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9화 〉#5. 델렌과 흑백 (21) (119/162)



〈 119화 〉#5. 델렌과 흑백 (21)

"해냈어…."

시간이 흘러, 완성된 여섯 명의 파티. 용사와 다섯 여자들이 마침내 마왕을 쓰러트렸다.

지상에 세워진 마왕의 성은 주인을 잃었고, 왕을 잃은 마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마왕을 대신할 핵심 지휘관들은 마왕보다 먼저 용사 파티에게 암살당한상태였고, 지휘 체계가 붕괴된 마족들은 분노한 인간의 군대에게 말살당할 일만이 남아있었다.


치열한 승부였다. 누가 죽었어도, 설령 이쪽이 전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독한 혈전이었다. 그러나 정말 천운이 따른 건지, 다행히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 용사와 여자들은 승리한 것이, 그리고 모두 생존한 것이 믿기지 않는 건지 오히려 얼떨떨한 분위기였다. 그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게 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

그러나….

현실은 달콤하기는 커녕 인상이 잔뜩 찌푸려질 정도로 씁쓸했고, 더럽고, 부조리했다.

"아아, 그렇구나…."

"하! 인류를 구원한 영웅 대접은 바라지도 않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항상 싱글싱글 웃던 델렌조차 지금은 짜증을 냈다.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는 건가요?"

이 중에선 도피 생활이 가장 익숙하지만, 그만큼 지긋지긋한 델렌이 힘없이 물었다.


언제나 정확하고 날카로운 판단을 하는 용사와, 파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레이아의 공통된 결론.

-도망쳐야 한다.

밖에서 마족을 학살하고 쳐들어오는 인간의 군대. 그들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고, 모두에게 이유가 있었다. 델렌은 여전히 교단에서 역대 최고의 현상금을 내건 현상 수배범이었고, 레이아는 인류가 배척하는 흑마법사였으며, 아리스도 콜로세움에서 무단 탈출한 노예 검투사였다. 용사와 지나와 미라는 딱히  일은 없지만 그 세 명을 도운 것만으로도 중대한 범죄였다. 거기에 더해 그들을 동료로 맞이하고 직접적으로 도우며 여러 사건들을 벌였으니, 파티 전원이 어딜 가도 즉결 처형 감이었다.


먼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즉 악인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처벌 받아야 할 것은 부조리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요지경이고, 인류의 구원자인 그들은 이젠 마왕 타도라는 대의조차 없이 도망자 신세가 됐다. 평생을 숨고 도망치며 살아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들 기분이 착잡한지 표정들이 나빴다.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승리의 순간에 그들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있던 용사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

"네?"

"차라리 이렇게 상황이 명확하니, 적어도 배신 당할 일은 없잖아. 방심한 상황에서 기습 당하는 것만 아니면, 마왕도 어찌 못한 우리가 누구에게 당하진 않겠지. 우리 모두 살아남은 것에 의미를 두자. 만약 누가 죽거나 했으면, 나는…."

용사의 말에  늘어졌던 여자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그의 말대로 천만다행히도 아무도 죽지 않았고, 모두 살아남은 것 자체가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소소하게 자축하며 지친 몸으로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

….

"그래서, 힘들겠어?"

"…응."

마왕의 성 꼭대기. 레이아의 표정이 어두웠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마왕성은 완전히 포위됐다. 고작 여섯이서, 심지어 대부분의 힘을 써버린 직후의 지친 몸을 이끌고 대군의 포위를 뚫고 나갈 순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오히려 곤란하게 됐다. 용사 파티가 생각보다 빠르고 깔끔하게 마왕을 죽였기 때문에, 구심점을 잃은 마족의 군대가 인간의 군대에게 일방적으로학살당하고 있었다. 인간의 군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막강했다.

