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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화 〉#6. 미라의 여행 (28) (153/162)



〈 153화 〉#6. 미라의 여행 (28)

지우는 이미 미라의 손바닥 안이었다. 네토라세 성벽을 고백한 순간부터 정해진 미래였다. 그 현실이, 지우는너무나도… 황홀했다.

"아, 맞다."

미라가 손뼉을 딱 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무언가를 찾았다. 딱히 숨길만한 곳도 없었기에 순식간에 그것을 찾아낸다. 변기의 물탱크 위에 놓여진, 지우가 사용한 콘돔. 대충 묶여있는 그것을 보란 듯이 집어든 미라가 매듭을 풀며….

주르륵.

미라가 콘돔 속 정액을, 마치 쓰레기처럼 변기에 버렸다. 그녀의 얼굴은 한쪽 입꼬리만 씨익 올린, 흔히 말하는 썩소를 짓고 있었는데, 비웃는 듯한 그 표정은 새롭고 신선하면서도 은근히  어울렸다.


미라에 의해 버려져 변깃물 위에 둥둥 떠다니던 허연 정액은 이내….

쏴아아아, 꼬르르륵.

자비없이 떠내려간다.


"…."

"어때요?"

미라가 물었다. 기분이 좋다는 식의, 네토라세 쪽으로 말할 줄 알았던 지우는 전혀 엉뚱한 얘기를 했다.


"미라야, 방금 그 썩소 다시 해봐."

"…네?"

"빨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미라가 얼떨떨한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씰룩 올렸다. 방금 전보다는 다소 어색하지만 여전히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지우가 순수하게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미안해. 너 그 표정 말이야…. 진짜, 진짜 귀여워. 와, 생각지도 못한 매력인데? 나중에 꼭 사진으로 찍자. 이거 업로드하면 대박일 것 같다, 진짜. 왜 이렇게 귀엽지?"

"…엥."

"큭큭큭. 물론 네 '플레이'도 너무 좋았어. 흐으으, 방금 싸지르지만 않았어도 다시 박아버렸을 텐데. 미라야. 넌 진짜… 정말 최고야."

엇박자로 들어오는 진심 가득한 칭찬.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워진 미라는, 그냥 피식 웃었다.

"좋았다니 다행이네요."

"고마워.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쪽.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는 네토라세.  네토라세의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연인의 순수한 사랑이었다. 둘은 서로가 좋아서, 그리고  네토라세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 서로의 남친 여친으로서 진심으로 사랑을 속삭였다.






[김정우 / NTS]

"흐음, 너무 심플한 정본데요. 딸랑 이것만 갖고 어떡하지…."

"뭐 어때. 나올 거 다 나와 있잖아. 남성복 코너에서 일하나 봐."

"으음?"

"NTS. 원래는 아웃도어 브랜드인데 남성 속옷도  만들어서 은근히 유명해."

"…."

이렇게 옷 대충 입는 한지우도 아는 브랜드라니.

미라는 패션에 별 관심이 없는 지우도 알고 있는 걸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에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남성복 브랜드라서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는게, 용사 입을 옷을 자기 옷 만큼이나 관심 있게 챙겨줬기에 남성복도 나름 잘 알기 때문이다.

"근데, 자기. 직원이면 퇴근할 때까진  움직이잖아요."

"그렇지? 약속이라도 잡거나 해야겠네."

"흐음…."

뭔가를 생각하던 미라가 지우를 보며 말했다.


"자기."

"응?"

"헤."

아까 전에 지우가 마음에 들어했던 썩소. 미라의 귀여운 표정에 지우가 껄껄 웃으며 부드러운 금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플끼리 한 차례 가볍게 꽁냥대고 나서 미라가 말을 꺼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우 이 녀석 너무 성의 없었어. 사원증이나 툭 던지고 가다니. 자기, 우리도 똑같이 돌려주죠?"

"음? 똑같이 돌려줘? 어떻게?"

"이쪽도 쿨하게 갈 거야. 제가 보여줄게요."

남성복 매장의 NTS 브랜드 코너. 지우의 안내를 받고 가자 미라의 눈에 아까 진득하게 마주봤던 김정우가 일하고 있는게보였다. 어려 보이는 주제에 하는 일을 보니 알바나 완전 수습 직원은 아니고 나름 정직원인 것 같았다. 미라가 녀석의 사원증을 들고 또각또각 굽소리를 내며 도도하게 다가갔다.


"저기?"

"아, 네…에엑!"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우가 단번에 미라를 알아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렇게 곧바로 만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미라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평소처럼 쿨하고 도도하고 여유로운 태도였다. 지퍼를 끝까지 올려 입은 롱패딩 안에 그 어떤 옷도 없다는걸 알면 정우의 태도도 좀 바뀌었겠으나, 녀석은 그녀가 은밀한 노출을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 그래서 아까와는 달리 딱딱한 태도를 보이자 긴장하는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둘은 암묵적으로 눈치만 주고받았지 그 어떤 실질적 합의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마냥 믿을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뭐죠, 그 이상한 소리는."

"아, 아… 죄, 죄송합니다."

일단 미라는 고객으로 찾아온 데다가 보는 눈도 많았기에 정우는 그녀를 고객으로서 깍듯이 대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그 음란한 모습과 입맛을 다시던 꼴리는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녀석의 눈앞엔 상대하기 어려운 쿨한 여신이 서있었다.

"이거 주웠는데, 그쪽 거 맞죠?"

