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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5. 델렌과 흑백 (16) (114/162)



〈 114화 〉#5. 델렌과 흑백 (16)

예상치 못한 상황, 예상치 못한 전개.

그 말인 즉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없이 운전했다. 조수석에는 그가 낮 동안 미행했던 델렌이 앉아 있었다. 항상 재잘대는 델렌도 지금만큼은 말이 없었고, 차 안은 무거운 침묵의 공기로 가득했다.

….

"너한테  얘기가 있나 본데. 용건 끝내고 알아서 와."

카페에서 마주친 빨간 머리는 그렇게 쿨하게 말하고는 델렌의 등을 확 떠밀었다. 델렌은 갑자기 밀려나 중심을 잃고선, 마치 안겨드는 것처럼 서준의 품에 쏙 들어왔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델렌을 끌어안았다. 한창 연애할 때 그는 델렌의 풍만한 가슴을 사랑했고, 그녀의 가슴에 푹 안기거나 자기 품 안에  끌어안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사귈 때의 그 좋은 감정이 떠올라 조건반사적으로 서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잠깐 뿐이었다.

"아아…."

그렇게 델렌을 떠민 빨간 머리는 그대로 델렌과 서준을 지나쳐 휙 카페 밖으로 나가 자기  길을 갔다. 멍하니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쿨하고 황당한 행동이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서준의 정신을 들게 것은 델렌의 목소리였다.

"어째서 여기에…."

보기 드문 델렌의 원망의 눈빛. 서준은 그 와중에 얘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연애할 땐 그녀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오히려 그녀를 더 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델렌의 원망에 서준은 뭐라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자신은 여자를 미행해서 좋은 분위기를 깨버린 불청객이었다. 입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양심의 영역이고, 양심을 저버린 서준은 오히려 뻔뻔하게 나갔다.


"둘이 무슨 관계야."

미행해놓곤 오히려 캐묻는 모습에 델렌의 눈썹이 팔(八)자를 그렸다. 하지만 앙칼지게 대들거나 따지지 않고 그저 귀여울 정도로 순한 얼굴에 원망을담을 뿐이었다.


'하여간 순하긴 뒤지게 순해.'

여자 입장에선 빽 소리지르며 할퀴고 생지랄을 해도 될만큼 빡치는 상황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와 오붓하게 단둘이 있는데, 갑자기 사이 나쁜 과거의 남자가 나타나 좋은 시간을 완전히 망쳤다. 그런 상황에서도, 고작 눈썹을 찌푸리는게 전부라니.

서준은 델렌의 순딩이 같은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그녀가 바람 피운 썅년인게 실감이 가질 않았다. 이렇게 착하고 순진한 여자가, 사이 좋았던 애인을 배신하고 웬 말뼈다귀 같은 놈에게 붙어먹다니….

"도대체둘이 무슨 관계냐고."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서준이 한 번 더 쏘아붙였다. 불청객이 오히려 따져 묻자 델렌은 결국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보면 모르세요."

"너, 진짜…."

정확히 대답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빨간 머리와 만나는 것을 시인했다.

아니, 그놈이 뭐가 좋다고? 잘해주면 얼마나 잘해줬지? 사치를 감당해주기라도 했나, 아니면 남자로서 든든하게 지켜주기를 했나? 집까지 침입한 빚쟁이에게 강간당할 뻔한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준건 그놈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렇게 잘해줬음에도헌신짝처럼 버려진 불쌍한 윤서준 말이다.


서준은 순간적으로 욱한 마음에 델렌의 손목을 확 붙잡아 이끌었다.

"앗! 무, 무슨!"

"그 새끼가 말했잖아. 할 얘기 하라고."

그의 입꼬리가 마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뒤틀렸다. 여러 감정으로 탁해지고 촉촉해진 눈동자가 델렌을 지긋이 응시한다.

"할 얘기 하러 가자고. 응?"




전 여친을 애증하는 서준. 좋은 시간을 방해받아심통이 난 델렌. 그리고 둘만 타고 있는 차.


대화가 이뤄질 리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이였기에 어디 좋은 곳에 같이 놀러갈 리도 없었고, 결국 서준은 근처의 식당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했기에 고깃집 같은 개방되고 시끌벅적한 곳보단 조용하고 공간이 보장된 일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룸이  되어 있으니 식사와 대화 둘 다   있는 적절한 곳이었다. 델렌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따라 들어갔다.


먹을 것을 앞에 두니 본격적으로 허기가 돌았다. 점심 시간대는 진작에 지났으나 저녁까진 아직 먼 오후 4시 경. 서준과 마찬가지로 델렌도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기에 둘은 눈빛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다. 금세 종업원이 들어온다.

"실례하겠습니다."

달칵.

달그락, 달그락….


