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009)

어릴 적부터 내 꿈은 수의사였다.

집채만한 젖소 뷰지에 콘돔 낀 팔을 쑤셔박거나 새끼 소의 탯줄을 정육가위로 자르는 직업 말고, 동네 동물병원에서 개나 고양이들을 치료하는 수의사 말이다.

그랬기에 나는 고등학생이 됐을 쯤에는 이미 대학원생이 될 각오를 마쳤었다.

동물병원 대학원생으로서 열정페이를 강제당할 미래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좋다. 2013년의 나는 남들이 다 피하는 대학원에 스스로 발을 들여 교수의 노예이자 랩실의 도비(Dobby)가 될 각오를 한 19살 고삐리였다.

그렇게 난 그럭저럭 좋은 대학에 붙었고, 2년 정도 대학 수업을 수료하다 휴학하고 군대도 다녀왔다.

이제 몇 년 더 있다가 졸업만 하면 죽음을 수용하는 자세로 ‘Re: 대학원 생활로부터 시작하는 석박사 생활’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머임?”

전역날에 술쳐먹다 웬 이세계로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내 이세계 생활 첫날.

넓직한 초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만 해도,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악몽인 줄로만 알았다.

지리멸렬한 꿈이지만 지금의 나라면 이딴 꿈을 꿔도 이상할 게 없었다고 생각했다. 기껏 군대라는 이세계에서 귀환했는데 또다시 대학원이라는 이세계에 끌려가게 생겼으니까.

문제를 본격적으로 실감한 것은 반나절 쯤 지나서 밤이 된 이후였다.

배는 계속 고파 오고, 날도 추워지는데 꿈에서는 깰 기미가 안 보이는 끔찍한 현실이 나를 덮쳐왔던 것이다.

“애미. 꿈이고 좆이고 아니었네.”

어둠 속에서 하룻밤을 지샌 끝에 나는 현실부정을 관뒀다.

그 이후로는 초원을 이리저리 헤매는 여정이었다. 며칠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나는 간신히 어느 도시에 도착했고, 내 이세계 생존기의 진정한 난관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흠. 여행객이라. 알겠소.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신분증요?”

“그렇소. 정식입국절차를 거쳤다면 받았을 텐데?”

그냥 이름만 슥슥 적고 통과, 같은 편의주의는 없더라.

경비병한테 신분증을 요구받은 나는 스스로가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음을 직감했다. 내가 일이 커지기 전에 도주하려고 든 것도 자명한 이치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하고 신분증을 집에 두고 왔네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체포해.”

“예.”

“아니 시발, 악! 잠깐만요! 아악!! 왜 때려요!!”

그리고 내가 존나 10분도 안 걸려서 깜방에 쳐박힌 것도 자명한 이치였고 말이다.

“피고 23명을 불법이민죄로서 노예 3년형에 처한다.”

체포된지 며칠 만에 백인 재판관은 나랑 같은 처지의 꾀죄죄한 불법입국자들을 모아 우리를 노예로 전락시켰다. 시발 이거 인종차별 아니냐?

그렇게 9만 8천원짜리 새삥 팬티까지 싹 다 빼앗긴 나는 거적데기 하나 걸친 꼴로 노예시장에 내몰렸다.

“상인 아저씨, 나 추워요.”

“나도.”

이 시발아 공감하지 말고 옷을 달라고.

좆 같은 대머리 노예상인 새끼 같으니. 그나마 최소한의 인권은 있는지 알몸은 아니었지만, 도로 길목 옆에 반쯤 알몸으로 방치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체험이 아니었다.

심지어 지나가던 젊은 귀부인이 나를 힐끗 바라보고 피식 웃었을 때는, 맞후임이 핸드폰을 들고 경계근무에 나왔을 때에도 못 느꼈던 자살충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 시간이 1달 가까이 이어졌다. 국가 주최 노예시장은 한 달에 걸쳐 열리기 때문이었다.

내가 주인을 구하지 못하고 악성재고 분류를 당하는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지만.

“흠…. 별로 튼튼해 보이는 노예는 아니군요.”

“예! 하지만 일을 시키면 소처럼 열심히 일할 겁니다!”

