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6. 미라의 여행 (1)
처음.
미라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용사와 자신 모두 서로에게 처음인게 많았기 때문이다.
미라에게 용사는….
처음으로 자신을 믿어준 남자, 그리고 믿게 된 남자.
처음으로 애욕을 느낀 남자. 처음으로 몸과 마음을 원하게 된 남자.
처음으로귀엽다고 느낀 남자.
처음으로 멋있다고 생각한 남자.
처음으로 마음 깊숙히 의지한 남자.
처음으로 존경하게 된 남자.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
처음으로 자기 목숨보다 소중해진 남자.
처음으로….
처음으로…….
처음, 처음, 처음,처음….
용사 역시 미라에게 처음인 감정들이 많았다. 신뢰나 사랑, 심리적인 안정감, 그리고 여자의 몸을 보고 느끼는 욕망까지. 미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를 더더욱 각별하게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이 천생연분인 것처럼 만나자마자 머리에 천둥벼락이 치면서 첫눈에 사랑에 빠진건 아니었다. 오히려 첫만남은, 첫인상은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
쌔애액!
한밤중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용사의 귓가를 스쳤다. 당시엔 모험이 완전히 초창기였고, 아무 동료도 없이 혼자 다니던 용사는 적의를 느끼자마자 칼을 뽑아 화살을 쳐냈다.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완벽한 자세, 완벽한 타이밍, 완벽한 동작. 화살은 눈으로 쫓기도 어려울 정도로 빨랐지만, 결국 그의 몸에 조금도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음?"
그러나 용사는 의문을 표했다. 분명 칼날로 쳐냈을 화살대의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용사가 초인적인 동체시력으로 감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바람으로 만든 화살이야."
위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사는 괜히 고개를 들어 확인하는 대신 빠른 움직임으로 굵다란 나무 뒤에 엄폐했다.
"판단이 빠르네. 근데 소용없을걸?"
쌔애액!
그녀는 마치 경고를 하는 듯했다. 순간 싸한 감각을 느낀 용사는 미련 없이 듬직한 엄폐물을 포기하고 재빨리 회피했다.
파바박!
그 판단이 옳았음을 그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엄폐했던 나무에 손가락만한 구멍이 나있었다. 바람으로 만든 화살이 단단하고 굵직한 나무를 관통한 것으로도 모자라 땅에 깊숙히 박힌 자국까지 만들었다. 바닥의 낙엽들이 한 차례 들썩인다.
생전 처음 보는 바람의 화살,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여자… 모험가…?
용사는 여자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고 그저 의문스러웠다.이 부근은 심심찮게 마왕군과 인간의 군대가 국지전을 벌이는 전쟁 지역이었고, 사람이 혼자 다닐만한 곳이 못 되었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자신도 제법 이상한 놈인데, 심지어 여자가 혼자 다닌다니….
아무튼, 여자의 공격에는 적의는 있었으나 노골적인 살의는 없었다. 가차없이 죽일 생각이었다면 말없이 화살만 쏘았겠지. 용사는 협상의 여지를 캐치했고, 긴장을 풀지 않은 자세로 말을 건넸다.
"뭘 원하지?"
"원해? 내가? 너한테?"
용사의 말에 여자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러더니,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며 다소 건방진 말투로 답했다.
"아, 그래. 원하는게 하나 있지. 여기서 꺼져."
"음."
용사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 부근은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 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 것도. 작은 동물들이 물 마시러 오거나,용사가 가끔씩 몸을 씻으러 오는 것을 제외하면 발자국조차도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려는 용사가 식수나 목욕을 목적으로 나름 자주 이용했다.
'잠깐.'
씻는다….
뭔가 느낌이 온 용사는 겉으로는 위쪽을 경계하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냇가를 보았다. 컴컴한 밤하늘 아래에서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이내….
"아하."
무언가를 발견했다.
확신이 생긴 용사가 앞으로 척척 걸어나간다.
쌔애액!
