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5. 델렌과 흑백 (12)
시간이 흘렀다.
안 그래도 강력했던용사 파티에 마지막으로 흑마법사 레이아가 합류했고, 완전해진 파티가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면서 지루할 정도로 항상 비슷했던 전쟁의 판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넣은 것처럼, 레이아의 합류 이후 용사 파티는 서로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며 전력이 크게 상승했고, 각자의 관계 역시 가족처럼 돈독해져갔다. 여자들과의 만남은 더없이 소중했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보낸 나날들은 정말 개같았다고 말하는 용사조차 그때 즈음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정도로 당시의 분위기가 좋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마음을 고백하며 용사의 연인이 되었고, 여자들은 서로 질투하지 않기로 맹세하며 한 남자에게 온 사랑을 쏟아부었다. 인연의 매듭이 단단하게 맺어지며 서로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순풍을 타고 용사의 여정 역시 큰 차질 없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러나 델렌의 성향은 여전했다. 특히 교단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 잔인한 손속을 보였다. 저번에 이단심문관 브룩에게 한 것처럼 눈을 후벼파거나 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 모습에 가장 거부감을 느꼈던 아리스조차 그때쯤엔 덤덤해져서 '또 이러네' 정도의 반응만 보였다. 분위기로 보아 적응보단 포기에 가깝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상황이 더 나빠지진 않았다. 델렌의 행동이 큰 문제로 대두되지 않은 것은 이단심문관을 죽인 이후로는 잔혹함이 확실히 줄어든 점과, 평소에는 항상 신실한 성기사이자 착한 맏언니의 좋은 모습을 보여온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이아의 반응을 기점으로 용사 파티는 더 이상 델렌에게 문제 의식을 갖지 않게 된다.
….
….
….
"으음…."
용사 파티의 새 멤버인 흑마법사 레이아의 데뷔. 그녀의 첫 전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지금은 편히 쉬며 아영 중이었다.
예상대로 레이아 역시 전투에 엄청난 소질이 있었다. 처음으로 생명을 죽였을 때에는 그녀 역시 충격을 받았지만, 별다른 스트레스나 후유증도 없었고 오히려 어린 나이임에도 다른 멤버들보다 더 빠르게 적응했다.
타닥, 타닥….
지금 레이아는 오히려 다른 쪽에 문제가 있었다. 아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델렌의 이중 인격 같은 모습을 보고 입을 닫은 것이다. 그녀의 침묵으로 인해 평소라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을 야영지엔 대화 한 마디 없었고, 오로지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유일했다.
용사는 항상 그렇듯 별말이 없었고 다른 멤버들은 눈을 감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그녀에게 굳이 말을 건네지 않았다.
"흥흐흥~."
침묵 속에서 델렌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작 당사자인 델렌은 이럴 때마다모른 척했다. 다들 뒤에서 조심스레 얘기했기에 말은 못들었다 쳐도 분위기 정도는 알 법한데, 델렌은 놀라울 정도로 뻔뻔하게 순진한 척하며 실실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델렌과 친하게 지내는 지나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용사의 무반응엔 그럴듯한 깊은 속내가 있어 보였으나, 지나의 무표정과 무반응은 마치 그게 무슨 문제냐고 묻는 듯했다. 델렌과 지나는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친하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대할 때는 천사 같았지만, 울타리 밖을 벗어난 자들에겐 상당히 무심했다. 천성은 착하지만, 세상과는 확실히 동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속내야 본인들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불편한 침묵.
레이아가 조용히 생각하는 사이, 파티의 분위기가 묘하게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태연한 표정의 델렌과 지나, 아직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용사와 레이아, 그리고 눈치를 보는 미라와 아리스.
사실 미라와 아리스도 딱히 델렌에게 불만인건 아니었다. 정말로 용납할 수 없었다면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진작에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정하고 싶을 뿐이었다. 만약 다수가 델렌의 모습에 문제 의식을 갖는다면 해결하는 쪽으로 힘을 실어줄 것이고, 그런 면도 받아들인다면 똑같이 받아들여줄 것이다.
둘은 그저 이 애매한 침묵과 델렌의 모른 척이, 파티원들의 암묵적인 외면이 싫을 뿐이었다. 이런 침묵은 마치 위선을 떠는 것 같았다. 미라와 아리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왕을 물리친다는 대의를 갖고 있다고 반드시 선(善)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마왕군에 대항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쟁 초기부터 치졸할 정도로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대전쟁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건 분명 옳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약아빠진 나라들만이 살아남았다. 정의롭게 행동한 나라들은 이미 내리막길을 걸어 멸망이나 합병 등의 씁쓸한 결말을 맞이했다. 애초에 약아빠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용사 파티 역시 선행에 얽매이지 않고 계산적으로 행동했다. 여섯 명의 파티 멤버들은 하나같이 인류의 지지는 커녕 온갖 차별과 부조리를 겪으며 자랐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들에게 선악의 구별은 배부른 사치이자 역겨운 가식에 불과했다.
