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8화 〉#5. 델렌과 흑백 (20) (118/162)



〈 118화 〉#5. 델렌과 흑백 (20)

철그럭, 철그럭.


'좋은 자리네.'

딱 좋게 자란 수풀과 빛 한 점 없는 그늘진 공간. 지상은 거의 눈높이까지 자란 기다란 수풀더미에, 공중은 우거진 나무에 시야가 차단돼서 쫓기고 있는 사람이 숨어들기에 딱 좋았다.

현상 수배범으로서 원치 않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델렌이 가죽 갑옷을 벗었다. 갑옷과 안에 받쳐입은 천옷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핏물로 온통 시뻘갰다.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노리고 한탕에 신세를 펴고자 하는 이들이 많으면 하루에 십수 명씩 달려들었고, 델렌이 멀쩡히 살아있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들은 모두 죽거나 반죽음 상태가 됐다. 괴물 같은 저력이었지만 델렌 역시 이런저런 상처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비록 발각되어 추적당하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추적자들 간의 협력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교단의 추격대와 현상금 사냥꾼들은 동일한 목표를 쫓는 중임에도 그저 남남일 뿐이었다. 그리고 돈만을 좇는 현상금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집단적인 협력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머릿수가 많으면 당연히 파이가 작아지기 때문이다. 작은 파이 조각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간절한 생각이 아직 그들에겐 없었다. 그들은 사냥꾼이면서도 사냥감을 과소평가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결론적으로 델렌은 한 번에 많아봐야 대여섯의 추격자만 상대하면 됐다. 그리고 결과가 증명하듯이,  정도 숫자는 델렌이라는 괴물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괴물은 비록 자잘한 상처는 입을 지언정, 쓰러질 정도의중상은 단  번도 입지 않았다.

우우웅….

"후우…."

델렌의 손에서 미약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성기사 중에서도 소수만이 쓸 수 있는 치유 마법. 비록 자기자신만 치유할  있는 반쪽짜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기적을 이뤄내기엔 충분했다.

치유의 빛을 쬐는 환부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움푹 파이거나 뜯어지고 찢겨져서 시뻘건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던 곳에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서서히 차올랐다. 벌써 백 명이 넘는 추적자들이 델렌을 찾아내고 습격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큰 부상 없는 좋은 몸상태로 적들을 맞이했다. 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것 역시 적지 않는 피로감을 부담해야 했지만, 당연히 다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치유가 끝나고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편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신성력을 버리고 마나를 새로 수련했다. 신성력과 마나는 비유하자면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같은 느낌이고, 한쪽을 쓰면 한쪽은   없다는게 정설이자 상식이었다. 그래서 델렌도 다시는 성기사의 힘을 쓸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여전히 자기 몸에 머무르고 있는 신성력을 느꼈고, 순식간에 예전의 경지를 복구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양손잡이 생활이 점점 익숙해졌고, 얼마 가지 않아 성기사 고유의 방어 마법과 회복 마법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렇게 델렌은 마나와 신성력을 병용하여 수많은 교단의 추적자들과 현상금 사냥꾼들을 물리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신성력이라….'

신성력. 성스러운 기운. 거짓됨 없고 신실하며 정의로운 이들에게 허락되는 특별하고도 성스러운 힘. '마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서로운 권능. 신도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자 특별한 가호. 반드시 올바른 일에 써야 할 고귀한 힘.

델렌은 수습 기사 시절, 신성력에 대해 그렇게 배웠다.

'개소리.'

하지만 실상은 그저 마나와 수평적인 위치에 있는 또 하나의 에너지일 뿐이었다.  증거로 신앙을 버리고 변절자가  지금도 멀쩡히 신성력을 쓰고 있잖는가.


그리고 델렌이 유일한 증거도 아니었다. 부패한 교단의 여러 쓰레기들. 이를테면 추기경이나 이단심문관, 자신을 범했던 선배 성기사들…. 그런 타락한 자들도 당연하다는  신성력을 휘둘렀다. 신성력은 깨끗하거나 고귀한 힘 따위가 아니었다.   알면 누구나 다룰  있는…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에너지일 뿐.

