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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화 〉#5. 델렌과 흑백 (24) (122/162)



〈 122화 〉#5. 델렌과 흑백 (24)

시간이 흘렀다. 서준이 그토록 걱정했던 골든 비치와의 재계약은 그의 예상대로 불발됐다. 기존보다 몇 배는 되는 엄청난 대우와 더불어 완전 자유를 보장했고, 쉬고 싶으면 미리 통보하고 쉬어도 되고, 등등등…. 골든 비치는 어설프게 델렌을 간보지 않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건을 내밀었다. 하지만 델렌은 마치 눈과 귀가 먼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조건에도 불구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거절했다.


물론 델렌이 없다고 골든 비치가 바로 망하진 않는다. 수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골든 비치 자체가 원래부터 꽤나 물이 좋은 고급형 업소였고 델렌을 보고 배운 여자들의 실력도 일취월장(?)했기에 그 충격을 버텨냈다. 게다가 델렌을  이상 못 만나는 고객들도 나름의 금단 현상을 겪어서, 그녀와 비슷한 여자를 찾기 위해 골든 비치를 종종 방문했다. 결론적으론 큰 타격이긴 해도, 젠가 게임마냥 델렌이라는 핵심 블록이 빠졌다고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즉 골든 비치는 무사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달갑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델렌이라는 전무후무한 에이스를 잃은 골든 비치의 관계자들은 그녀의 빈자리로 인해 온갖 노력과 고생을 해야 했고, 고객들 역시 다른 세계에서  것처럼 엄청난 매력을 가진 이쁜이를 잃어서 상당히 아쉬워했다. 당연히 그녀를 사적으로 조사하고 만나려는 이도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같은 업소의 아가씨들도 나름의 아쉬움이 있었다. 델렌이라는 초특급 에이스에게서 비롯된 낙수 효과로 별일 안하면서 몸값이 쏠쏠하게 올랐으나, 이제는 다시 열심히 일해서 자기들이 델렌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상당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들은 델렌 같은 천재를 대체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델렌과 친하게 진했던 나나는 골든 비치로부터 델렌에게 연락해서 설득해보라는 요구를 받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델렌과 만났으나 결국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와 별개로 둘이 가끔씩 만나서 논다는 소문이 아가씨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윤서준. 골든 비치의 젊은 사장은 직책에 걸맞게 골든 비치의 위기에서 가장 바쁘게 일한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낙하산인 데다가 업무 스타일이 방관형이어서 썩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의외로 위기 상황에서 가장 빛난 사람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 자지도 않으면서 고객들을 붙잡고, 또다른 물좋은 여자들을 열심히 물색했다. 여러 협력 업체와도 계속해서 얘기했다. 그런 온갖 노력과 성과로 충격을 최소화하여 골든 비치의 모든 직원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는 확실히 경영과 영업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좋은 평가는 서준과 친한 사람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와 친하게 지내고 많은 얘기를 하면서 잘 지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 억지로 일에 몰두하는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가 보였던 필사적인 모습과 잠마저 줄여가며 일에 몰두하는 열정적인 모습은 사실 골든 비치를 위한게 아니라 본인의 아픔을 잊기 위한 현실 도피에 불과했다.


비록 직원들의 평가가 좋아졌다지만 그건 서준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알아주는 이 없이 공허한 마음을 일로 달랬고, 위기를 넘긴 후에는 술로 달래야만 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또다른 여자도 만났지만 오히려 마음에 난 구멍이 더 커져서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차라리 아예 혼자 있는게 더 나았다.

….


우우웅.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준이 들고 다니는  개의 핸드폰 중 하나였다. 공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폰은 소리를 켜놨고, 사적으로 쓰는 폰은 진동모드였는데 진동이 울린 것이다. 진동이 딱  번만 울린 것은문자 메세지를 의미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에 큰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낀 서준은 대부분의 네톡 앱 설정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음 모드를 적용했고, 그의 폰에 진동을 울릴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을 포함한 극소수였다.


…델렌의 톡 역시 당연히 진동을 울렸다. 델렌이 저 혼자 훌쩍 떠나버린 거지, 서준은 아직 델렌을 떠나보내지 못했기에.

"누구야…."

술의 힘으로 간신히 잠을 자고, 딱 한 차례 울린 진동에 서준은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무언가를 직감한 것처럼. 순식간에 몸이 잠에서 깨어나 활기를 되찾았다.

