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5. 델렌과 흑백 (23)
2박 3일.
서준은 현역 군인 시절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2박 3일짜리 짧은 휴가를 나갔던 과거가 생각났다. 물론 즐거웠지만 짧기는 아주 미치도록 짧았고, 오히려 부대에 복귀하고 적응하는데 괜히 더 고생만 했다. 아무리 좋은 시간을 보내도 정해진 시간이 짧으면 감질맛만 나고 더 힘들다는 소리였다.
지금은, 델렌과의 2박 3일은… 그보다도 더 심했다. 아무리 과거가 미화되고 순화된다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평생을 같이 할 여자를 쟁취하기 위해 경주마처럼 전력질주했던 시간이잖는가. 정말, 짧아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짧았다.
새액, 새액….
집중하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숨소리.
고작 어스름한 스탠드 불빛이 전부였으나, 델렌은 마치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여주인공처럼 예쁘고 빛이 났다. 하는 짓은 말 그대로 창녀였고 걸레년이었지만, 어쩌다보니 이런 년을 좋아하게 됐고 간절히 갖고 싶어졌다. 뒤늦은 미련을 떨쳐내지 못해 꼼짝없이 사로잡혔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부터 잘해줬어야 했는데….
"으음…."
델렌이 뒤척이다가 서준의 품을 파고들었다. 마치 따뜻한 베개를 찾는 것처럼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게 귀여웠다. 깨어있을 때 하는 짓도좀 순수하고 예쁘장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는다.
"하아…."
그러나 서준은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자고 일어나면, 델렌을 돌려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그래서 이틀 내내 무리하면서까지 그녀와 함께했다. 지금은 자고 있었기에 차마 건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쉬는 중이었다.
서준이 선택한 방법은 역시 섹스였다. 남자로서 떡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녀가 좋아하는걸 해주기 위함이었다. 서준도 나름 델렌을 오래 본 사람이었고, 그녀가 뭘 가장 좋아하는지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었다. 지금껏 경험해본 사람들 중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가장 압도적으로 섹스를 좋아하는게 바로 델렌이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하든 그녀는 섹스하는 것을 아주아주 좋아했다.
여러 시도가 있었다. 소프트하고 무드 있게, 부드럽게 해보기도 했다. 안달나게 하면서 괴롭히기도 했고, 아주 거칠게 하기도 했다. 가학적으로도 해봤고, 변태적으로도 해봤다. 나름 계획을 짜고 열심히 생각했기에 서준은 만 이틀 동안 자신이 아는 모든 종류의섹스를 정성스럽게 하며 델렌을 즐겁게 했다. 머리를 쓰는 섹스. 서준은 섹스하면서 한껏 뜨거워진 머리로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기에 피로감이 몇 배는 빠르게 쌓여갔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델렌을 만족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물론 델렌은 좋아했다. 호불호 없이 모든 섹스를 다 좋아해서 오히려 서준을 헷갈리게 했지만, 아무튼 좋아하긴 했다. 그래서 서준은 불안해졌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녀를 거쳐간 수많은 자지 중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불안감이 들었다.
애초에 성공하지 못할 것을 직감했지만, 그래도 서준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봤다.
그리고, 현재.
"………."
델렌이 곤히 잠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휴식 시간. 델렌은 수십 번을 절정하면서 온몸으로 기뻐했고, 서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음을 직감하며 그녀와 함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동침을 했다.
'제발.'
간절히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서준의 복잡한 심정. 그런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지친 몸은 빠르게 몸의 주인을 꿈의 세계로 인도했다. 꿈조차 꾸지 않는 달콤한 숙면이 그를 찾아왔다.
…
타다다닥!
"주! 인! 니이임!"
용사는 굉장히 오버하며 달려드는 델렌을 맞이했다. 마나 유저, 즉 한 명의 초인이 온 힘을 다해 점프해서 안겨드니 용사 시점에선 거의 미사일이 날아오는 수준이었다.
파악!