"아,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사람을 착각했나 싶었던 정우는 자기가 일부러 남겨놓은 흔적인 사원증 목걸이를 돌려받자 얼떨떨한 얼굴로 미라를 쳐다봤다. 그녀가 뭘 원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워 하는 얼굴이다. 미라는 여전히 철벽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됐어요. 아, 저기요."

"네…?"

"여긴 보통몇 시까지 영업하죠?"

뜬금없는 미라의 질문. 속뜻이라도 있나 싶었으나 짐작도  가서 정우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오후 일곱  반까지 영업합니다."

"그럼 직원들은 늦어도 여덟 시면 퇴근하겠네요?"

"보통 그렇죠."

"흠."

미라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며 그의 눈앞에서 핸드폰을 꺼내보였다. 자기랑 얘기하다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는 행동에 정우가 뭔가 싶어 멀뚱히 서있었다. 문자라도 하는 건지 화면을  엄지로 빠르게 터치한다.

그냥 만나자마자 바로 대줄 것만 같았던 그 색녀는 어디로 가고, 갑자기 이런 철벽녀가…. 하지만 혹시 모르지. 보는 눈 있는 곳에선 이렇게 허세 부리다가, 막상 따로 만나면 쉽게 대줄 지도…? 근데 그러려면 최소한 번호 교환이라도 해야 하는거 아니냐? 사람 헷갈리네 만드네. 이게 청신호야, 적신호야?

정우는 온갖 생각을 하며 미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멍 때리는 그의 눈에 미라의 핸드폰이 들어왔다. 나도 같이 핸드폰이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멍하니 미라의 핸드폰을 보았다.


30초  지나자 미라가 핸드폰을 집어넣고 정우를 보며 말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수고해요."

딱딱하고 형식적인 세 마디.  말을 끝으로 미라는 홱 돌아서서  갈 길을 갔다.

'뭐야. 이게 끝?'

허무한 이별에 넋이 나간 정우는 망부석처럼 그저 뒷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

"야, 김정우."

"…아, 네. 매니저님?"

하지만 진짜 망부석처럼 영원히 굳어있을 순 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어느새 다가온 매니저가 정우를 부르자 그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정신 차리고 다녀 짜식아. 사원증을 떨어트리다니. 잃어버리지 말라고 목걸이로 만들어줬는데도 잃어버리고, 그걸 또 고객이 찾아주게 만들고 앉았냐."

"으,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건 없고… 근데, 바닥에 그거 뭐야?"

매니저가 바닥을 가리키자 정우도 그곳을 봤다. 마치 아까 화장실에서 사원증을 놓고 왔던 것처럼, 바닥에는 하얀색 직사각형 모양의 명함이 떨어져 있었다.

"명함…인데요?"

주워서 보니 한지우라는 남자의 명함이었다. 대충 보니 무슨 촬영 스튜디오 사장인 듯했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금발의 여신이 있었는데, 바닥에 뜬금없이 남자 명함이 떨어져 있는게  희한한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우가 명함을 스윽 훑어보다 뒤집어서 뒷면을 보았고, 그곳에는….


[XX공원 - 9PM]

연분홍색으로 쓰여진 큼지막한 글자가 있었다. 묘하게 향기 같은게 나는 것이, 마치 립스틱으로 쓴 것 같은….

"어?"

어쩌면 망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낱 망상으로 치부하기엔 은근히 개연성이 있었다. 그는 단서를 이어붙여 추측을 해나갔다.


일단  연분홍색은 아까 그 금발 여신의 입술 색이랑 정확히 일치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하도 예뻐서 얼굴을 열심히 감상했기 때문에 기억이 선명했다. 만약 이게 립스틱으로 쓴 글자라면… 아마 그 금발 여신이 쓴 거겠지.


킁킁.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니 립스틱 냄새 같기는 한데… 아무튼 특이한 향기가 나는게, 적어도 사인펜 같은 필기구의 냄새는 아니었다.

"…뭐 하냐?"

"네? 아, 아뇨."

"이상하네. 뭐야, 그거."

"그, 그냥 명함인 것 같아요. 버려도 상관 없죠? 그냥 명함이니까."

매니저가 수상하다는 듯 쉽게 납득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정우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뭐, 명함은 귀중품보단 쓰레기에 가까우니까. 찾으러 올 일도 없겠지. 버려."

"네."

"그리고 카운터 좀 보고 있어라.  화장실 좀 갔다 오게."

"알겠습니다."

의심은 받았지만 별일 없이 넘어가자 정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포스기가 있었고 그 옆에는 CCTV 모니터가 있었다.

"아."

정우가 허무한 깨달음에 낮게 탄식한다. 단서고 나발이고 그냥 CCTV 돌려보면 되잖아. 품질도 좋아서 명함 같은 작은 물건도 충분히  보일 것이다. 정우는 CCTV 프로그램 조작법을 공식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단순히 돌려보는건 어렵지 않아서 진작에 어깨 너머로 깨우친 상태였다.

딸깍, 딸깍.


마우스를 움직여 몇 분 전으로 CCTV를 돌리자 금발 여신과 자신이 얘기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재생된다.

 마디 나누고, 미라가 뜬금없이 핸드폰을 만지고….


"역시."

정우가 생각했던 대로, 명함은 미라가 떨어트린 것이었다. 정우에게서  돌아서는 순간, 그녀가 일부러 바닥에 명함을 떨어트리는 모습이 아주 깔끔하게 포착됐다. 그가 다시금 주머니 속 명함을 꺼내본다.


[XX공원 - 9PM]

잠잠하던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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