액정을 켜자 미리 보기 화면을 통해 톡을 보낸 사람의 이름이 떴다.


[델렌]

"…뭐?"

현실을 인지하는 과정을 거치는 아주 잠시 간의 딜레이 이후, 서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자 안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금발, 익숙한 백옥 피부, 익숙한 갈색 눈동자. 익숙했고, 그만큼 그리워서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여자였다.

"델렌?"

뜬금없이 톡을 보낸 그녀는 이곳,  술집의 위치를 알려준 후 일절 연락이 없었다. 답장을 해도 보지 않았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마치 그냥 이곳으로 찾아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서준은 델렌과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요즈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밝은 기색으로 델렌을 내려다봤다.


설령 다시 만나자는 뜻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크나큰상실감은 그에게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갈증을 선사했고, 지칠대로 지친 그는 그저 델렌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로수를 들이키는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하다못해 그녀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더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서준은 기꺼이 당해주겠다고 생각할 만큼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그는 이미 달콤한 독이 온몸으로 퍼져 끝장났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헤헤… 앉으실래요?"

항상 반짝거렸던 델렌의 눈동자가 반쯤 풀려있는 것을 본 서준은 그제서야 델렌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보았다. 다 식은 탕 안주 하나와 초록색 술병 두 개. 하나는 비어 있었고 하나는 반도 안되는 양이 남아 있었다. 서준이 알고 있는 델렌의 주량은 분명 평균 이상이지만, 딱히 주량이 세지도 않았다. 술잔이나 앞접시, 수저를 스윽 훑어본 서준은 델렌이 혼자서 술을 마셨고, 꽤나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앉으라는 말에 서준은 잠시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옆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괜히 헛짓거리 해서 감점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1점 1점이 아쉬운 상황이기 때문에.

'하지만….'

 누구도, 가족조차 채워주지 못했던 사람의 온기. 지금 서준은 그 온기를 오직 델렌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다. 추운 한겨울 밤에 모닥불로 다가가는 것처럼,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몸이 풀리고 마음이 채워진다. 지독한 갈증으로 인한 충동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내면의 작은 욕심이 서준을 부추겼다.

게다가 먼저 부른 것은 델렌이었다. 그녀는 톡으로 이곳의 주소와  번호만 딸랑 보냈다. 먼저 톡을 보내놓고 연락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올거면 오고, 아님 말고 식의 마인드였겠지만 아무튼 델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쪽에서 조금  다가간다고 해서 문제가  것 같진 않았다.

….


그런 복잡한 계산을 끝마친 서준은 델렌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깨와 팔이 슬쩍슬쩍 맞닿는 가까운 거리였다. 델렌은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서준은 코를 간질이는 델렌의 향기를 음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과는  다른 구도였다.

델렌을 창녀로 만들고 암캐 취급하며, 그녀를 마치 버릇 나쁜 개처럼 생각하고 자신은  개의 주인처럼 행세했던…. 그런 윤서준은 진작에 사라졌다. 이젠 오히려 아쉬운 쪽이었기에 먼저 그녀의 눈치를 보고, 말조심하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많은 생각과 계산을 들인다. 자존심 따윈 아예 존재감조차 없었다. 그녀가 자기를 일반적이고 평범하게만 대해줘도 감지덕지하며 기분 좋아한다.


이제는 누가 봐도 서준이 목줄을 차고 있었다. 달콤한 독에 중독되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교묘한 함정에 빠져 델렌의 장난감이 된 것이다. 서준은 델렌이 처음부터 조용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사냥하여 몰락시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그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뭐가 어찌되든 상관 없다.


델렌이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졌다. 서준은 기꺼이 사냥감이, 제물이 되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델렌을 기쁘게 할 것이다. 앞으로 쭈욱…. 델렌이 질리거나, 서준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서준이 델렌의 속내를 눈치챈다면, 더 이상 그녀를 예쁘고 달콤한 꽃으로 보지 못하겠지. 아마 치밀한 거미줄로 자길 잡아먹으려 드는 무서운 거미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고, 서준은 자신을 칭칭 옭아맨 투명한 거미줄을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는 주인님을 정말정말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요."

"…그래?"