하지만 용사는 델렌보다도 더 뛰어난 마나 유저였고, 큰 무리 없이 그녀를 받아냈다. 이런 일이 익숙한 건지용사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풍만한 가슴이 몽글몽글 폭력적인 촉감을 선사하며 남자를 기쁘게 했고, 용사는 자연스레 발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 큰 여자가 노브라로안겨들어 몸을 마구 비벼대는데 신체 건강한 남자가 어떻게 안 서겠는가.
겉보기엔 마치 연상인 남자가 어리고 해맑은 여자친구를 받아주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델렌이 용사보다 3살 연상이다. 그러나 둘은 항상 나이가 반대로 된 것처럼 지내왔다.
"헤헤헤. 우~."
입술을 내미는 델렌. 누가 보면 술 먹었냐고 물어볼 만큼 업된 분위기였다.
사실 델렌이 업된 것은 맞았다. 평소라면 엄격한 주종 관계를 델렌이 먼저 자처하며 섭 기질과 마조히즘을 충족시켰겠지만, 최근에는 용사가 주인 노릇을 하지 않고 델렌을 받아줬다. 서준의 일 때문이었다.
"쪽, 쪽쪽."
델렌이 입으로 소리내며용사의 볼에 뽀뽀해댔고, 용사는 별 반응 없이 델렌을 안아든 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행동을 용사가 봐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
….
[이제 슬슬 그만해.]
저번에, 용사는 델렌에게 짧고 굵은 톡을 보냈다. 서준을 그만 갖고 놀라는 내용이었다.
[네에엥?]
[??]
[????????]
[??????????????????????]
델렌은 한참 재미 보고 있을 때여서 그런지 불만에 가까운 의문을 마구 표시했고, 용사는 자길 막지 말라는 델렌의 은근한 표현을 무시하며 그녀를 절제시켰다.
이유는 당연히 서준이 불쌍해서였다.
사실, 예전에 델렌이 서준에게 일부러 불륜을 들킨 시점에서 델렌의 '흑'은 충분히 만족했다. 그 이후로는 그저 재미를 위한 놀이에 불과했다. 최선을 다해 창녀 일을 해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서준의 기분을 복잡하게 만들면서 델렌은 너무나도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과거의 애정, 그리고 현재의 미련을 이용해 눈치채지 못하게 은근히 서준을 괴롭혔다. 또 한편으론, 창녀로서 어쩔 수 없이 모르는 남자에게 아양을 떨고 보지를 대줘야 하는 일상이 델렌에게 있어선 최고의 쾌락이었다.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쾌감.
델렌이 느끼는 쾌감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려 마왕의 저주가 동원됐기에, 델렌과 다른 여자들이 느끼는 '쾌감'은 일반인들에겐 생명의 위협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것이었다. 최고 경지에 오른 마나 유저조차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강력한 마약이랄까. 그래서 초월자인 용사의여자들조차 잘 절제하지 못하고 이끌려간다.
저번에 아리스가 박민우 패거리에게 끌려가서 마구 따먹혔던 것도 그랬다. 아리스는 마나 유저로서 일반인에게 폭력을 함부로쓰지 않고 상황을 봤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판단의 밑바탕에는 쾌감이 깔려있었다.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서 진작에 중독됐고, 평소에도 은근히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래서 따먹히거나 따먹힐 상황에 봉착하면 결국은 일단 섹스하고 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결론을 먼저 내리고, 그 다음 합리화를 위해 나름의 이유를 끼워맞춘다. 아리스가 여자들 중 가장 침착한 성격인데도 그 정도였으니, 다른 여자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용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당연하다는 듯 여자들을 막지 않았다. 전후사정이 어쨌든 애초에 모두가 다 섹스 중독이고, 섹스로 재미를 보고 살며, 그녀들의 연인인 자신은 그 섹스를 관음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니까. 자신, 연인, 그리고 제3자까지 모두가 즐거운 파티인데 그걸 장려하면 장려했지 뭐하러 망치겠는가. 그리고 어차피 억지로 막을 수도 없었다. 마왕의 저주가 그렇게 호락호락했으면 진작에 다 극복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겠지.