쌔액!
태앵!
매서운 화살. 하지만 피하고, 쳐낸다.애초에 몸을 정조준한 것도 아니어서 별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냇가에 가까워질수록 여자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뭐, 뭐야!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야!"
쌔애액!
"거 참 각박하네."
"뭐?"
"몸 좀 씻으러 조용한 곳에 왔더니…."
이제까진 걸어나가던 용사가 쏜살같이 앞으로 나가서 방금 곁눈질했던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선객이면 말을 하지 화살을 쏠 건 또 뭐야."
"아앗!"
손에 있는 것을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자 위에 있던 여자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용사가 들어보인 것은….
"내 옷 돌려줘!"
그녀의 옷가지였다.
…
"변태 새끼…."
"하하."
용사는 여자의 옷가지를 물가에 떨어트릴 듯이 거칠게 흔들어 보이며 협박했다. 인질(?)이 생기자 상황은쉽게 풀렸다. 둘은 곧바로 협상에 들어갔다. 용사는 공격하지 않는 조건을 내걸었고, 인질 때문에 공격을 멈춘 여자는 그 대신 거리를 두는 조건을 내걸었다.
협상 체결.
용사가 냇가에 옷을 두고 물러서자 여자가 뒤로 돌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화살을 수십 발을 쏴놓고 뒤를 돌라고 하다니. 사형수가 아닌 이상에야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지. 용사의 말에 여자도 차마 반박할 순 없었는지, 고민의 시간 끝에 똥씹은 표정으로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용사의 눈앞에서 수치심 가득한 표정으로 옷을 입는 여자. 미미한 달빛만으로도 그녀의 돋보이는 외모가, 그리고 시뻘개진 얼굴이 부각됐다. 밤하늘 아래 윤곽만으로도 최상급임을 확신할 수 있는 나이스한 몸매가 잘 드러나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선녀가 따로 없었다.
'선녀라….'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선녀와 나무꾼 같았다. 이런 미녀에게 옷으로 협박을 할 줄이야. 이제 집에 데려가서섹스하고 애를 셋 쯤 낳게 하면 되는 건가. 용사는 속으로 피식하면서, 옷을 입는 그녀와는 반대로 옷을 벗었다. 윗도리를벗으려 하자 여자가 비명을 지른다.
"꺅! 뭐, 뭐, 뭐, 뭐야! 미친놈! 변태 새끼!"
"뭐야. 니가 홀딱 벗고 있어도 내가 변태, 내가 벗어도 내가 변태. 어쩌라는 건데."
"뭐, 뭔 소리야! 그냥 빨리 옷이나 입어!"
"그냥 니가 안 보면 되지 않을까."
용사가 짜게 식은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용사의 말대로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면 되건만, 눈을 똑똑히 뜨고 쳐다보면서 욕을 하는 것은 이상했다. 곧바로 반박이 나오지 않는 건지여자는 잠시 굳어 있다가, 누가 봐도 급히 꺼낸핑계를 들이밀며 합리화를 했다.
"마, 맞아!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너도 날 못 믿어서 눈앞에서, 큿…. 아무튼, 내가 고개를 돌리면 어떻게 될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틀린 말이었다.
터억!
"어어? 어어!?"
"미안한데."
용사가 순식간에 손을 뻗어 여자의 한쪽 팔목을 붙잡았다. 더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상대방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한 여자가 뒤늦게 놀란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뜬다. 그녀는 용사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고, 손목이 붙잡힌 감촉을 느낀 후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달았다.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자 한껏 커진 눈과는 반대로 두 입술이 꾹 다물린다.
"네가 뭘 어찌 하건, 나랑 가까워진 순간부터 끝난 거였어. 궁수랑 칼잡이가 가까이 있으면 뭐, 말할 것도 없지."
"……."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흥. 바보 같긴."
"…뭐?"
