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5. 델렌과 흑백 (13)
한쌍의 연인이 정겹게 달라붙은 채 사랑 가득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은 행복하게 웃으며 얘기했고, 중간중간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즐거운 교류를 나눴다. 수다가 끝나고 잠시 대화가 멈추자 남자가 여자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하핫! 하으, 간지러워 오빠."
"츄읍, 흠, 난 맛있는데."
야들야들한 살결의 감촉에, 마치 홀린듯 남자가 입술로 씹듯이 목덜미를 물고 오물거렸다. 간지러우면서도 야릇한 감각에 여자가 몸을 살짝 떨며 남자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남자도 밀려날 생각이 없었기에 불건전한 탐식은 계속 진행됐다.
"아으, 으응, 서준 오빠, 기분이 이상해…."
"후우, 흠, 델렌…."
한 쌍의 연인은 바로 서준과 델렌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애정행각을 손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보는 이가 있었는데, 그 사람도 서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델렌과 붙어서 놀고 있는 것은 과거의 서준이고, 그걸 구경하고 있는 서준은 현재의 서준이다.
자각몽. 꿈인 것을 자각하고서 꾸는 꿈.
서준은 이게 꿈인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델렌과 직접 꽁냥대고 있다면 모를까, 이렇게 보란 듯이 관객이 되어 구경이나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현실과의 괴리를 느낀 순간부터 그의 자각몽이 시작됐다.
'좋은 때였지….'
서준은 마치 영화를 보는 관람객처럼 편하게 델렌과 자신의 옛 모습을 감상했다. 의자도 없는 허공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게 이상했지만 어차피 꿈이었기에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투명 의자에 앉아있는 것보단, 갑자기 시간과 장소가 바뀌어 눈앞의 두 연인이 호텔 침대에 누워있는게 더 신기했다.
연인은 이미 한 차례 살을 섞었는지, 다소 풀어진 눈빛으로 나른한 분위기를 즐기며 느긋하게 서로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
"응?"
델렌이 콧소리로 애교 있게 말했고, 꿀처럼 달콤해 보이는 그녀의 진한 금발을 쓰다듬던과거의 서준은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으응, 헤헤…."
말하기가 민망한 건지, 델렌이 오줌 마려운 어린애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서준이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두 손으로 델렌의 볼을 감쌌다.
"뭐? 용돈 필요하다고?"
"으, 으응…."
"델렌…."
그의 두 손이 마치 아이를 벌주듯 쫙 벌어지며 말랑말랑한 볼살을 쭈욱 잡아당겼다.
"넌 왜 항상 섹스한 다음에 부탁하냐고. 이게 무슨 원조교제야?"
"히잇, 흐에에, 아파아…."
그렇게 몇 초 간 벌을 주던 서준은 델렌이 진짜로 아파하는 소리를 내자 곧바로 관뒀다. 당연히 진심으로 화난건 아니었으니까.
"힝…."
"아팠어? 미안해."
계속 마주보며 누워있던 서준은 상냥한 목소리로 사과하고는 몸을 일으켜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걸 델렌에게 건네주자, 델렌이 그걸 받은 후 자신의 지갑에 있던 다른 카드를 서준에게 반납한다.
"어휴, 돈 먹는 하마가 따로 없네."
"헤헤."
카드를 받은 델렌은 그저 모른척 헤실헤실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꽤나 사치를 하는 성격이었다. 마치 얼굴값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준 같은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감당 못할 정도로 씀씀이가 컸다. 입는 옷은 물론이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다 비쌌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룻밤의 꿈과 같은 유흥에 쓰는 돈이 가장 많았다. 비싼 술, 비싼 놀이, 비싼 룸….