만화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정의의 사도 따윈 없었다. 다들 영리하고 속물적이고 치밀했다. 악행을 막 저지르진 않지만, 악의에는 악의로 맞선다. 비열하게 바가지를 씌우는 악덕 상인에게 칼을 들이밀어 공정한 '협상'을 한 적도 있었고, 온갖 부조리한 악행으로 재산을 쌓은 악덕 귀족의 창고를 털어 파티원끼리만 독식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화전민들이 마족에게 학살당할 위기에 처해서 구해줬는데, 목숨을 건진 화전민들은 괜히 논밭에서 싸워서 자기들의 농작물을 망쳤다며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손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용사 파티는 무력시위까지 동원하여, 반대로 목숨을 살려준 대가를 아주 톡톡히 받아냈다.
용사 파티는 마치 선악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서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미는 고지식한, 아니 멍청한 멤버는 없었다.
다들 마치 누가 더 불행하나 겨루는 것처럼 기억조차 하기 싫은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었고, 인류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넘치도록 선행을 베푸는 중이었다.
선한 백색도, 악한 흑색도 아닌 회색의 존재. 시커먼 판타지 세계에서 회색은 용사 일행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
"재밌는 색깔이네."
한동안 조용하던 레이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하고 침착했다. 용사의 고향에서는 교복조차 벗지 못했을 어린 나이였으나, 레이아는 타고난 천성과 성장 배경으로 인해 내면이 성숙했고, 앳되고 귀여운 얼굴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어른스러워 보였다.
적막을 깨는 차분한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조용하던 용사가 입을 열어 레이아에게 물었다.
"재밌는색깔?"
"응. 다들 회색인데, 델렌의 색깔은 좀 특이해."
"흠."
"아아…."
레이아는 꽤나 많은 것을 생략하고 말했지만, 다들 적절히 알아들었다.
최근 선악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선을 백(白)으로, 악을 흑(黑)으로 비유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회색인 것 같다는 결론도 내렸다.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선빵(?)을 맞고 아웃사이더가 된 이들이었기에 다들 내심 우리가 너무 착하게 살고 있나 하는 걱정조차 했었다. 세상이 먼저 자기들에게 아주 시커먼 구정물을 뿌렸는데도 지금의 색깔이 회색이라면, 그동안 거의 순백색으로 행동한 것이나 다름없잖는가… 등등의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었다.
아무튼 레이아의 쿨한 말투는 모두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항상 딴청만 피우던 델렌도 관심이 생긴 건지 레이아를 은근슬쩍 곁눈질했다. 게다가 레이아의발언에 호응하듯, 항상 침묵하던 용사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석처럼 이끌려 둘에게로 향했다.
"그래? 델렌이 무슨 색인데?"
용사의 붉은 눈동자가 한 차례 빠르게 왕복한다. 델렌을 슬쩍 보고, 다시 돌아와 말하는 레이아에게 시선을 둔다. 잠시 용사의 시선을 받은 델렌이 움찔하며 표정을 굳혔다. 항상 웃어 넘기며 모른 체 했으나, 그게 가능했던 것은 파티의 리더인 용사가 묵인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장 먼저 대화에 참여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그가 나섬에 따라, 이번 대화에서 델렌의 처우가 갈릴 것이다. 델렌의 눈에 은근한 긴장감이 돌았다. 델렌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 역시 관심을 갖거나 살짝 긴장한 태도로 상황을 주시했다.
"흑백."
"흑백?"
"저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우린 회색이야. 선악을, 흑백을 구분짓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하얀 목적을 위해 검은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고, 반대로 검은 목적을 위해 하얀 수단을 쓰기도 하잖아. 우리가 순수한 백색이거나 순수한 흑색인 적은 솔직히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용사, 미라, 지나, 아리스. 파티원들을 한 차례 훑어보며 말한 레이아는 마지막으로 델렌을 응시했다.
"하지만 델렌은 흑백이야. 중간이 없어. 우리처럼 두 색깔이 섞이지 않아. 하얀 색일 땐 정말 순수하게 하얗고, 검은 색일 땐 정말 깔끔할 정도로 시커매. 흑과 백의 영역이 너무 명확하게 나뉘어 있어. 우리랑 어울릴 때에는 살면서 그렇게 잘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냥하게 잘 해줘. 특히 '신도'들에겐 천사나 다름없지."
