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6화 〉#6. 미라의 여행 (11) (136/162)



〈 136화 〉#6. 미라의 여행 (11)

목적지 근처의 주차장에 내린 후 미라는 롱패딩을 두고 작은 핸드백만 가지고 내렸다. 야외 촬영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입고 있는 코트도 있으니까. 그렇게 조수석에서 내려서 지우를 따라 앞으로 가자 지우가 천천히 걸으면서 그의  크기만한 캠코더를 만지는게 보였다.


미라가 옆에서 바라보자 지우가 손짓하며 나란히 걸어가자는 제스쳐를 보였다. 그렇게 옆에  미라는 자신을 정면으로 조준하는 캠코더의 렌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자기, 갑자기 왜 찍어요?"

"미라야. 아까 약속이 있다고 했지?"

지우가 말했다. 미라는 그의 말투가 살짝 바뀐 것을 느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편한 말투, 일상의 무심한 톤이었는데 지금은 분명 발음이나 발성을 신경쓴게 느껴졌다.

'촬영…인가?'

…이렇게 엉성하게?

심지어 촬영을 위한 자원도 별 것 없었다. 한지우, 캠코더, 여자. 끝.

개인 후원을 받을 정도로 작품 퀄리티가 좋다면서. 나름 유명한 성인 사이트에서 스카웃하려고 혈안이 됐다면서…?

'하긴, 아직 떡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소개 겸 인터뷰 영상인가?'

생각해보니 그는 영상 퀄리티를 일부러 적당히 하향 조절해서 현장감을 준다고 한다. 화질이나 음질이 너무 좋고 조명이나 마이크도 완벽하면 그건 연출일 수밖에 없고 작위적인 티가 난다면서.


'뭐, 이런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러겠지.'

촬영 분야는 완전 문외한인 미라는 그렇게 납득하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뭐…. 약속이 있다고, 만날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에이, 좀 굳어 있네. 긴장 풀고 편하게 해. 아무튼 그 만날 사람이란게 말이지…."

길거리를 걸으며미라는 별 생각 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 너랑 함께 촬영할 파트너 분이셔."

"…네?"

함께 촬영…. 미라가 찍을 장르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고, 그 장르에서 파트너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딱  가지 의미였다.


"저… 자기?"

미라가 당황한 기색으로 어설픈 억지 웃음을 지으며 지우를 불렀다.


"응?"

"아깐 촬영 없다면서요."

"아, 그거."

지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번 영상의 컨셉이야. 갑자기 불려나와서 따먹히는 컨셉. 마음의 준비도, 실제 준비도 제대로 못 해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찍는거지. 내가 생각해도 좀 짓궂긴 해."

"……."

영상의 컨셉을 설명하는 지우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당황에서 황당함으로 분위기가 넘어간 미라가 짜게 식은 눈으로 지우를 째려봤다.


"어때?"

"윽…."

지우의 반짝이는 눈동자. 그 시선을 받은 미라가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사실은 잔소리와 불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막상 의욕과 흥분으로 신이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자니….

"……시, 싫지는 않아요."

차마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없었다.

갑작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차마 싫은 내색은 못 하겠다는 듯한 미라의 얼굴. 갑작스러운 만남을 앞두고 저도 모르게 머리와 옷을 만지는 여자의 본능적인 행동.

지우의 캠코더는 하나도 빠짐없이 미라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영상은 순조롭게 촬영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도중 뜬금없는 통보와 함께 시작된 촬영. 미라의 당황함, 황당함. 싫냐고 물어보니 막상 대놓고 싫은 티는 못내는 복잡한 표정. 10분 내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다는 말에 자기 차림새가 신경 쓰이는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이리저리 만진다.

미라는  촬영이라 그런지 목적지로 걸어갈 수록 조금씩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엔 은근히 쿨한 척하는데, 알고 보니 긴장을 잘 하는 스타일처럼 보였다. 미라는 싱그럽고 청순한 외모였기에 그런 풋풋하고 귀여운 느낌이 아주 잘 어울렸다. 지우는 생각보다 더 화면발을 잘 받는 미라의 비주얼에, 그리고 의외로 소질 있는 연기력에 만족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미라를 찍었다.

"저기야."

지우가 캠코더 뒤에서 눈앞에 들어온 건물을 가리켰다. 꼭대기 부근에 모텔이라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나 지형지물이 없어서 멀리서도 잘 보였고, 실제로 걸으면 5분 정도 소요될만한 거리였다. 모텔치고는 세련된 고층 건물이었으나, 모텔치고는 너무 개방된 곳에 세운 감도 있었다. 겉보기론 낡은 없이 깨끗해 보였고 시설이 좋을 것 같아서 미라는 괜찮아 보인다는 감상을 내놓았다.


미라와 지우가 대화하며 걸어가던 중, 벤치와 간판만 달랑 놓인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아저씨가 고개를 들어 미라와 지우를 번갈아가며봤다. 이내 카메라에 대고 찡긋 윙크를 해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는 지우 쪽을 보며 걷는 미라가 자기 앞을 스쳐 지나가자 그녀의 뒤에 따라붙어 걷기 시작했다.

"하하, 안녕하세요?"

"아? 아, 네…."

마치 예쁜 여자를 보고 아는 척하며 찝쩍거리는 듯한 아저씨의 행동에 미라가 당황한 기색으로 인사를 받으며 지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이구, 진짜 예쁘시네. 살면서 본 여자들 중에 제일 예쁜  같아."

"저, 저기…."