이제까진 그들과 직접적으로 싸운 적이 없었다. 교단과 몇몇 추적자들에게 쫓기긴 했지만, 저런 대규모의 군대와는 싸울 일이 없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듯이, 용사 파티의 목적이 마왕을 타도라는 것을 알게된 인간의 군대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돕진 않았지만 딱히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왕이 죽어서 승리가 확실해진 지금은 얘기가 달라진다. 오합지졸이 된 마왕군을몰살함과 동시에 용사 파티를 추적해도 될 정도로 상황이 여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사실 인류 입장에서 현상 수배범이니 흑마법사니 탈주 노예이니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인류의 모든 국가가 연합한 대전쟁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용사 파티의 힘이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이었다. 고작 여섯 명인 주제에, 수백만 군대도 해내지 못한 마왕 척살을 해냈으니…. 그들이 인류를 적으로 돌리면 얼마나 큰 문제가 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왕이 암살당하거나 게릴라 작전으로 엄청난 희생이 날 수도 있었다. 용사 파티중 특히 여자들에겐 인류를 증오할 만한 동기가 차고 넘쳤다.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인류의 입장에서 마왕을 토벌한 용사 파티는… 죽이지 않으면  되는 위험 분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마왕군의 잔당이 아직 건재한 와중에도 인류의 군대가 용사 파티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군대는 빠르게 마왕성을 오르며 용사 파티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마왕군이 방지턱처럼 그들의 진격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용사 파티에겐 감사할 일이었다.우습게도 이제는 마왕군이 용사 파티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지친 몸으로 강성한 군대를 정면돌파 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고, 가장 먼저 떠올린 방안은 텔레포트였다. 먼 곳으로 순간이동해서 포위를 벗어나면 파티는 필사적으로 도망칠테고, 아마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다.  무지막지한 마왕군의 심장부에 잠입해서 마왕을 습격해 암살한 최강의 정예 부대는 수십 수백 정도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고 오로지 군대로 상대해야 하는데, 용사 파티는 규모가 큰 군대 따위에게 따라잡힐 실력이 아니었다. 지금의 위기만 모면한다면, 앞으론 이런 기회가 요원할 것이다.


"어때, 가능해?"

도리도리.


안타깝게도, 텔레포트는 불가능했다.


일단 텔레포트 자체가 인원수가 늘어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마나를 요구하는데, 마왕과 싸우느라 마나를 쏟아 부은 레이아에겐 마나의 여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진작에 펼쳐진 마나 교란 마법진이 마왕성을 둘러싸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 비행기를 띄우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전부 이상한 곳으로 흩어지는 것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결과일 테고, 차원에 틈에 끼여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심지어 신체의 일부만 순간이동해서 몸이 토막날 수도 있었다.  텔레포트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어떡하지?"

미라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지나고, 유독 조용하던 델렌이 말을 꺼냈다.

"용사님. 그럼 이렇게 해요."

비장한 표정. 용사는 왠지 델렌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제가 시선을 끌게요. 버티는건 제일 자신 있으니까. 성의 좁은 지형을 어떻게 이용해보면 못해도 한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까…."

델렌의 말이 이어질수록 용사의 표정이 구겨졌다. 나름 용사를 설득하기 위해 차분하게 말하며 그의 팔을 붙잡으려던 델렌은 자신을  쳐내는 용사의 행동에 흠칫했다. 용사가 마왕 토벌 때보다도 험악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럼 이건 어때. 내가 혼자 남을 테니까 너희들끼리 도망쳐. 아니면 뭐, 델렌 너만 도망치고 우리가 막아줄까? 응?"

"아니 용사님, 그게…."

"델렌, 제발. 방금 말했잖아. 모두 살아남은 것보다 좋은 소식은 없다고. 만약 너희 중 하나라도 죽었으면 난,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을 거야.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살리고 싶은게 너희들인데, 네가 나한테 그따위 말을 해?"

"…죄, 죄송해요. 말실수를 했어요."

비록 용사의 표정과 말투는 험악했으나, 눈빛 안에 담긴 감정은 분노보다는 슬픔이나 간절함이었다. 그의 마음을 안 좋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델렌이 잘못을 인정하고 순순히 사과했다. 그 모습에용사도 다신 그러지 말라는 말만 할 뿐,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쿵! 쿠쿠쿵!

