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5. 델렌과 흑백 (22)
이렇게 뭔가 있음을 암시하고 나서 이런 말을 하면 김이 빠지겠지만, 결론적으로 걱정할 만큼의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이 잘 풀린 이유는 다름아닌 마왕의 저주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지구 생활에 적응하던 초창기 당시엔, 저주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저주가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델렌의 검은 면, 즉 델렌의 '흑'은 따지고 보면 욕구에 포함됐다. 인간의 대표적인 욕구인 식욕, 성욕, 수면욕처럼 델렌의 '흑'은 잔혹함과 가학심 등이 뒤섞인 어둡고 끈적한 욕구였고, 이성으로 억누를 순 있어도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간 욕구를 풀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마왕의 저주는 어떤 원리에서인지 '흑'의 욕구를 해소시켜줬다. 따지고 보면 새디즘에 가까운 델렌의 '흑'의 욕구를, 마조히즘에 가까운 [암캐] 저주가 어떤 원리로 풀어주는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델렌이 추측하기로는 마왕의 저주가 '흑'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욕구를 풀어주는 것 같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다행이었다. 엄격한 현대 사회는 커녕 폭력이 난무하던 판타지 세계에서조차 큰 문제가 될 수있는 '흑'이 발현되지 않으니 말이다. 용사가 델렌의 [암캐] 저주를, 마치 [해독제]라는 이름의 축복처럼 생각하는게 이런 이유에서였다.
결론적으로, 원래는 가학적인 면이 인상적이던 델렌이 지구에선 오히려 피학적인 캐릭터로 변화했다. 저번에 레이아가 네토 플레이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나름 큰 변화를 보여줬지만, 그래도 S에서 M이 되어 완전히 정반대로 변한 델렌의 변화보단 임팩트가 작았다.
….
그렇다고 '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저주로 인해 상당 부분이 억제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 안에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델렌을 기피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멤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법이고, 부정적이고 불안한 면이라곤 하지만 델렌의 '흑'은 엄연히 그녀를 이루고 있는 여러 성질 중 하나였다. 즉 그녀의 일부인 것이다.
다들 가끔씩 걱정은 할지라도 델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혹시라도 그녀가 눈치 보거나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노력했고, 델렌 역시 용사와 다른 여자들이 신경써주는 것을 체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모두를 안심시키기 위해 원래 성격보다도 좀 더 밝게, 좀 더 천진난만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성격도 더 좋아졌고 마음도 더 편해졌다. 델렌은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렇게 지구에 지내면서 바뀌게 된 성격을 가슴 깊숙히 품고 해맑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흑'은 마치 다른 욕구와 비슷했다. 꼭 한계점이 찾아오지 않아도, 즐거움을 위해 욕구를 채우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식사나 수면과도 같았다. 델렌은 인간을 초월한 마나 유저여서 식사나 수면, 배설이 거의 필요 없다. 하지만 그녀는 허기나 졸음기를 끝까지 참지 않고 많게는 하루에도 여러 번 먹고 잔다. 욕구를 채움으로서 신체적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델렌의 '흑'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욕구를 풀어줄 일이 거의 없는 것 뿐이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가끔씩은 그녀도 악의적이고 잔인한 일을 하며 욕구를 풀어야 한다. 다만, 지금은 델렌의 한계점이 아니었다. 참으려면 충분히 더 참을 수 있었다. 지금 델렌이 이러는 것은, 욕구를 채우는 것보단….
'재미'를 위해서였다.
….
또 한 가지.
이것도 저주 때문인진 모르겠으나, 지구에 온 이후로 델렌은 꼭 사람을 죽이거나 고문하고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없었다. 마치 악동처럼, 당하는 입장에선 절대 웃을 수 없는 짓궂은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나쁜 짓'의 대상은 바로….
윤서준.
델렌의 전 남친이자 현 포주. 미련하게도 델렌을 포기하지 않은 바보였다.
…
그 카페.
서준에게 있어선 안 좋은 기억만 있는 장소. 그는 정말 오기 싫었지만, 마치 운명처럼 결국 다시 이곳을 제발로 찾아왔다. 그의 눈앞에는 마음 같아선 당장 후려치고 싶은 그 빨간 머리가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포주님."
"하."
드르륵.
만나자마자 비꼬아대니 머리에 열이 뻗쳤으나, 서준은 일단 의자를 꺼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에 오래 있고 싶지도 않았고, 눈앞의 놈과 길게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델렌을 며칠 동안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
"양보?"
반쯤 누운 자세로 편하게 있던 빨간 머리가 흥미가 생겼는지 다리를 꼬며 물었다. 분명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단칼에 거절당할 가능성도 염두해뒀던 서준은 내심 안도하며 나름 정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쪽이 델렌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거 다 압니다. 당신이 말하면 델렌은 무엇이든 하잖아요. 아닙니까?"
