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6. 미라의 여행 (29)
주홍빛 노을이 아름답게 번진다. 한겨울이라 다섯 시만 넘어가도 하늘이 어둑어둑한데 이제 겨우 노을이 진다는 것은 약속 시간인 오후 아홉 시까지 아직 한참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둘은 일하는 정우를 뒤로 하고 백화점을 나와 사이 좋게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진짜 안 추워?"
"네. 말했잖아요. 저번엔 이것조차 안 입고 발가벗고 놀았다고."
미라가 롱패딩을 팡팡 두들기며 말하자 지우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으음, 그리고…."
"그리고?"
"자꾸 자기가 열 받게 만들잖아요."
"열 받어? 어감이 좀 그런데."
지우가 또다시 능글맞게 말하며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터치했다. 곧바로 미라가 움찔거렸다.
"아! 자기, 진짜아…."
"괜찮지?"
그녀는 멀쩡히 걷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까 뽑았던 진동 에그를 다시 뱃속에 넣어놓은 상태였다. 이번엔 다른쪽 구멍에 넣었는데, 거기도 뱃속인건 마찬가지니까.
"아뇨. 안 괜찮아요. 기분 진짜 이상해…."
"그런 것치곤 싫어하지 않는 얼굴인데."
"…여자는 그런 말 싫어하니까 알아두세요. 흐읏!"
지우의 능글맞은 태도에 미라가 약이 오른 표정을 지었으나, 뱃속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에그 때문에 표정이 점점 무너져갔다. 말을 할 때마다, 특히 미라가 불만을 토할 때마다 지우가 스위치를 눌러괴롭혔기 때문에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라는 결국 '여자'라는 마법의 단어를 꺼내면서 한 수 접고 물러났다.
위이잉….
그녀의 애널 안에 박혀 장벽을 자극하는 에그의 진동은 얇은 벽 뒤에 있는 그녀의 자궁까지 자극했다. 미라는 자궁이 부르르 떨리는게 무슨 느낌인지 실감하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쾌감은 익숙한 감각이기라도 하지, 애널의 진동은 생소한 감각이어서 미라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으으…."
정말 이상한 기분. 처음 겪는 애널 진동은 미라에게 알 수 없는 감각을 계속해서 전달했다.
주르륵.
그녀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애액 한 줄기가, 그녀가 느끼고 있는 이상한 감각의 정체를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
….
….
….
그렇게 둘은 30분 정도 가볍게 롱패딩 야외노출을 했다. 지우가 말하길 백화점 노출은 실내노출이라 살짝 아쉽다고…. 미라는 그래놓고 나한테 춥지 않냐고 걱정하는게 어이가 없다면서 귀엽게 눈을 흘겼다.
당연히 걸어다니기만 하지는 않았다. 둘 다 백화점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산책하다가 전봇대 뒤로 가서 지우가 손가락으로 보지를 쑤셔주기도 하고, 길을 걷다가 빠르게 움직이는 차를 향해 바바리맨마냥 외투를 활짝 벌려 알몸을 보여주기도 했다. 롱패딩 지퍼를 다 풀어서 진짜 바바리맨처럼 벌어진 패딩을 손으로만 붙잡고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지우가 악동 같은 얼굴로 행인이 지나갈 때 미라의 손을 잡아끌어서 잠깐 동안 안쪽의 알몸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행인의 얼굴을 보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게 오늘의 최대 위기였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미라가 잠깐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둘 다 밖에서 오랜 시간 돌아다녔고 땀도 좀 빼서 몸이 찝찝했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지우가 곧바로 수락했다.
그러나 막상 문앞에 도착하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쉬고 싶어하던 둘은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단거리 달리기라도 준비하는 것처럼 몸을 낮춘다.
띠리릭.
도어락을 열자마자 지우와 미라가 우당탕탕 경쟁하면서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이 악물고 진지하게 했으면 마나 유저인 미라의 손쉬운 완승이었겠지만, 지금 미라는 평범한 여자의 신체 능력만을 쓰고 있었기에 지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철컥.
"아! 아아아!"
지우가 방 구석에 있던 미라의 캐리어를 베란다로 내던지듯 옮겨놓은 다음 창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창문 앞을 몸으로 막는다. 몸싸움으론 답이 없자 미라가 애교와 앙탈로 어떻게든 해보려 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딜 감히. 벌칙으로 벗었으면 적어도 오늘은 뭐 입으면 안 되지."
"아, 진짜아~. 너무해요."
편법을 허용하지 않는 지우. 결국 옷을 입을 마지막 기회를 놓친 미라가 입술을 뚝 내밀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이거다 싶은 지우가 그 허탈해 보이는 모습을 찰칵 찍고 나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씻자."
"흥."
미라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래도 혼자 씻으라는 말은 않고 순순히 같이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한동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샤워하고 간식도 적당히 까먹으며 쉬는 시간이 이어졌다. 지우는 그닥 군것질을 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미라가 늦은 저녁을 먹을 거라며 권유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먹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후 9시 전후로만나기로 했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으니 식사가 더 늦어질 것 같다고.
옷을 입지 못해서 맨몸으로 이불만 뒤집어쓴 미라는 아예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서 핸드폰을 했고, 지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오늘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체크하며 헤라넷에 업로드를 했다. 그는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SNS 중독자마냥 하루 종일 헤라넷을 들락거리며 업로드를 하고 반응을 체크했다. 본인 입장에선 그게 좋아하는 취미이자 본업이기도 하니까 중독자처럼 열심히 하는게 당연했다.