손님 없는 시간대여서 음식은 금방금방 나왔고, 둘은 허기라는 최고의 조미료와 함께 좋은 식사를 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달라고 하거나, 종업원으로부터 접시를 받은 후 '자' 하고 건네주는 등 둘은 대화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짧은 언어의 파편만을 상대에게 던지며 조용히 배를 채웠다.

식사가 끝난 후.

입가심으로 나온 따뜻한 매실차마저 목 너머로 넘겼고,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진실의 시간이 다가왔다. 현장에서 들켰을 때도 뻔뻔함을 고수하던 서준은 이제 완전히 여유를 되찾아 오히려 델렌을 문책하듯이 지긋이 노려봤다. 델렌은 무표정했으나 좋은 인상이 어디 가진 않는지 차갑거나 딱딱하다기보단 살짝 뚱해 보여서 마치 삐친 여자애 같았다.

"그래서."

서준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새끼랑…."

"주인님을 욕하지 마세요."

"…뭐? 주인님?"

델렌에게 생전 처음으로 말을 잘린 서준은 당황하면서도 황당했다. 서로 다른 사람을 얘기할 리는 없었으니, 델렌은  빨간 머리를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네.  목숨보다 소중한 저의 주인님. 그러니까 함부로 부르지 마세…."

쾅!

화가 오른 서준이 탁자를 내리치며 이를 드러냈다.


"네 주인님은 나 아냐? 우리, 계약했잖아? 계약 기간 동안   권리를 포기했어.  몸, 네 자유 모두 골든 비치에, 나에게 바친 거라고. 서로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말해줘야겠어?"

"…그러시겠죠."

델렌은 평이한 투로 말했다. 분명 비꼬는 투는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수긍하는 분위기였으나 서준은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화가 나는 지도 모른 채 델렌을 다그쳤다.

"너무 편하게 대해줬더니 네 처지를 망각하는군. 휴가 끝나고 나서 재교육이라도 해야겠어. 하아, 됐고. 그래, 그놈이랑은 무슨 관계야.  안해도 알겠지만,  입으로 똑똑히 들어야겠어."

"네, 맞아요. 사랑하는 관계. 됐어요? 이제 만족하시나요?"

"하."

다소 흥분했던 서준의 눈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던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너 진짜 바보냐."

"사람을 좋아하는게 어때서요. 당신도 한때 저를…."

"진짜 바보냐고."

그가 시선을 내리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내 폰이 델렌에게 정면으로 내밀어졌다. 불빛을 내뿜는 액정이 델렌의 얼굴을 밝게 물들였다. 그녀의 맑은 갈색 눈동자에 무언가가 비친다.


사진 한 장.


서준은 빨간 머리와 어떤 여자가 딥키스하는 사진을 델렌에게 들이밀었다. 사진을 본 델렌은 말이 없었다.


"예전 얘기지만, 한때 난 너보다 예쁜 여자가 없을 거라 확신했어. 심지어 너와 동급의 여자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더라. 이 사진 보이지? 그놈… 하! 능력도 좋지. 너한테 절대 안 밀리는 여자랑 끈적하게 붙어먹고 있잖아."

서준이 뒤를 캔 것은 델렌뿐만이 아니었다. 델렌이 외도를 들킨 이후, 서준은 은밀하게 빨간 머리의 뒷조사도 했다. 개인 정보까지 캐낸건 아니고, 그저 델렌과 놈이 뭐하고 있나 아랫사람을 시켜 스토킹했다. 그리고 건져낸게 지금 내밀고 있는 사진이었다.


레몬처럼 밝은 연노랑 포니테일에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혼혈 느낌의 미녀. 그리고 그 미녀와 키스하는 빨간머리. 심지어 지금 내민 사진은 아랫부분을 잘라낸 것이었다. 잘라내지 않은 아랫부분에는 빨간 머리가 금발 미녀의 옷 안에 손을 넣어 가슴을 주무르는 야한 장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어때, 지금도 똑같은 마음이야? 사랑이란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깊게 좋아하는 거야. 일대일 교환이라고. 너도 날 버리고 그 빌어처먹을 놈을 선택했잖아. 그런데 어쩌나? 그놈은 너가 아니라  여자를 선택한 것 같은데."

마치 고소하다는 듯이 비웃음을 머금는 서준.

"어때. 어떤 기분이야? 배신감? 아니면 연적에게 밀렸다는 열등감? 아니면 그냥 머리가 막 하얘져?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자기 애인이랑 붙어 있으니까 놀랐지? 원래 모르고 맞는게 제일 아픈 법이야. 너도 기습 당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잖아. 네 애인은 당연히 말 안해줬겠지? 여자 둘 한번에 먹으려는 속셈이겠지.  말이야…."

말이 없던 델렌이 신나서 떠드는 서준의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분홍빛 입술 사이로, 서준은 상상도 못할 말이 튀어나온다.


"그, 말씀 중에 죄송한데.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

"………."

그 말에, 서준이 당황하며  먹은벙어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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