일어서니 덩치가 꽤  아저씨는 자기 어깨보다 아래에 있는 미라에게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며 어깨나 팔 등을 주물럭거렸다. 거친 행동에 미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캠코더로 녹화도 되고 있겠다, 미라가 경찰만 부르면 현장에서 체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라는 무언가를 짐작한듯 아저씨를 뿌리치는 대신 지우에게 계속해서 확인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지우는 아까부터 가만히 있으면서 미라를 답답하게 하며 짓궂게 굴었다.

결국 지우의 개입 없이 미라가 선수를 쳤다.


"…안녕하세요. 한미라예요."

계속되는 지우의 장난에 반대로 확신을 얻은 미라는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했다. 방금 전처럼 예의상 고개만 까딱하는게 아니라 진지하고 예의를 갖춘 존중의 인사였다. 마치 당신이 누군지 안다고 말하는 듯이.


"하하하, 눈치가 빠르구만."

"저를 막 주무르는데도 저렇게 대놓고 가만히 있으면 알만하죠. 으음, 모텔 쪽에 계실 줄 알았는데."

미라의 예상대로 아저씨의 정체는 오늘 미라의 상대역을 맡은 남배우였다.

그의 키는 미라보다 머리  개 반은 더 컸고 덩치도 좋았는데 뚱뚱하다기보단 건장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외모는 마치 사극 드라마 같은 데에서 한 명쯤은 꼭 등장하는 털보 아재 같았다. 숱이 풍성한 머리는 최근 미용실에 간 건지 깔끔하게 다듬어진 상태였고, 턱선부터 시작해 코와 입과 턱에 수북하게 자라난 수염 역시 과하지 않은 선에서 잘 기른 편이었다. 관심 없이 대충 보면 그냥 털보 아저씨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외모 관리를 잘 하는 깔끔한 스타일이었다. 점퍼에 청바지 차림인 후줄근한옷차림만 좀  댄디하게 입었으면 중년 취향의 여자애들이 좋아할 법한 후덕한 아저씨였다.

미라가 아저씨의 외모를 탐색하는 사이 아저씨 역시 미라를 한층  깊게 위아래로 훑었다. 평범한 여자였다면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노골적이고 음흉한 눈빛이었으나 좀 있으면 더한 것도 당할 예정이기에 미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 보란 듯이 몸 안쪽으로 모았던 팔을 바깥쪽으로 풀며 전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미라의 각오(?)가 엿보이는 태도에 아저씨가 짓궂은 얼굴로 어깨동무하던 손을 뱀처럼 스르르 움직여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저씨가 목덜미쪽으로 손을 넣어 맨어깨를 만지자 미라가 흠칫했다. 맨살에 거친 손길이 닿은 것도 있지만, 겨울 바람에 한껏 차가워진 손이 들어와서 순간적으로 움찔한 것이었다. 뒤이어 굵직한 손가락이 보드라운 피부를 쓰다듬으며 브래지어의 어깨끈을 통통 튕겨댔다. 연인도 귀찮아할 만한 장난이었으나미라는 얌전히 받아들이며 아저씨에게 질문을 했다.

"저, 으음…. 어떻게 불러야 되죠?"

"흐흐, 그냥 아저씨라고 하면 돼."

"네, 아저씨. 저… 좀 무거운데."

미라는 성희롱은 언급조차 없이 불편함만 호소했다. 아저씨의 자세는 미라에게 깊게 어깨동무를 하여 살짝 짓누르는 자세였기 때문에 미라가 부담을 느낄만도 했다. 자기 자세를 자각하지 못했던 건지 아저씨는 다소 과한 동작으로 미라에게서 떨어지며 사과했다.


"어이쿠, 미안해. 허허, 너무 신나서  달라붙어 버렸네."

"괜찮아요."

미라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이번엔 자기가 먼저 아저씨에게 가볍게 팔짱을 꼈다. 팔을 통해 전해져 오는 미라의 옆가슴과 허리 라인의 감촉에 아저씨가 헤벌쭉 웃는다.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던 아저씨는 자기가 생각해도 민망한 건지 화제를 돌리며 미라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네."

"으음…."

아저씨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오물거렸다. 보나마나 너 같은 애가 왜… 등의 말이겠지. 미라는 지우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적당히 대답하려 했으나 아저씨가 먼저 말을 삼키자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팔짱을 더 깊게 끼며 거의 기대는 자세로 아저씨를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저씨이, 초짜니까  부탁드려요~."

"…허허. 이, 이쪽이야말로 잘… 흐허허허…."

몸으로 파고들고 표정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콧소리로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기습 애교.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던 아저씨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다섯 여자를 끼고 살면서 미녀에 익숙할대로 익숙한 용사조차도 미라의 이런 애교에 꼼짝없이 넘어갔다. 그러니 미라 같은 여신을 난생 처음 보는 아저씨는 버틸 수 없는게 당연했다.


미라의 애교가 치명적인 이유는 안 그럴 것 같은데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미라는 평소엔 가벼운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포커페이스처럼 유지한다. 항상 웃는 얼굴이지만 말투나 행동은 도도하게, 비싸 보이게 군다. 그러다가도 지금처럼 갑자기 눈웃음을 짓고 꼬옥 안겨들면… 게임 오버. 그녀의 도도한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눈치 보며 밀당에 집중하던 남자들은 갑자기 확 끌어당기는 미라에게 꼼짝없이 넘어가 황홀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미라가 매력적인 이유는 자존심 같은 것 때문에 밀당을 하는게 아니라, 남자가 가장 무방비하고 잘 당겨질 때를 노려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맨날 밀어낼 것 같은 분위기지만, 막상 그 속을 까보면 끌어당길 생각밖에 없는 귀여운 여자.용사 역시 미라의 이런 점에 빠져들어 이미 한참 전에 그녀와 평생을 기약했던 것이다.


옆에서 캠코더를 들고 촬영하던 지우 역시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고 있었다.


미라의 기습 애교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고,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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