"흠, 그렇지. 그래서? 내 소유물인 델렌을 왜 달라고 하는 거지?"
예상대로,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여자를 달라는 말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장 주먹을 꽂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갔겠지. 델렌이 놈에게 무슨 취급을 받는지 알 만했다. 서준은 속으로 분노를 삼키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했다.
델렌은 놈을 떠받들고 있고, 놈은 델렌을 마치 물건처럼 쉽고 가볍게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서준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가장 상황이 나쁜건 자신이었기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겐 기회가 없다….'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재계약 문제였다. 델렌과 골든 비치 사이의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그녀가 재계약을 할 것 같지가 않았다. 별다른 근거도 없는 한낱 직감일 뿐이었지만, 서준은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이미 지난 일엔 후회하지 않아야 하지만,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그때,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그녀를 보고 감정에 휩쓸려 쓸데 없는 자비를 베푼게 문제였다. 불공정 계약이든 뭐든 간에 몇년이고 아주 꽁꽁 묶어뒀어야 했는데, 그땐 그저 사치벽 가득한 철없는 년에게 현실의 쓴맛을 알려주겠답시고 맛만 보는 수준의 단기 계약을 했다. 익숙해질 때 쯤 끝나는 아주 짧은 계약….
아무리 원수 같은 전여친이라지만, 그 어떤 남자가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를 천재적인 창녀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못하겠다고 울고불고 매달리면 좀 봐줄까 생각도 했었던 서준은, 델렌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골든 비치를 몇배로 살찌우고 먹여살리는 에이스가 되자 기분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하. 창녀같은, 아니 진짜 엄청난 창녀 년….'
그리고, 그 특급 창녀에게 아직도 미련이 있는 병신.
서준은 자기가 봐도 병신 같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델렌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모든 걸 그냥 놓쳐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서준의 과감한 결단을 요구했고, 그는 지금 그토록 증오하는 빨간 머리 앞에서 '나름'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는 것도 짜증났지만, 무엇보다도 열이 받는 것은 자신을 뭣도 아닌 것처럼 보는 그의 미적지근한 눈빛이었다.
자기를 좆밥으로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델렌조차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지까짓게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델렌을!
"좋아."
"……예?"
"가져가. 3일. 2박 3일 주지. 굽든 삶든 알아서 하시고, 대신 반납은 깨끗하게. 알았나?"
마치 물건을 빌려주듯이 가볍게 델렌의 처우를 결정하는 빨간 머리. 서준은 얼떨떨했다. 델렌을 물건 취급하는 놈의 태도에 대한 분노. 그리고 델렌을 잠시나마 소유하게 됐다는 기쁨이 공존하는 양가감정이 그의 기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왠지 바짝마른 입술을 열며 서준은 일단 감사를 전하려 했다.
"…가, 감사합…."
"감사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계속 정면을 보던 그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치 자기 발치에 뭔가 있는 것처럼.
"으으음…. 이제 그만 나와."
마치 무언가를 진득하게 배설하는 듯한 남자의 낮은 신음. 그 익숙하고도 달갑지 않은 소리가, 내내 시큰둥하던 빨간 머리의 입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서준은 오싹한 느낌에 몸을 움찔했다.
쪼오오옥.
마치 마무리를 짓듯 무언가를 깊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서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놈의 발치, 즉 테이블 아래였다.
"…설마."
스피커를 통해 매장 전체를 채우는 노래 때문에, 카페 안에서 나는 어지간한 소음은 알아서 묻힌다. 그 때문에 서준은 이제까지 아래에서 났던 미세한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소리는, 밑에 있는 누군가가 다 들리라고 일부러 크게 낸 소리였다.
"나오래도."
서준은 그의 아래에 있는 것이 여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의 목소리부터가 달랐다. 자신을 향했던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다소 시크한 편이긴 하지만 분명 상냥한 말투였다. 제 3자조차 그걸 느낄 정도이니,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여자는 말할 것도 없이 목소리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을 테지.
쪼옥, 쪼옥, 쪽.
그에 대답하듯, 밑의 여자는 마치 애정 표현처럼 몇 차례 더 '무언가'를 물고 빨다가 잠시 침묵했다.
"…잠깐. 지금 무슨…."
그제서야 이상야릇한 상황에 반응한 서준은 항의하려 했으나, 마치 노린 것처럼 똑같은 타이밍에 아래에서 여자가 기어나왔다. 익숙한 벌꿀색 금발,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 곧이어 마주치는 예쁜 갈색 눈동자.
"…델렌."
"후후훙."
빨간 머리의 아래에서 나온 델렌은 입을 꼭 다문 채로 서준에게 눈웃음쳤다.
그 새끼 밑에서 뭘 한거야.
물론 서준은 답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묻지 않았다. 묻지 못했다. 공허한 메아리가 그의 마음 속에서 맴돌았다.
넋이 빠진 서준을 보는 델렌의 표정은 제법 흥미진진했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감정은 장난기와 악의의 경계를 몇 번이고넘나들었다.