한동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미라의 작품을 편집하던 그가 화면 속 미라를 보고 꼴렸는지 현실의 미라에게 이리 오라고 했지만 미라는 새침하게 거절했다.
"흥. 아직 때가 아니거든요, 시정마 아저씨."
"윽, 뭐야. 아직도 그 컨셉인 거야?"
"싫어요? 아깐 콧김까지 뿜으며 흥분하더니."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누가 콧김을 뿜었다고 그래."
미라의 완곡한 거절. 그녀는 지우와 가볍게 투닥거리다가 번데기처럼 몸을 돌돌 말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났다.
"슬슬 갈 시간이에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시계를 보니 김정우가 퇴근하는 8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물끄러미 지우를 보던 미라가 손을 뻗어 손바닥을 지우의 왼쪽 가슴에 댔다.
두근두근두근….
빠른 템포로 박동하는 그의 심장.
"헷."
미라가 비웃듯이 다시금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지우가 진지하게 귀엽다고 한 이후로 서비스 해주는 것처럼 종종 이런 표정을 짓는다.
둘 사이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진 상황. 지우는 그저 껄껄 웃으며 미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와 다정하게 걸어나갔다.
…
약속 시간은 오후 9시.
약속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각기 다르다. 시간에 딱 맞게 오는 사람도, 조금 일찍 혹은 조금 늦게 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하고 간절한 약속이라면 누구든 한참 일찍 도착해 있을 것이다.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퇴근하자마자 최대한 빨리 공원으로 향했고, 그 결과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약속 시간까진 거의 30분 가까이 남아있었다.
두근두근두근….
녀석의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이제까지 사귀어본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살면서 본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예쁘게 생긴 여신님이랑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 씨. 왜 이렇게 두근거리냐….'
남자 화장실에서 알몸으로 떡치던 그 음탕한 모습…. 솔직히 외모를 제외하고 행동자체만 생각해보면 좀 그렇긴 했다. 사람이 적당히 변태적이어야지. 그렇게 미친 듯이 예쁘지만 않았다면 매력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마 진짜로 여기서 떡을 치나 신기하고 궁금한 마음에 변기를 딛고 올라가본 건데, 눈을 마주친 순간 과장 하나도 없이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다른 놈이랑 떡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몸이 멈춰버렸다. 좀 적당히 예뻐야 정신을 차리든 말든 하지, 그렇게 예쁘면서도 야하기까지 하다니….
무엇보다도 눈을 피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이쪽을 똑바로 보면서 생긋 웃는 그 모습이….
생각만 해도 발기가 되는 엄청난 자태였다.
"그나저나…."
XX공원. 백화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빠른 속도로 걸으면 성인 남자 걸음으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이니 차 타고 오면 5분이면 된다. 즉 번화가의 테두리 안에 있는 곳이었다.
근데 번화가 일대 치고는 꽤나 한적한 곳이었다. 공원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별로 크지도 않아서 학교 축구장 서너개 합친 정도의 면적이 전부인, 사실상 산책로 수준이었다. 나무는 꽤 빽빽하게 심어져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으슥한 구역이 굉장히 많기도 했다.
'뭐 이런 데가 다있냐.'
이쪽에 올 일이 없던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면 중고딩들 담배 피우라고 만들어 놓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으슥하고 사각지대가 많았다.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미라의 미색에 홀려 있었던 정우가 싸늘한 느낌에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해보니 좀 싸하다. 그렇게 예쁜 사람이 왜….
'서, 설마 다른 목적이….'
비교적 귀여운 삥뜯기부터 시작해서 인신매매나 장기매매 같은 도시괴담까지 떠올린 정우가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너무 오버하는거 아니냐, 망상이 심한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예쁜 여자가 선뜻 만나자고 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이 공원이 너무 어둡고 음습했다. 몰래 나쁜 짓이나 이상한 짓을 해도 절대 모를 것 같은…. 가로등 불빛조차도 별로 들지 않는 암흑 지대.
그 여신님 말고, 무서운 떡대 형님들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 내가 실수를 한 건가.'
턱.
"흐아악!"
갑자기 어깨에 무언가 얹어지자 정우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뭐 하니?"
어이가 없는지 표정조차 없는 미라가 서있었다.
"어! 아, 아…. 아무 것도 아녜요."
저 너머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을 머금었음에도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미라의 금발. 마침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고 구름도 없어서 달빛만으로도 서로의 얼굴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불안감과 긴장감에 휩싸였던 정우가 미라의 얼굴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세 번째 만났으며, 얘기하는 것은 두 번째에 불과했음에도 마치 오랜만에 연인을 만난 것처럼 녀석의 표정이 반가움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함으로 가득찼던 그의 안색은 어느새 완전히 밝아져서 그늘진 곳 하나 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재밌는 녀석의 표정 변화에 미라가 피식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
"안녕하세요."
"음, 저기. 내가 괜한 내숭이나 가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냥 편하게 대해도 되겠지?"
"네? 아, 그러세요. 저야 좋죠."
정우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선뜻 수락했다. 그러자 미라가 손을 뻗어 정우와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히면서 둘의 몸이 한 쌍의 연인처럼 굳게 결속된다. 만나자마자 뭔가 많은게 스킵되고 진도가 확확 빠지자 정우가 얼떨떨해 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게 겉으로 티가 났다.
"좀 걸으면서 얘기할까?"
"그래요."
천천히 공원을 걷는 둘의 뒷모습은 마치 한창 좋을 때인어린 커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