술주정하는 여자와 대답하는 기계. 서준은 자기한테 빨간 머리 얘기를 하는 델렌이  이상 밉지 않았다. 하다못해 한풀이 하는 감정의 배설구여도 좋으니 곁에 있고 싶다는, 절박하다 못해 찌질하고 불쌍한 마음 뿐이었다.

그리고 델렌은 서준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주제를 태연하게 꺼냈다. 이미 순순히 이곳으로 온 이상, 서열 정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더 이상의 거미줄은 필요 없었고, 이제는 마음껏 포식할 시간이 왔다. 원래는 여유를 두고 찬찬히 뜯어먹을 생각이었지만, 용사의 개입으로 인해 오늘 한탕으로 끝내야만 했다. 대신 그만큼 원없이 즐기리라 델렌은 다짐했다. 포식자의 이빨이 흉흉하게 드러났으나, 먹히는 입장인 서준은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


"주인님은 너무 완벽하세요오…. 너무너무 멋지고, 몸도 최고고, 쿨하면서도 자상하고, 섹스도 제가 경험한 남자들 중 최고예요. 근데 너무 완벽한 나머지 단점이 생겨버렸어요. 힝, 저처럼 홀딱 반한 여자가 너무 많아요오…."

"……으음. 그렇구나."

"그래서 가끔씩으은, 섭섭해에…. 나 좀 더 많이 봐주면 안되나…. 아! 주인님 단점이  하나 있네요오. 몸이 딱 하나라는거! 그래서 저도 가끔은 외롭다는 거어…."

아무리 그래도 연적에 대한 찬양 일색이니 듣는 서준은 속이 거북해졌다. 마치 그의 기색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취해서 이쪽을 제대로 보지도 않는 델렌이 타이밍 좋게 화제를 바꿨다.

"너무 잘났으니까 그런 거겠죠오…. 남자든 여자든, 멋진 사람한테 몰려드는 것은 당연해요오…. 사실 저도 많이 겪어 봤으니까요, 헤헤…."

"…."

"저도 나름 잘나가는 여자라고요오…. 주인님한테 어울릴 만크으음…."

그렇게 말하면서 델렌은 자기 뺨에 양손을 가져갔다가, 나름 프라이드인지 커다란 가슴에도 손을 대며 마치 받치듯이 밑에서 위아래로 흔들었다. 가슴골이  드러나는 복장이었기에 그 모습은 굉장히 선정적이었고, 기습적이고 치명적인 섹시함에 의해 서준의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척!

"어때요?"

"어엇?"

델렌이 확 달려들어, 서준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로의 상체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델렌이 자랑하는 공격적인 크기의 가슴이 서준의 가슴팍을 지긋이 눌렀다. 하지만 서준은 그 좋은 촉감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둘의 얼굴 역시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으므로. 촘촘한 속눈썹을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서, 보석 같은 델렌의 눈동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서준은 황홀하게 굳어버렸다.

"주인님처럼 잘난 남자는 여러 여자를 가질 자격이 있고오…."

꿀꺽.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독백하는 델렌. 서준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저처럼 잘난 여자도 여러 남자를 가질 자격이 있죠. 안 그래요?"

뒷말을 잇는 델렌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또렷했다. 취한 사람으로 생각할  없을 정도로. 풀렸던 눈빛 역시 어느새 초점이 돌아와서 보석처럼 예쁘게 빛났다. 하지만 서준은 마치 여자를 처음 겪는 쑥맥처럼, 그저 델렌과 밀착한 것만으로 정상적인 인지 능력을 잃고 흥분에 빠진 상태였다. 말 그대로 어쩔 줄 모르고 굳은 것이다.

델렌은 한때 악마같이 독하기도 했던 서준이 이렇게 변하니 썩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싱긋, 웃음을 머금고….

"어때요?"

마치 강아지가 갸웃거리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안 그래도 예쁜 애가 예쁜 척까지 하니 서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리고, 키스하기 좋은 각도를 유지하며 그대로 묻는다.


"오빠. 나 어떠냐고요."

연애하던 시절에나 쓰던 따뜻한 애칭. 상상도 못한 최고의 단어에 서준의 가슴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렸다. 심장이 마치 행동하라고 항의하듯이 쿵쿵쿵쿵 강하게 맥박쳤고, 서준은  이상 뒤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다.


"어머낫."

앞으로 들이미는 서준과 그대로 넘어가는 델렌.

델렌이 준비한 공격에 서준이 이성을 잃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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