“소처럼? 허, 손에 굳은살 하나 없는 놈이 무슨.”

군대를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태생부터가 몸이 깡마른 체질이었다. 아마 그 탓에 이세계 기준으로 노예로서 쓰기에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을 거다.

결과적으로 나는 시장이 끝나기 이틀 전까지도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광산노예나 전쟁터 화살받이로 쓰이는 게 아닐까 싶어 눈앞이 아찔해질 무렵이었다.

어느 학자 무리가 내가 있는 가게에 나타난 것은.

“심부름꾼으로 쓸 노예를 찾고 있는데, 괜찮은 애 있어?”

남색의 짧은 단발을 가진, 귀가 엘프처럼 긴 여성이었다.

아니, 엘프처럼이 아니라 그냥 엘프가 맞았다. 이곳이 리얼 씹트루빠따로 판타지인 이세계라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엘프녀를 위시로 한 남녀 혼성의 4인 일행은 헐레벌떡 뛰쳐나간 노예상인과 한참을 떠든 끝에 내가 갇힌 철장 앞까지 걸어왔다.

“싸네. 2실버라니, 하자가 있는 노예는 아니겠지?”

“결단코 아닙니다! 저 놈이 저렇게 생겨 먹었어도 말도 잘 알아듣고, 잔병 하나 없습니다!”

저렇게 생겨먹었다는 게 뭔 소리인지 따지고 싶었으나 나는 아무 말 않았다. 이번에도 주인을 못 구했다가는 진짜로 인생이 조져지는 수가 있었으니까.

“흐음. 말을 알아들으면 잔심부름은 할 수 있겠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마른 것이 밥은 덜 먹겠군요. 거친 일에 쓸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겠습니까?”

“전 반대입니다. 말라도 너무 말랐습니다. 짐도 제대로 못 들 것 같이 생겼으니 원.”

“키가 크니 밥을 잘 먹이면 나아지지 않겠어요? 먼 동방의 수렵민족들은 근골이 장대하다고들 하던데.”

한참을 쑥덕대던 그들은 싯가 2실버, 즉 대충 내 감각으로 200만원 상당의 저렴한 가격에 나를 구매해갔다.

“나는 고고학자인 예르나란다. 너는?”

“신대륙에서 온 강북호입니다.”

나 같은 노란 피부 사람들이 ‘키타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바글거리는 곳이 신대륙이랜다. 그러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거기서 온 불법체류자 취급이 되었다.

“후후. 이름이 ‘강 부코’야? 이상한 이름이네.”

내 이름을 들은 엘프 예리나는 꺄르륵 거리며 즐거운 얼굴로 웃어댔다.

정확하게는 ‘강북호(姜北互)’지만, 말해 봤자 쓸모 없으리란 사실은 지난 1달 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름이야 뭐 편하신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발음하기도 힘드실 테니까요.“

“그래? 그럼 새로 지어줄게. 네 이름은 무슨 뜻이니?”

“성은 굳세다는 뜻이고, 이름은 대충 북쪽이란 뜻입니다.”

내 이름인 북호(北互)는 북쪽과 잘 지내라는 뜻이다.

그 북쪽 맞다. 고도비만 미사일 돼지가 박수치며 굽어보는 공산주의 독재국가 얘기다.

친할아버지가 남북 분단으로 이산가족이셨기에 내 대에라도 통일이 되길 바라면서 지은 이름이라는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북쪽이라는 뜻만 전했다.

“알겠어. 어차피 노예일 동안 쓸 이름이니 성까지는 필요 없겠고… 좋아.”

남색 머리의 엘프는 내 목에 목줄을 채우며 싱긋 웃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노르드’야.”

그게 내 3년간의 노예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허드렛일 노예로서 최저가에 팔려나간 나였지만, 운 좋게도 막일을 하며 몸을 축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세계물에서 주인공한테 적당히 언어 번역능력을 하나씩 달아주기 마련이듯이, 나 역시 처음부터 이 세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자동번역능력이 존나 씹사기 OP 스킬이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 이세계에서도 언어의 통일은 불가능했다. 여기서도 나라와 인종마다 다 쓰는 언어가 달랐고, 그러한 실태는 노예였던 내게는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지구에서만 해도 언어의 종류가 대체 몇 개 있던가. 이세계에서도 언어의 장벽은 오질라게 높았다.