"이런, 벌써!"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진동. 일반인이라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마왕성 깊은곳까지 헤집으며 바닥을 울리고 있었다.


"이거,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야 하나…."

여자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사는 뭔가 비장의 수라도 있는 건지, 그렇게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보던 레이아가 물었다.


"마스터, 무슨 생각해?"

"그게 사실…. 아! 드디어 왔군. 긴가민가 했는데, 후우…. 다행이야."

용사의 말과 동시에 느껴지는 엄청난 에너지!

'누가?'라고 물어볼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흐윽!"

"읏! 무, 무슨…."

모두가 심장이 옥죄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마왕 특유의 사악한 기운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이 너무나도 막대하여 위압감이 엄청났고, 그 무형의 압박감에 몸이 위험 신호를 마구 보내고 있었다. 이 에너지의 주인이 마왕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것을, 여자들은 직감했다.

"아, 긴장하지 마. 아는 사이니까."

"그, 그래요? 그래서 도대체 누구…."

용사의 덤덤한 말투에 아리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용사는 냉정한 건지 냉랭한 건지 모를 애매한 어조로 말했다.

"날 여기로 보낸 존재."

위기의 순간, 시공의 수호자가 용사 파티 앞에 강림했다.

….

….


….

용사는 온갖 악조건에도 착실히 원정을 해냈고 좋은 동료를 모아 마침내 마왕을 쓰러트렸다. 그 대가로 그는 시공의 수호자에게 가지 소원을 빌 수 있게 됐다.


시공의 수호자는 신을 자처하지는 않지만 신이라 불릴 만큼 초월적인 권능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 존재에게 소원을 빌게 된 용사는 불로불사의 몸이 될 수도 있었고, 지금 자신을 위협하는 인간의 군대를 처리해달라고도 할  있었으며, 심지어는 마왕처럼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도 있었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은 곧 백지수표를 발행하는 것과 같았으며, 용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일들을 실현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용사의 소원은 간단했다.

원래 세계로, 지구로 돌려보내 달라.


여자들과 상의한 후에 용사가 요구한 것이었다. 물론, 여자들과 함께 간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시공의 수호자는 순순히 소원을 들어줬고, 용사와 여자들은 결국 용사의 고향인 지구에도달한다.

….

….


따지고 보면, 용사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애초에 동의는 커녕 통보조차 없이 냅다 자신을 어둡고 더럽고 치사한 판타지 세계에 던져넣은 것이 시공의 수호자였다. 말이 좋아 차원 이동이지, 사실상 납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마왕을 토벌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까지.

그런납치범을 순순히 믿을 리가 없었다. 만약 진짜로 엄청난 소원을 빌었다면 본전도 못 찾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끔씩 TV 등에서 나오는, 소원을 왜곡된 형태로 들어주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왕이 죽으며 남긴 저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고, 나중에 물어보니 그제서야 대답하는  뻔뻔한 모습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믿지 않았고, 그래서 손해보지 않았다. 용사는 적어도 나쁜 선택지는 잘 피해간 것이다.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과 다섯 여자의 목숨을 두고 도박을 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용사는 여자들과 함께 지구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됐다.

….

하지만  현명한 용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델렌의 흑백. 정확히는 델렌의 '흑'.

악의적이고, 가학적이고, 잔혹하기까지 한 그녀의 성향. 아니, 이제는 '욕구'라고 불러도  정도로 그녀의 내면에 깊숙히 자리잡은 어두운 부분.

기본적으로 지구는 판타지 세계에 비해 폭력이 엄청나게 적은 편이고, CCTV나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무서운 수사 능력이 있었기에 델렌이 어려움을 겪을 법했다.

게다가 다른 여자들은 평화에 안도하며 지구 생활을 즐기는 반면 자신은 때때로 솟구치는 사악한 충동 때문에 괴리감과 고립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모든 감정은 상대적인 법이고, 자신만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되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잠시 간과한 델렌의 '흑'은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내면에 선명히 자리잡고 있었고, 차원을 넘어 지구에서까지 그녀를 좀먹으려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