관음 위주의 성생활이 길어져서 그런지 지구에서의 용사는 현역 때와는 달리 방관자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심지어 아리스가 끌려간 상황에서도 바로 개입하지 않았다. 레이아가 등 떠밀지 않았다면 끝까지 화면 너머로 구경만 했을 것이다.
….
그런 용사가 델렌에게개입한 이유는, 이번 일은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용사가 방관했던 일들은 비유하자면 이쪽이 두들겨 맞은 케이스고, 델렌이 요즘 벌이는 일은 이쪽이 때리는 케이스였다.
이쪽은 애초에 맞길 원했고, 애초에 저쪽이 아무리 때려봐야 여자들은 좋아서 자지러질 뿐 별 문제가 안 일어난다. 하지만 이쪽이 때리는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저쪽은 동의한적도 없었고, 몸과 마음이 다칠 수도 있었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용사가 델렌에게 제동을 건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늦은 감이 상당했다. 윤서준은 누가 봐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고, 이젠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 눈에 훤했다. 델렌이 녀석의 신부라도 되어준다면 위로가 되겠지만, 그럴 일은 만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용사뿐만 아니라 델렌 본인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다. 결국 윤서준은 적당히 갖고 노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용사도 델렌도 서준을 딱히 동정하진 않았다. 비록 델렌이 먼저 서준의 뒷통수를 치는 이른바 '썅년짓'을 하긴 했지만, 서준 역시 홧김에 델렌을 창녀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이쪽이 먼저 맞았다고 상대방을 때리면 결국 쌍방폭행이다. 학생이라면 선생님에게, 성인이라면 경찰에게 똑같이 잔소리를 듣는다. 애초에 서준이 델렌에게 아무 짓도 안했다면 델렌도 억지로 서준을 끌여들이지는 않았을 테고, 찝찝하긴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쁜 짓이긴 하다. 용사건 델렌이건 자기들이 하는 짓을 잘 알고 있었고, 합리화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완전무결한 순백의 희생자를 노리진 않는다.
물론 완전무결한 남자는 이론상 존재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흰 장갑을 끼고 틈새 구석구석을 훑는 것과 같아서, 수백 수천명을 데리고 와도 다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시커먼게 묻어나올 것이다.
용사도 그걸 잘 알았기에, 마냥 깨끗하지만은 않은 서준에게 심심찮은 애도를 보내면서 나름의 배려로 델렌의 과속을 제제한 것이었다.
….
그리고 현재.
"츄웁, 우으음…. 헤헤헤…."
델렌이 사랑하는 용사의 입을 마음껏 탐하며 헤실거렸다.
신나게 달리며 즐기던 델렌이 용사의 개입으로 급제동을 하게 됐다. 당연히 불만이 생길 것이고, 풀어줘야 한다.
"사랑해요, 주인님."
"그래. 나도."
쪼옥, 쪽.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두 입술이 다시금 맞닿아 짧은 버드 키스를 여러 번 했다. 그들은 연인이었고, 아무리 정당한 제지였다고 해도 연인 사이에 너무 딱딱하고 계산적으로 굴면 안된다. 용사가 델렌을 멈췄으니, 델렌의 욕구를 풀어주는 것은 용사의 몫이 됐다.
델렌은 그동안 골든 비치에서 숙식하며 일을 했기에 다른 여자들에 비해 용사와 단둘이 붙어먹을 기회가 훨씬 적었다. 물론 그동안 즐겁고 문란한 나날들을 보내긴 했지만, 용사의 품 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이고 들었다. 그래서 서준을 그만 갖고 놀라는 지시에 순응하고 바로 용사에게 달려와 안겨든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델렌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용사가 자신에게 절대 소홀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꾸준한 노력으로 차별 없이 공평한 사랑을 받을 것이라 언제나 확신했다. 절대 절대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게 머리로만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델렌 역시 가끔은 불안했고, 그럴 때마다 다 벗어던지고 용사의 침대 옆자리에 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으응…."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토록 좋아하는 용사의 침대에 누워서 사랑하는 연인의 몸과 목소리와 살냄새를 느끼며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에 겨워하는 델렌의 머릿속에 서준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 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