하지만 내 대갈통 속의 파파고 번역기는 그 언어의 장벽을 애새끼들이 놀이터에 만든 모래성을 부수듯이 존나 쉽게 깨부수는 것이 가능했다.

“이 개쩌는 능력을 썩히면 병신이지.”

나는 바로 내 능력을 주변인들에게 입증했다. 내가 존나게 유능한 7개 국어 능력자임을 알게 된 카르미네 대학의 교수들은 나를 사무업 노예로 승격시켰다.

“이 친구 일 잘 하네.”

“헤헤. 땡큐베리머치입니다.”

“허어. 로마니아어 역사서 20페이지를 완역하는데 일주일? 자네, 평생 우리 학과 노예 할 생각 없나?”

“않이 왜 열심히 일했는데 악담을 하시죠.”

내 유능함을 증명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원래 예르나 일행이 찾던 심부름꾼은 반년 뒤 새로 구매한 다른 노예에게 배정되었다.

그리고 사태는 씨발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자네가 그 고고학과의 노예 군인가? 잘 왔네. 여기판본의 일부일세. 다음주까지 브리타니아 어로 번역해서 내 책상에 가져다 놓게.”

“예!”

“소문은 들었습니다. 꽤 유능하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제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믿지 않습니다. 이번에 학계에 제출할판본과 그에 연동된 지도 30페이지, 이번 달 말까지 완역해서 가져오세요.”

“예? 예.”

“야, 너. 이거 내 논문인데, 도서관에서 여기에 맞는 증빙자료랑 참고서적 10개씩 첨부하고 맞춤법도 교정해 와라.”

“…예.”

“거기 자네. 내 코끼리 좀 냉장고에 넣어주게.”

“예?”

“아, 잘못 말했군. 내 코끼리 좀 주차하고 같이 가져온 식재료랑 표본들도 분류해서 라벨 붙여다가 식당 냉장고랑 내 연구실 냉동고에 각각 보관해 놓게. 오늘 점심까지.”

“뭐 하나. 빨리 안 움직이고.”

“…………예.”

존나 유능해 봤자 뭐하냐. 신분이 노예인데.

노예! 유능함! 공짜!

3중 디버프를 받은 나는 고깃집 입구에 있는 커피기계 마냥 아무나 한 번 씩은 써 보는 공짜 번역기 1호기가 되었다. 이 동방인은 무료로 해 줍니다!

“씨발, 이거 대학원생이잖아.”

열불이 뻗치지만 현실이 그랬다.

어쩌다 보니 나는 번역 에1미친 교수들의 랩실 노예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현직 교수들 못지 않은 뛰어난 번역능력과 ‘대학 소속 노예’라는 광범위한 직함은 나를 십여 명의 교수들이 돌려쓰는 번역 노예로 만들었다.

“와 존나 이게 나라냐?”

편해지려고 능력을 커밍 아웃 했더니 허드렛일 노예 시절보다 일이 늘었다.

그때는 걍 짐 옮겨다 놓고 청소하다가 가끔 심부름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였는데!!

“지구에 돌아가면 대학 때려치고 편의점 알바나 하다가 뒤져야지. 내가 대학원 한 번 더 가면 사람이 아니다.”

진짜 농담기 싹 빼고 존나 군생활 못지 않은 3년이었다. 포병이었던 내가 행정병들 개꿀 빤다고 욕했던 걸 후회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래도 개지랄 염병 옆구르기 섬머솔트킥을 연발하며 개고생을 한 보람은 있었다.

3년의 복무가 끝나고 해방되었을 때, 이 나라에 계속해서 체류할 자격이 주어졌던 것은 교수들이 내게 연구원직 자리를 주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자유민 신분 얻으면 뭐 할지는 정했니? 최근에는 취업도 힘들고 체류 자격을 얻기도 만만치 않단다.”

일 잘 하는 애한테 단기하사 안 할래? 하고 권하던 우리 행보관이 떠올랐던 것은 왜였을까.