델렌의 씀씀이는 평생 돈 쓰는 일에 걱정이 없었던 서준조차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여러 차례 지적을 하긴 했지만, 그게 통했으면 진작에 통했을 것이다. 서준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델렌의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결심하고 지갑을 꼭 닫아놓았지만, 그의 결심은 델렌의 시무룩한 안색과 애교 공세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처음엔 델렌에게 자기가 쓰는 신용카드 하나를 줬다가, 생전 처음으로 한도 초과 문자를 받고는 기겁하며 다시 빼앗았다. 그리고는 체크 카드 두 개를 만들어 번갈아가며 쓰게 했다. 하나를 다 쓰면 반납하고, 일정 금액이 채워진 다른 카드를 서준에게 직접 받아가는 방식이었다. 편하게 인터넷으로 송금해도 되겠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받아가야 민망하고 미안해서라도 좀 아껴 쓰지 않을까 생각한 서준의 아이디어였다. 결과적으론 델렌의 사치를 막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눈치를 보긴 봐서 미약하게나마 효과가 있기도 했고 돈이 필요할 때면 특히나 애교를 부리고 귀엽게 구는 탓에 서준은 이 방식을 고수하기로 했다.
….
'차라리 돈만 잡아먹었으면 좋았지.'
델렌의 씀씀이는 분명 과했고 금수저인 서준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아주 나쁜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서준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당연히 결혼할 생각이었기에 미래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아주 철없이 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일에 딱히 흥미도 없었던 서준이 진지하게 일을 배우고자 했다. 서준의 아버지는 아주 흡족해했고, 서준 역시 사업에 재능이 있었는지 그때부터 실력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그는 외아들이었기에 가업을 두고 형제와 경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때가 되면 아버지로부터 일을 물려받을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델렌을 부양하는건 일도 아니라고 그는 확신했다.
자신감이 붙은 서준은 델렌에게 슬슬 결혼 얘기를 꺼내고자 여러 준비를 했다. 일단 프러포즈도 안 했기에 그걸 먼저 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서로의 부모님을 모시고 상견례도 하고…. 서준의 머릿속에 결혼으로 향하는 여러 단계가 착착 구상되기 시작했다.
일을 배우면서 결혼까지 생각해야 했기에 바빴으나, 다가올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서준은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날 전까지는.
….
….
마치 서준의 생각에 반응하는 것처럼, 꿈의 장소가 바뀌었다.
이제껏 알콩달콩 달라붙어 있었던 좋았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짓고 있었던 과거의 서준은 지금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고, 델렌은 당황한듯 눈을 크게 뜨며 서준에게 변명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델렌의 옆에는 '그 새끼'가 있었다.
시뻘건 머리에 재수없어 보이는 얼굴. 사실 놈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보면 남자답게, 준수하게 잘생겼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가 싫었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착 가라앉아 있어가지곤, 거만할 정도로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남의 여자랑 바람피워 놓고선 말이지…. 씨발 새끼가."
꿈이라서 생각만 하던 서준이 격해진 감정을 못 이기고 욕설을 내뱉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뭔가 끈적하고 음습한…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빨간 머리 그놈에겐 분명 일반인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관람하는 그와는 별개로, 과거의 인물들은 무대 위에서 자기들끼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뭐냐고, 너네…."
과거의 서준이 두 남녀를 앞에 두고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그의 몸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탁해진 채 번들거렸다. 주변에 흉기가 있었으면 칼부림이라도 났을 분위기였다. 델렌은 당황하며 서준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놈은 그저 조용히 뒤에 있었다.
….
델렌이 바람을 피웠다.
그날, 그 시간. 서준이 꿈꿨던 행복한 미래는 산산히 부숴졌다. 서준에게서 부드러움과 상냥함이, 웃음이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델렌은 마치 일부러 그랬나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외도를 들켰고, 울면서 용서를 빌고 매달렸지만 서준은 차갑게 그녀를 뿌리쳤다. 델렌의 눈물은 더 이상 서준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평생을 기약하던 둘은 이튿날에 완전히 헤어졌다. 잘못은 델렌이 했지만, 더 상처받은 것은 서준이었다. 마치 온갖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처럼 밝고 아름다웠던 그의 세계에서 모든 색깔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색 없이 어두운 공허함 뿐이었다.
….
평생 볼 일 없을 것 같았던 델렌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