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8화
‘그래도 세린만 믿고 있을 수는 없지.’
카드 설명만 보면 그녀는 ‘검기’를 다룰 줄 아는 2성급의 검사였지만, 나는 그녀의 실력을 눈으로 보았다.
웨어울프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지던 모습.
그녀가 작정하고 날린 스킬에 웨어울프는 큰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넣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내게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사실 세린을 불러내지 않고도 내게는 방어수단이 있었던 것이다.
“당신 누구야? 어디서 왔어?”
김선아는 가면을 쓴 채로 소리쳤다.
나를 상대로 역할극을 할 때는 좋았겠지만, 이렇게 제3자가 등장한 시점에서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꼴이 우스웠다.
“내 이름은 세린이다.”
“세린?”
이제야 김선아가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왜냐면 세린이 등장하기 전에 내가외친 것도 같은 이름이었으니까.
“범일이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나 때문에 세린이 등장했다는 것은 안 듯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나는 소환술을 쓸 수 없는 F급 헌터이고, 그걸 떠나서도 어떻게 소환술로 인간 헌터를 불러낼 수 있는지는 미지수니까.
김선아는 살기등등한 세린에게 겁을 먹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언니, 설마 저놈이랑 같은 편이야? 저 병신 같은 놈 때문에 나한테 그 검을 들이대고 있는 거고?”
“용사님은 병신이 아니다!!”
세린의 목소리가 쩌렁, 던전을 울렸다.
그녀의 멘트는 무척 기분 좋은 것이었지만, 이왕이면 그 말에서 ‘병신’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사님? 용사니이임?”
김선아의 말투가 빈정대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기야 ‘용사’라는 표현이 좀 부끄럽기는 하지.
하지만 너만큼은 아니란 말이다!
“시끄러, 이 데빌 레이디야!”
흠칫,
자기도 양심이 있는지 김선아가 흠칫거렸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거칠게 벗어버렸다.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지?”
“그딴 소리 지껄일 거면 세린부터 이기고 와라.”
여전히 세린을 김선아와 싸우게 한다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본체가 아닌 복제된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가 필요 이상으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이런 감각은 당연히 세라를 여러 번 불러내는 동안에 몸에 밴 것이다.
“이잇!”
가면을 벗은 김선아의 표정은 늘 그렇듯 악귀와도 같았다.
“언니. 잘 생각해. 남자 편드는 여자는 좆 같은 년인 거 몰라? 오늘은 내가 모르는 척할 테니까. 그냥 가. 응?”
남자 편을 들면 좆 같은 년이라니, 씨발년이 말하는 꼬라지가 진짜.
자기 아파트에 밀실을 만들어두고 고문 동영상이나 찍고 있으니 사고방식이 그딴 식일 수밖에.
물론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이런 식의 인식이 사회에 만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에 하나, 아니, 억에 한 명이라도 남자를 편들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해도 같은 여자들의 눈치가 보여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자꾸 용사님을 욕보이면 가만있지 않겠다! 어서 덤벼라, 이 망할 년!”
“마, 망할 녀언?”
오케이, 불붙었다.
비록 김선아가 다른 여자 헌터를 뒤를 빨아주는 데 특화되어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격이 더러운 년이다.
이쯤 되면 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예상대로,
김선아는 꼬챙이라고 해야 할지 창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무기를 들고 세린에게 달려들었다.
“이 남자 똥구멍이나 빠는 개 같은 년이!”
챙!
불꽃이 튀자마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왜냐면 세린이 김선아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내 앞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이 놓여 있었다.
세린이 아주 쉽게 김선아가 내민 창을 막아낸 것.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선자세에서 김선아의 공격을 저지했다.
“그 실력으로 용사님을 욕보이다니 기도 안 차는군.”
“어?”
김선아는 창을 든 채로 춤을 추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뭐 하는 건가 싶었는데, 마치 자석에 붙은 것처럼 그녀의 창이 세린의 검에 엉겨 붙어 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세린의 검 전체가 번뜩번뜩 빛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검기!’
세린이 검기를 다루는 능력은 발군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김선아가 E급 초보 헌터라는 점도 감안을 해야겠지만, 세린이 보이는 실력은 이세계에서 보았던 것과 확연하게 달랐다.
‘혹시......’
한 가지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사는 세상은 여자들에게 특화된 곳이다.
설마 다른 여자 헌터들이 그런 것처럼 세린도 이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곳에서보다 이세계에서 훨씬 강한 것처럼.