나한테 연구원 자격을 권해오는 예르나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존나 교수들이 대학원생들을 낚아서 석박사 과정 밟게 하는 듯한 친절함이었다.

“네가 스펙에는 안 남았어도 여기서 3년이나 보냈는데 이렇게 전부 날려버리기에는 아깝지 않겠어? 월급도 줄 테니 몇 년만 노력해서 자격 따고 교수까지 해 보지 않으련?”

“어… 안 하면요?”

“고향에 돌아가야지. 뱃삯 정도는 줄 수 있단다.”

뱃삯은 개뿔이. 교수님 댁에 차원이동용 워프함선이라도 있어요?

여기서 쫓겨난들 내 고향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건 뻔한 이치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대학에 말뚝을 박을 결정을 내렸다.

크게 손해보는 행동은 아니었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것저것 조사하거나 준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권력과 돈이 있어야 했으니까.

맨땅에 헤딩하듯이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서 나는 국제급으로 유명한 이곳, 카르미네 대학에서 적절한 학위와 지위를 얻고자 했다.

“할게요, 연구원생.”

“정말? 잘 생각했어!”

호구를 잡은 듯 한 예르나의 미소를 보면서도 나는 크게 후회하진 않았다.

어차피 지난 3년 동안 노하우나 논문에 쓸 내용들도 충분히 얻었다. 적절한 성과를 거둘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근데 시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인생에서 제일 가는 멍청한 판단이었다.

“노르. 노르. 일어나렴. 벌써 아침이란다.”

이세계 노예 생활 3년차.

드디어 죄를 다 갚고 새 사람이 된지 반 년 가량 된 나는, 날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뚜껑 끼운 만년필로 내 볼을 쿡쿡 찌르는 감촉. 귓가에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시발 좆 됐다. 이거 지도교수 목소린데?’

랩실에서 쳐 자는걸 걸렸으니 존나 쪼인트 까이게 생겼다. 잠기운이 빵댕이를 발로 까인 동네 개처럼 삽시간에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구와아악!! 예르나 교수님!!”

“구와아악이 뭐니, 구와아악이.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다 얘.”

불만스러운 듯이 핀잔을 주는 미모의 여성. 언제 봐도 나보다 몇 배는 연상으로는 보이질 않는다. 하여간 엘프는 존나 연령사칭이 패시브인 종족이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노예 시절 버릇이 남아서.”

“정신 차려야지. 이제 너도 연구원생인걸.”

“그래야죠.”

카르미네 대학 고고학부 소속 수석 연구원생. 그것이 나의 현재 직함이었다.

존나 놀랍지 않은가? 한낱 노예새끼였던 내가 이 문맹률 높은 이세계에서도 지구에 있을 적 못지 않은 슈퍼 엘리트 코스를 타게 된 것이다.

“크흠. 아무튼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출근하셨군요.”

“응. 전근 준비도 해야 하니까.”

멋쩍게 인사하는 내게 미소를 돌려주는 남색 머리의 엘프.

안감이 두터운 캐미숄처럼 생긴 로브는 가슴이 깊게 파여 있다. 긴 치마 형태의 로브에 숄더를 껴입은 유려한 몸매는 갓 일어난 뇌에는 심히 폭력적이다.

언제 봐도 외모 하나는 개쩌는 이 엘프야말로 내 옛 주인이자, 현재의 지도교수인 예르나 그라시에였다.

그런데 저 지도교수라는 것도 얼마 못 가는 직함이었다. 곧 있으면 나 또한 그녀보다는 못해도 제대로 된 학위를 따게 될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얼마 있으면 대학을 떠난다. 카르미네 대학과의 계약 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예르나 교수님이 다른 대학에 간다니,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요.”

“나도야. 카르미네 대학에서는 15년밖에 안 보냈으니까.”

와, 시발. 엘프답게 시간 단위가 차원이 다르네.

나는 여기에서 보낸 3년이 존나 길었는데 저 양반한테는 15년도 잠깐인 모양이었다. 수명이 인간보다 훨씬 길다고 하니 대충 내 기준으로 2, 3년 정도 보낸 느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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