레이아는 그 외에도 델렌의 하얀 면을 얘기했다.
델렌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관대한 성격이었다. 아주 모범적인 성기사처럼, 적에겐 일말의 자비도 없지만 선량한 이들에겐 기본적으로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상냥하다.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 않으며 모두에게 똑같이 웃어주고, 설령 과오가 있어도 속죄하고 반성한다면 넓은 아량으로 깨끗이 용서한다. 특히나 음지에서 부패한 교단을 비판하고 태초의 교리를 신념으로 따르는 하이라크 교의 독실한 '신도'들을 물심양면 돕는 델렌은, 그들에게 있어 천사 그 자체였다.
레이아는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델렌의 좋은 면을 전부 기억하여 자세히 얘기했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선량한 사람을 대할 때 만큼은, 나머지 다섯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델렌의 선의가 훨씬 더 컸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선명한 순백색이었다.
울타리의 안에 있냐 바깥에 있냐에 따라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그게 델렌과 지나의비슷한 점이었으나, 사실 둘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차이점은 바로 울타리의 크기였다. 지나는 울타리가 아주 작아서 용사와 동료 여자들, 그리고 극소수의 맘에 드는 사람만이 울타리의 안에 있다. 반면 델렌은 울타리가 엄청나게 커서 적들과 교단, 대놓고 악의를 드러내는 악인들만이 울타리의 밖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울타리의 안에 있었다. 대신 지나와는 다르게 울타리 안에 있다가 밖으로 쫓겨나는 자들이 좀 많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잘 대해주지만, 이 사람은 도저히 못 쓰겠다 싶으면 가차없이 태도가 바뀐다.
"그리고."
마치 델렌의 팬처럼 그녀의 장점을 한참 동안 말한 레이아가 짤막한 쉼표를 찍었다. 이젠 반대쪽 얘기를 할 차례다.
"검은색일땐 정말 무서워. 사실 아까 델렌이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땐, 저 사람이 내가 아는 델렌이 맞나 의심했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은근히 귀띔을 받아서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충격적이고 깜짝 놀랐어."
레이아가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델렌은 그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벌 받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이어질 단점의 나열을 기다리던 델렌은 레이아가 어깨를 으쓱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상관없어. 가장 정상인 줄 알았던 언니가 알고보니 제일 이상한 사람이어서 놀라긴 했지만, 여기에 안 이상한 사람은 없으니까. 하얀색일 땐 그 누구보다도 하얗고, 검은색일 땐 그 누구보다도 새까만 사람. 회색이 아닌 흑백. 으음, 중간이 없어서 재밌긴 하네. 어떻게 색깔이 안 섞이는 건지, 연구 대상이야."
스윽.
레이아가 손을 내밀었다. 델렌은 순간적으로 멍해져서 자기 앞에 내밀어진 손을 그저 쳐다만 봤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아…."
레이아의 호의적인 반응. 그에 따라 레이아 뿐만 아니라 모두가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안 좋게 일이 흘러갈까 내심 긴장했던 지나, 델렌의 '흑백'을 외면하는게 불만이었던 미라와 아리스, 그리고 말없이 조용하던 용사까지. 델렌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혹시 이게 꿈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기쁜 감정을 느꼈다.
시크했던 용사조차 델렌과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델렌의 눈가가 순식간에 촉촉해졌다. 사실 델렌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흑백'을 신경쓰고 있었다. 혹시라도 받아들여주지 않을까 무서워 이제껏 애써 모른 척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흐윽, 용사니임…."
여기서 제일 큰 역할을 한 건 레이아였지만, 델렌은 사랑하는 연인인 용사에게 가장 감동하고는 와락 안겨들었다. 사랑이란게 다 그렇기에, 레이아도 이해하고 쿨하게 웃으며 넘어갔다. 감동스러운 와중에 깨알같이 웃긴 장면이었고, 모두가 까르르 웃음꽃을 피웠다.
그날은 모두가 델렌의 '흑백'을 받아들인 기념적인 날이었다.
…
짜르륵. 드륵.
집 근처 카페에 앉아 델렌의 흑백을 떠올리던 용사가 현실로 돌아왔다. 다 마신 플라스틱 컵을 흔들자 짜륵짜륵 얼음 소리가 난다.
….
사실 그때 당시의 델렌의 흑백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가 됐던 것은 그 이후의 일.
짤랑짤랑.
다시금 과거를 회상하려던 용사가 문이 열리며 벨이 울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드디어 오셨군."
용사는 이쪽을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오래 기다렸어, 포주님."
남자, 서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