세린이 검을 옆으로 떨쳤다.
그러자 거기 붙어 있던 김선아의 창도 바닥에 떨어졌다.
챙그랑!
빈손이 된 김선아가 당황해했다.
“자, 잠깐만! 설마 언니, 나를 죽이려는 거야? 진짜로 남자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가치관의 혼란.
내가 이세계에 가서 느꼈던 그것을 지금 김선아가 느끼고 있었다.
“내가 왜 너를 살려두어야 하지?”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운 것이었다.
“잠깐! 혹시 언니 돈 필요해? 나 돈 많거든! 지금 지갑에 현금 백만 원 정도 있고, 카드도 다섯 장이야. 원하면 인출기에서 달라는 대로 찾아줄게!”
“더 이상 나를 모욕하지 마라.”
세린이 김선아를 향해 짓쳐 들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 보였던 것은 한 줄기 섬광이었다.
‘베기’.
그 단순한 스킬이 현실에서 구현되자 상상 이상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꺄아악!”
김선아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긴 상흔이 그어졌다.
헌터 장비를 단번에 찢어버리고, 깊은 상처를 새길 만큼 세린의 베기는 대단했다.
“용사님을 모욕한 시점부터 네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세린은 저벅저벅 김선아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손에서 어떤 반응이 왔다.
정확히 말하면 드래곤 슬레이어로부터.
내려다보니 구슬이 있는 부위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이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녀석이 내게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다.
‘......네가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린, 잠깐!”
나는 일단 세린을 멈춰 세웠다.
‘마무리라면 죽이겠다는 뜻이지?’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생각을 드래곤 슬레이어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대답이 왔다.
죽이는 게 아니면 뭐겠냐고.
‘안 돼.’
나는 생각했다.
당연히 김선아는 죽여도 싼 년이다.
평소 당해왔던 것뿐 아니라 저년이 자기 집에서내게하려고 했던 일, 그리고 오늘 나를 죽이려고 한 것까지 생각하면 몇 번이고 죽이는 게 맞았다.
‘......그래도 오늘은 아니지.’
이곳에 김선아와 나만 남아있다는 것을 최연화와이소라가 알고 있었다.
만약 김선아가 이곳에서 죽어버리면 그 의혹이 내게 올 것이 분명하다.
남자 헌터가 여자 헌터를 죽일 능력이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 여자들은 이 세상에서 남자 헌터가 한 명 사라진다는 것을 더 기뻐할 테니까.
- 알았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 죽이는 것보다 못한 상태로 만들어버리면 되지?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렇다고 하니 나는 검을 들고 김선아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마치 내가 자기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닥을 기며 애원했다.
“범일아 미안해!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너 죽인다는 거 농담이었어~ 너 돈 필요하지 않아? 나 돈 많아! 집에는 더 있어!”
돈, 돈 입에 붙어서 난리도 아니네.
내가 이 상황에 니 돈이나 받아먹게 생겼냐?
그동안의 억눌렸던 분노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일 초라도 빨리 김선아의 몸뚱이에 박히고 싶어서 웅웅대는 드래곤 슬레이어를내리꽂았다.
“꺄아아아아악!!!”
김선아의 앙칼진 비명이 던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검을 꽂은 지 오래지 않아 나는 알 수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말한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 무엇 뜻인지.
꽂힌 검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들었다.
같은 현상을 이세계에서도 본 적이 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포식.
웨어울프를 죽였을 때는 마치 피를 마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웨어울프가 가진 마기, 즉 정수를 뽑아서 흡수했다.
그리고 지금 드래곤 슬레이어는 김선아의 정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녀 얼굴이 빠르게 말라가는 것이 보인다.
헌터가 가진 특유의 기운도 사라져갔다.
그동안 드래곤 슬레이어는 기분 좋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검신에 혈맥 같은 잔상이 내비치고, 구슬이 번뜩번뜩 빛났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와 이어져 있기 때문인지 나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몸 안으로 흘러드는 정수!
뿌듯하게 차오르는 기분!
“으으......”
정수가 빨리는 동안 김선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꺼져가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퍼뜩 정신이 났다.
‘죽이면 안 되지!’
나는 서둘러 검을 잡아당겼다.
드래곤 슬레이어로부터 저항이 느껴졌다.
- 조금, 조금만 더......
마치 이성을 가진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것을 놓고 취해버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