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6. 미라의 여행 (2)
"으음…."
모처럼 꿈에서 첫만남을 회상한 미라가 몽롱한 얼굴로 현실을 자각했다. 지구, 용사의 집, 용사의 방, 용사의 침대. 꿈 속에선 꽤나 얄미웠던 녀석이 지금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연인이 됐다. 그가 쓰는 물건조차도 사랑스럽다고 느끼는건 분명 중증이겠지. 속옷으로도 흥분할 정도니까 이젠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그가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을 정도이니 중증 맞지.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하는 걸까.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 혐오증에 빠져 평생 혼자 살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한 남자를…. 그렇게나 깊숙히 받아들이다니.
자지 말고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지도 깊게 받아들이긴 한다. 어젯밤도 아주 자궁이 찌부러질 기세로 받아줬지. 아,행복해.
"후후후."
….
미라가 웃는 얼굴로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그의 침대…. 침대에서 솔솔 올라오는 그의 향기가 결코 작지 않은 덩어리진 행복으로 다가온다.
용사의 침대에서 자는 것. 그것은 용사의 옆에서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특권을 의미한다. 매일매일,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하루 종일 같이 자도 질리진 않겠지만, 동침이 특별한 것은 역시 희소성 때문이었다. 항상 다섯 명이서 나누다보니 아무리 참고 이해해도 가끔은 안달이 나고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그만큼 이 순간이 더더욱 특별해진다.
미라 역시 사람인지라 마음 같아선 독점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만난건 나잖아. 가장 먼저 사귄 것도 나고, 가장 먼저 잔 것도 난데.
사람 마음이 그렇듯, 미라도 가끔씩은 억울할 때가 있었다. 처음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 큰맘 먹고 일부다처를 허락해준 것인데, 용사에게 달라붙은 여자가 두세명도 아니고 다섯이나 될 줄은 몰랐다. 미래를 알았다면 과연 허락했을까 생각하다가도, 하필이면 막내가 제일 예쁘고 기특한 레이아여서 사실은 얻은게 더 많은 걸까 싶기도 하고 참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항상 그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가끔은 그에게 미안했다. 그건 모든 여자들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응."
너무나도 사랑해서, 미라는 잠시 용사의품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이미 일어나 있었던 용사가 침대에 누운 채로 미라의 말에 대답했다.
"슬슬 준비해야 돼."
"그래."
"흐응. 자기, 뭐 할 말 없어?"
미라의 새침한 태도에 용사가 피식 웃으며 볼에 뽀뽀해준다.
"잘 갔다 와."
"응. 갔다 올게."
둘은 재회를 기약하며 잠시 간의 이별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짧은 시간이었기에, 둘은 아쉬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
[바람기], [씨받이].
미라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개의 스킬. 마왕의 저주.
미라 본인을 포함해서 다들 모르는 척 하지만, [바람기] 스킬이 미라의 입지를 어느 정도 흔든 것은 사실이었다. 용사도 사람이었기에 말로는 공평하게 대한다고는 하지만, 첫번째 연인이자 첫사랑인 미라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렇게 나름 입지가 생긴 미라를 다른 여자들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린 것이 바로 [바람기] 저주였다.
[바람기]. 정말 악독한 저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 그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와 사귈 때 느끼는 거대한 쾌감. 심지어 [바람기]는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용사와 여자들이 암묵적으로 그어둔 '선'을 넘게 된다.
사례를 하나 들자면,지구 생활 초창기에 사귄 남친과의 100일 기념일이 있었다. 하필 그날은 미라와 용사가 이어진 날과 같았고, 원래는 용사와 미라 둘만의 소소한 기념일이었는데…. 미라가 미안하다면서 남친과의 100일을 즐기러 가버린 것이다.
그때 용사는 진심으로 '감정'을 느꼈고, 미라도 나중에 자기가 미쳤다고 손이 닳도록 사과했다. 그녀는 용사의 화가 풀린 후에 조심스럽게 설명을 했는데, 용사보다 남친을 우선순위로 뒀다기보단 용사가 네토 취향이 생겼으니 나름 맞춰준 것이라고 했다. 좋아해줄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봐도 미친 생각이었다고 말하며 눈물까지 주륵 흘리니 용사도 더 몰아붙일 순 없었다.
변명이 아니라 진짜, 진심이라고 말하는 미라를 보며 용사는 진지하게 생각했고, 결론을 내렸다. 미라는 제법 센 저주를 받았다고. 다른 여자들이라면 몸과 마음의 경계가 뚜렷해서, 고작 네토남 따위로 고민하거나 저울질하지 않는다. 판단력도 흐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미라는 '감정'도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 용사뿐만 아니라 내심 놀랐던 다른 여자들도 모두 이해해주며 미라의 탓이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결국 미라가 갖고 있던 나름의 입지는 없어져버린 셈이 됐다. 여자들 중 유일하게 용사를 분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게 하필이면 용사가 저주 때문에 고생하는 레이아를 편애하는 것과 겹쳐져서…. 결국 미라가 가지고 있던 유리한 입지는 레이아가 가져갔고,미라는 다른 여자들과 같은 위치에 놓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속이 조금, 아니 상당히 쓰렸지만 미라는 납득했다. 레이아는 진짜로 불쌍하니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니…. 너무 끔찍하고 안타까워서 자기 일이 아닌데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미라는 물론 용사가 최고지만, 그 다음으로는 레이아를 좋아했다. 가장 어린 데도 불구하고 말과 행동이 성숙할 뿐더러 마음씨도 이타적이고, 심지어 안타까운 과거까지…. 그래도 부러운게 하나 있다면, 여자들 중 유일하게 연인에게 처음을 바치는 행운을 누렸다는 것?