델렌은 존경하던 신학자인 아버지, 혹은 어렸을 적에 봤던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을 보고 성기사를 꿈꿨다. 그녀의 신앙심은 따지고 보면 동경심과 환상에 가까웠고,  환상이 깨진 뒤에는 그 얄팍한 신앙심이 오히려 증오로 바뀌었다. 종교에 대해 더더욱 냉소적인 태도가 됐고, 거의 무신론자에 가깝게 마음이 변했다.


신이란 자가 진정으로 있다면, 정의와 규율의 신 하이라크가 실존한다면 이런 쓰레기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존재할 수가 없다.


신은 없다. 설령 있다 쳐도, 인간이 떠받드는 그런 절대선 같은 존재는 아니다. 인간 세상에 원천적으로 개입하지 않거나, 아니면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이 맞을 거야.'

순수했던 델렌의 마음은 수감자가 되기도 전부터 이미 검게 물들었다. 다행히 그녀의 선한 면마저 전부 새카맣게 물든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신앙심 만큼은 모조리 증발했다. 그리고 신앙심이 차지하던 공간에는 델렌의 악의가 가득 들어찼다. 그 악의는 교단의 개들과 추적자들을 잔인하게 찢어발겼으며, 델렌은 점차 그들의 고통을 즐기게 됐다.

'이런 내 모습… 나쁘지 않아.'

성기사를 지망했던 어린 소녀 델렌은 이미 죽었다. 지금은 오히려 대악당 취급을 받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새카만 '악의'가 이제는 익숙했다.

….

….

….


사아악!

티잉!

공기를 날카롭게 찢으며 내려친 칼이 허무하게 튕겨져 나갔다. 델렌이 신성력으로 이끌어낸 방어 마법은 한낱 날붙이로는 흠집도 낼 수 없었다.

"이런 씨발… 으아악!"

"……."

투와악!

마치 가죽 주머니가, 그리고 그 안의 딱딱한 덩어리가 터지는 듯한 소리. 델렌이 말없이 메이스를 내리쳐 남자의 두개골을 쪼갰다. 타원형의 머리가 거의 절반 가까이 함몰되어 반원형처럼 찌그러졌다. 안에 얇은 철판이 있는 가죽 투구는 화살을 막을 정도로 단단했지만, 메이스에 아지랑이처럼 어려 있는 마나의 기운까지 막아낼 순 없었다.

쌔애액!

또다른 날카로운 파공음. 화살이 델렌의 귓볼을 스쳐 지나갔다. 화살이 만들어낸 작은 바람에 델렌의 옆머리가 가볍게 휘날렸다. 저 멀리에 활을  궁수가 보였다. 적과 근접전을 펼치던 동료가 쓰러지자 곧바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거슬렸기에, 델렌은탁 트인 시야를 통해 마치 눈빛으로 뚫어 죽일 듯이 궁수를 노려봤다.

"그래. 어디 해 보자."

델렌이 씨익 웃으며 방금 즉사한 놈의 시체에서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거리를 가늠하듯 한쪽 눈을 감으며 자세를 잡았다. 뭔가 싸늘한 느낌을 받은 궁수가 다시금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으나, 그것은 그의 크나큰 판단 미스였다.


쏴아아악!

푸욱!

"끄윽! 크르르…."

궁수는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투척된 검에 의해 목이 꿰뚫렸다. 입과 목에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며 피 끓는 소리를 내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시체가 되어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완승.

델렌은 진작에 죽인 두 명의 시체와 방금 죽인 두 명의 시체를  차례 훑어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별로 즐기지 못했네.'

"아…."

마치 피에 굶주린 혈귀 같은 모습을 자각한 델렌이 흠칫하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비록 놈들의 고통이 달갑다고는 해도, 주객이 전도되어선 안 된다.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죽이려했고, 정당방위로 싸우는 과정에서 조금 재미를 보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즐기려는 목적으로 싸우는건 안 된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양심의 마지노선이었다.


'정신 차려!'

내면의 '하얀 마음'이 델렌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그 질책에 가슴이 따끔따끔했지만, 그와 동시에….


짜릿하기도 했다.

멍하니 서있는 델렌의 눈빛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몽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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