여자가 씨익 웃어보인다. 아무리 서로에 대한 살의가 없다고는 해도, 지금 상황에서 생사여탈권은 확실히 남자쪽으로 넘어갔을 텐데. 분명 위험한 쪽에서 보일여유는 아니었다. 아까처럼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용사가 먼저 손을 놓고 거리를 벌렸다.
싸아악!
그리고, 일 초 전만 해도 용사가 있었던 그 위치로 날카로운 바람의 기운이 덮쳐들었다. 사람의 살가죽 따위는 가볍게 찢어버릴 만큼 날카로운 기운이.
"물론 궁수는 화살을 쏘는 사람이지. 하지만…."
옷도 입었고 비장의 수도 꺼내들어서 한껏 자신감이 솟아오른 여자가 용사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화살을 쏜다고 꼭 궁수는 아니거든?"
"…정령술사?"
"눈치는 빨라서 좋네!"
그리고시작된 2차전.
한밤중에 때아닌 결투가 시작됐다.
사악!
테에엥!
사아악!
파바박!
….
….
….
잠시 후.
"궁수나 정령술사나 후방 포지션인건 똑같지. 말했잖아. 칼잡이랑…."
"하아, 하아, 하아… 미친…. 짐승…."
"가까워지면, 뭐다?"
"아악! 시끄러! 너, 짜증나!"
여자가 씩씩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하지만 용사는 숨소리조차 여유로웠고, 아까부터 내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심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은근한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정령술사.
굉장히 보기 드문 존재.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한 엘프가 그나마 정령술을 많이 쓰긴 하지만, 엘프는 역사적으로 인간과 엮이는것을 상당히 꺼려 했다. 그냥 거리만 두는게 아니라 아주 야만적이고 불결한 짐승을 보는 듯이 굴어서 인간도 엘프에게 썩 호의적이진 않았다.
다만 엘프 종족은 여자가 8~9할에 달하는 심각한 여초 사회이며, 엘프 여자는 인간 기준으로 상당한 미인이었기에 노예 사냥꾼들이 불을 키고 달려들었다.그에 따라 엘프들도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공격하게 됐고…. 그렇게 적대 관계가 형성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요즘은 엘프와의 교류가 조금이나마있는 편이었다. 마왕군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멸족시킬 작정으로 침공해왔기에, 아무리 싫은 이웃이어도 살기 위해선 협력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 종족 간의 기나긴 단절로 인해, 신세대인 어린 엘프들은 교육받은 적개심 대신 처음 보는 종족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결과, 역사상 가장 많은 하프엘프가 탄생하여 활동하는 시대가 온것이다.
용사는 정령술을 보자마자 엘프를 떠올렸지만, 풍성한 옆머리를 뚫고나오는 엘프 특유의 뾰족귀가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신기함을 느꼈다. 엘프가 아닌 정령술사는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 아마 어린 하프엘프가 아닐까 용사는 추측했다.
일단 이겨서 여유롭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서 용사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름."
"…뭐?"
"들어놓고 못 들은 척 하지 마."
"칫…. 너 진짜 싫어…."
아까부터 똥 씹은 표정을 하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미라."
"흠. 미라…. 오케이."
"끝?"
미라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묻자 오히려 용사가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내 이름 말해줬잖아. 그럼 니 이름은 뭐냐고?"
"아아…."
용사는 다시금 무덤덤한얼굴로 말했다.
"이름. 이름 말이지…. 뭐, 숨길 것도 없지. 내 이름은 한%#."
"응? 뭐라고? 한…?"
"한%#."
"으, 뭐야. 알아듣질 못하겠네. 어디 출신이길래 이름이 그런…."
미라가 출신을 언급하자 용사가 눈에 띄게 싫은 티를 낸다.
"허. 요것 봐라? 너, 내 이름에 보태준 거 있냐. 내 출신에 보태준 거 있어? 엉?"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
"아… 그, 그…. 야! 이상한 이름인건 맞잖아!"
미라는 이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이라는 특이한 성씨를 자기가 쓸 날이 올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