"흐."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아주 잠깐 동안 오싹하게 번들거렸다.
토도도독.
델렌이 서준 쪽으로 손을 뻗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빠르게 톡톡톡 두드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서준이 무방비한 눈빛으로 델렌을 쳐다봤고, 델렌은….
"아아~."
동그랗게 입을 벌려 보였다. 연분홍빛 입술과 깨끗한 순백의 치아. 그 안쪽에는….
척 보기에도 끈적하고 진득한 액체가 입안을 온통 희뿌옇게 물들이고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그녀의 분홍빛 혀조차 마치 코팅된 것처럼 정액으로 하얗게 오염된 상태였다.
꿀꺽.
"으음."
그리고, 마치 달콤한 꿀이라도 먹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정액을 삼키는 델렌. 이내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 안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씨발."
서준은 망연한 얼굴로 힘없이 욕설을 내뱉는게 전부였다.
….
….
잠시 간의 침묵.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것은 오로지 서준 뿐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의 빨간 머리가 대화를 진행시켰다.
"서로 대충 눈인사는 했지? 귀찮게 여러 번 만나기 싫으니 지금 바로 데려가."
"히잉. 저, 팔린 거예요?"
"아니. 돈도 안 받고 그냥 빌려주는 거야. 무료 대여. 자, 델렌. 이제 저쪽으로 가."
"헐, 심지어 무료였어? 너무행…."
둘은 마치 커플끼리 꽁냥거리는 것처럼 천진난만한 분위기였다. 커플이 꽁냥대듯이 건전한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델렌은 그 특유의 색기와 교태를 숨기지 못하고 달콤한 암컷의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델렌 본인조차도 조절할 수 없는 본능적인 부분이었고, 서준은 익숙했으나 그 최고의 암컷으로서의 모습이 왠지 자신보다는 빨간 머리 놈과 훨씬 잘 어울리는 듯해서 불쾌했다.
진심으로 사랑할 뿐더러, 심지어 남이 보기에도 천생연분처럼 딱 맞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 그건 델렌과 서준이 아니라, 델렌과 빨간 머리였다….
'아, 아냐!'
서준은 안 그래도 모자란 심적 여유를 총동원해, 순간 인정해버린 그 사실을 정면으로 외면하고 부정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델렌이 테이블 밑에서 기어나온 순간부터 폭풍우를 만난 조각배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그는 대화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었고, 자존심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뿐이었다. 일어나는 일에 반응하는 것조차 벅찬 상태였다.
"자, 이제 슬슬 입으시지."
'입어? 뭘?'
빨간 머리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델렌을 위아래로 훑었다. 날씨에 비해 얇은 옷차림. 무난한 긴팔 상의와 허벅지를 반 넘게 드러낸 미니스커트, 그리고 무릎 위까지 오는 오버니 스타킹. 치마 - 맨살 - 스타킹 총 세 개의 색상으로 이루어진 영역 중 가장 작은 맨살 부분이 남자의 시선을 가장 많이 빼앗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겉보기엔 뭔가를 더 입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서준은 자연스레 안쪽을 떠올렸다. 굳이 입으라고 핀잔을 줄 만한 것은….
'속옷?'
그의 추론은, 틀리지 않았다.
빨간 머리가 어디서 꺼내들었는지, 손수건으로 착각할 만큼 작고 얇은 검은색 팬티를 검지로 빙빙 돌리다가 델렌의 앞에 툭 던졌다.
똘똘 말면 한 주먹도 안 될 것 같은 팬티를 집어든 델렌은 그걸 집고 펼쳐서 다리를 넣는다. 일어나서 한쪽 발을 들고 마치 학처럼 무릎을 접으니 그녀의 치마 안쪽이 자연스레 서준에게 드러났다. 서준의 예상대로, 안쪽에는 가려주는 것 하나 없이 하얀 맨살만이 보였다. 허벅지, 골반, 그리고 가장 깊숙한 그곳 역시….
'아아….'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일자 세로선을 본 서준은 사타구니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델렌은 고의였다. 발목 부근에 팬티를 놓고 아주 살짝 발만 들면 아무런 노출이 없었겠지만 델렌은 굳이 똑바로 일어서서 골반 부근의 높이까지 다리를 들었다. 굳이 서준 쪽을 향하면서 말이다.
"헤헤헤."
해맑게 웃는 델렌.
그런 그녀의 웃음에, 서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년도, 저놈도, 자신도, 그리고 이 상황 자체도 전부 미쳤다. 누가 뭐래도 미친 년, 그리고 그 미친 년에 미친 병신.
'돌겠군.'
이대로 있다간 델렌을 놓칠 것 같다는 마음에 급하게 담판을 지었고, 빨간 머리에게서 델렌을 3일간 빌리는데 성공했지만….
서준은 마치 선로를 달리는 열차처럼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