미라는 레이아를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처럼 생각했지만, 가끔씩은 딸아이 같기도 했고, 또 가끔씩은 너무 어른스러워서 언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튼…. 미라는 레이아에게 자기 자리를 뺏겼다고 해서 딱히 억울함을 느끼진 않았다. 나쁜 건 오직 한 명, 마왕 뿐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에 감정소모를 할만큼 어리석진 않아.
'그리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그녀는 낙담하는 대신 자신만이 갖는 강점을 떠올렸다.
네토라레, 네토라세.
한 글자 차이지만, 실제 뜻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기 사랑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과, 자의로 넘겨주며 관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다.
용사가 자기 여자들이 다른 남자들과 뒹구는걸 보며 느끼는 것은 네토라세의 쾌감이었다. 하지만 미라는 조금 달랐다. 물론 네토라세도 있지만, 유일하게 마음도 주는 [바람기]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용사가 항상 네토라레의 위기감을, 긴장감과 쫄깃함을 느껴야만 했다.
만약 여자들에게 용사가 없는 삶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아마 죽거나 혹은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이어갈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용사도 마찬가지였다. 다섯명에게 사랑을 나눠준다지만 한 사람에게주는 사랑이 5분의 1은 아니었다. 다섯명 중 하나라도 잃으면 용사 역시 죽고 싶을 것이다. 특히나 저주 때문에 고생하는 레이아나, 저주로 인해 마음까지 내어줘야 하는 '첫사랑'인 미라는 좀 더 신경이 쓰이겠지.
아직까진 용사도 연인을 빼앗길 수 있다는 네토라레의 위기감에서 줄타기를 하며 아찔한 쾌감을 즐기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다. 사랑이 여전히 순수한 형태로 활활 타오른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미라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결국 냉정히 보면, 미라가 선사하는 네토라세 플레이의 성적표는 썩 좋지 못했다.
그 점은 미라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여자들이 멀쩡히 주는 네토의 쾌감을 연인에게 온전하게 선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고민되는 점이었다.
그래서 미라는 저주의 강화가 차라리 전화위복으로 느껴졌다.
….
저주가 강화된 이후 시간이 좀 지났고, 여자들은 다들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각각 고유의 저주보단 공통된 저주… 즉 [씨받이] 스킬이 강해진게 훨씬 더 체감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용사 한정 불감증인 [모순] 스킬을 가진 레이아가 용사와의 섹스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됐다. 정말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미라도 최근 그것을 느꼈다. [씨받이] 저주가 자신의 고유 저주, 즉 [바람기]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것을 말이다.
[바람기]는 쉽게 말해서 양다리다. 또다른 불륜 대상과 만나서 사귀고, 감정 교류를 하며 내적으로 친밀감을 쌓는다. 애정을 느낀다. 그렇게 된 이후 그 사람과 섹스하면… 그동안의 귀찮은 밑작업에 걸맞는 최고의 섹스를 경험한다. 거대한 쾌락의 물결을 보상으로 받는다.
하지만 미라 본인이 느끼기엔 단점이 더 컸다. 첫째론 용사가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불안해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저주 때문에 자기 마음이, 진심이 움직이는게 마음에 안 들었고, 셋째론 밑작업이 너무너무 너~무 귀찮았다.
그놈의 밑작업…. 무슨 모태솔로끼리 만난 것도 아니고, 사귄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본격적인 섹스 없이 적당한 스킨십과 감정 교류만을 하고 있노라면 너무 심심해서 허벅지를 비비적거리게 된다. 섹스의 쾌감을 잘 알았기에 오히려 더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씨받이] 스킬이 강해진게 오히려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강해진 [씨받이] 스킬이 선사하는 단순 쾌감은 [바람기] 스킬의 귀찮은 밑작업을 건너뛰어도 될만큼 강렬했다. 최근 지나의 도움을 받아 한 남자와 '실험'을 해본 결과,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쩐지 저주가 강화된 이후로 다른 여자들이 은근히 들뜬 분위기였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섹스가 더 기분 좋아질 뿐더러 저주의 조건이 느슨해졌으니 흥분될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마냥 즐기는게 아니라 그 다음 실험을 할 차례였다.
[씨받이]와 [바람기]의 궁합. 물론 그냥 섹스로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미라는 [바람기] 스킬이 주는 거대한 쾌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걸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남친을 만들고 [씨받이] 스킬을 통해 기분 좋은 섹스를 즐긴다. 그렇게 진도를 빼고 확 친해져서, [바람기] 스킬을 빠르게 발동시키는 방법은 어떨까.
사귀는 사람에게 더 빠져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소위 말하는 '떡정'이 드는 방법도 있다. 떡정 때문에 마음이 떠났음에도 쉽게 못 헤어지는 연인들의 사연을 인터넷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몸을 쉽게 내주는 여자는 매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미라는 자신이 있었다. 자기 몸을 맛보고 질릴 남자는 없다는, 다소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이.
그리고 그녀는 자만해도 될 만큼 잘난 여자였다.
….
….
최근, 지나에게서 흥미가 가는 남자를 소개받았다. 찾을래도 찾기 힘든 특이한성격… 정확히는 특이한 '성벽'을 가진 남자를. 아무리 들어봐도 이번 실험에 딱 어울리는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지나와 진득하게 어울리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다는데, 미라는 바로 이 남자다 싶어서 잠시 집을 떠나 먼 길을 향하는 결심을 하게 됐다.
한지우. 36세. 나름 성공한 젊은 아티스트. 정확히 무슨 직업인지는 모른다. 지나의 말에 의하면 키는 평균보다 쬐금 크고, 체형은 평균에서 살짝 마른 편. 전체적으로 머리나 옷 입는 스타일이 프리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상당히 괴짜 같은 성격.
"흐음."
과연 어떨지.
미라는 은근히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