 둘이 짝을 지어서 한쪽이 목욕할 동안 한쪽이 경계를 해주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델렌에게로 미친 아리스는 그녀가 없는 김에 마음 속에 담아둔 얘기를 조심스레 꺼내기로 했다. 이제 막 들어온 뉴페이스가 기존 멤버의 뒷담화를 하는 것은 분명  좋은 행동이겠지만, 델렌이 가끔씩 보이는 '그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 본인이 없는데 이런 얘기 하는건 좀 그렇지만…."

아리스가 운을 떼자 미라와 용사가 알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델렌 말이지?"

"아, 네…. 그분…."

"너무 조심스러워 할 것도 없어. 우리도 다 비슷한 생각이고, 델렌도 겉으론 모른 척하지만 다 알고 있을 거야."

아리스는 얼마  처음으로 파티원들과 함께 전투를 했고,  가지에 크게 놀랐다. 첫째는 파티원들의 마법 같은 엄청난 팀워크였고, 둘째는 천사 같던 델렌의 충격적인 반전 모습이었다.

"걔가 좀…."

"싸울 땐 과격하지. 특히 교단에겐."

"그건 과격한 정도가…."

미라가 어깨를 으쓱였고, 용사는 덤덤히 말했고, 아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아리스가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비위가 상당히 좋은 축에 속했다.

아리스. 공기마저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외날검의 달인. 검객인 아리스는 외날검을 매섭게 휘둘러 적의 무기나 방어구를 가르고, 목을 베고, 심장을 찌르고, 뱃속의 내장을 헤집는다. 무기를 놓친 적에게 칼을 휘둘렀을 때, 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서 의도치 않게 네 개의 손가락을 한번에 잘라낸 경험도 있었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전쟁에서 가장 먼저 내성이 생기는게 바로 잔인함이다. 마음이야 당연히 불편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떤 끔찍한 몰골도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수 있었다. 땅을 흠뻑 적시는 핏물, 온갖 살점과 내장, 팔다리 등 절단된 신체 부위들. 끔찍한 고통의 비명, 피비린내와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 털이 바짝 서는 매서운 살기. 아리스는 다른 파티 멤버들처럼 그런 끔찍한 환경에 익숙했다.

하지만 델렌이 하는 짓은 너무… 과격했다. 잔인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의도적이고 악의적이었다. 제압한 적을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잘게 부수거나, 다리를 짓밟아 질근질근 짓이기거나, 심지어 눈알을 두 엄지손가락으로 후비기도 했다. 그때 만큼은 아리스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땐 상대방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도 싼 악인 중의 악인이긴 했다. 델렌이 수감된 1년 동안 그녀를 지독히도 괴롭힌 이단심문관 '브룩'. 델렌은 브룩에게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 중에서 아주 멀쩡한 축에 속했다. 그는 부패한 거대악이었고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델렌이 그들처럼 악의에 물들 필요는 없었다.

그날 이후, 아리스는 델렌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무기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인 메이스는 적을 무력화시키는 경우는 많았지만, 한번에 죽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면 살상력 강한 날붙이를 놓고 굳이 둔기를 쓰는 이유가 그쪽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메이스는 성기사의 표준적인 무기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불편하다.

'분명 나한텐 잘해주지만….'

저번에, 모처럼 괜찮은 여관에 머물렀을 때 아리스와 델렌이 2인용 침대를 같이 쓴 적이 있었다. 당시 델렌은 아리스에게 친근감을 가장 많이 표현한 사람이었고, 그날도 여지없이 친근하게 굴었다. 둘은  살 차이로 델렌이 연상이었는데, 마치 연년생 여동생이 생긴  같아 기쁘다며 뒤에서 꼭 끌어안았을 때, 아리스는 작은 감동마저 느꼈다.

성적인 의도 없는 순수한 포옹과 순수한 호의, 그리고 같은 여자도 기분 좋게 만드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향긋한 델렌의 향기가 어우러져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경계심 가득했던 콜로세움의 검투사가 파티원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연 날이었다. 그날 밤, 둘은 마치 연인처럼 마주보고 누워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항상 밝았고, 전장을 누비는 전사 치고는 너무나도 순해 보였다. 그래서 파티원들의 짓궂은 장난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았지만, 그럴 때조차 성격 좋게 해맑게 웃으며 넘어갔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 써주는 착하고 섬세한 맏언니 같아서, 혼자 감내하는 것에 익숙했던 아리스조차 델렌에게 마음을 기댈 때가 많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함께 전투를 치를 때, 걱정도 조금 들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그녀가 마음이 약해져서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도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콰드득, 콰직! 우드드득! 아리스는 그날, 파티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복수심 때문일까요?"

"글쎄."

"특히 교단에게 잔인하기는 한데, 꼭 교단이 아니더라도 그러긴 하잖아."

다른 적에게 너그러운건 절대 아니지만, 델렌은 교단에게 특히 지독했다. 용사가 감정이 보이지 않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환경에서 멀쩡하게 자라는게 오히려  어렵겠지. 아마…."

"용사님. 굳이 지난 얘기를."

델렌의 불행한 과거가 언급되자 아리스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용사는 여전히 무심한 눈빛이었다.

"사실을 말한 것 뿐이야. 델렌이 잘못해서 그런 일을 겪은게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용사가 말을 마저 하려던 순간, 둘의 대화에 미라가 끼어들었다.

"마음 맞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다보면 나아지겠지."

"그럴… 까요?"

파티원  감각이 가장 좋은 하프엘프 미라는 목욕을 끝낸 델렌과 지나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는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아리스는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델렌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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