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우면서도 은근히 서운했다. 암만 그래도 한솥빵(오타 아님)을 먹으면서 보낸 세월만 3년인데, 나한테 인사도 없이 그냥 가 버리시다니!
“어? 교수님이 너랑은 어제 밤에 인사했다고 하셨는데?”
“…머라고요?”
시발?
연구원생 동료의 대답을 들은 순간이었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이 전조없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건 그거다.
출근해야 하는 날에 늦잠을 잤을 때의 그 감각.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과 지저귀는 새 소리에 저절로다가 ‘좆 됐다’는 직감이 몸을 관통하는, 특유의 좆망삘.
나는 테이블을 보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테이블에는 먼지 한 톨, 종이 한 장 없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노, 논문. 시발 내 논문 어딨어?”
“갑자기 웬 논문? 잠 덜 깼냐?”
눈쌀을 찌푸리는 동료를 무시하고 주변을 뒤졌다. 내 몫의 책상에도, 그 서랍 안에도 논문은 없었다.
“야! 너 뭐하는데?!”
새된 만류를 무시하며 예리나가 쓰던 서랍을 뒤졌다.
거기에도 내 논문은 보이질 않았다.
이 랩실 어디에도─ 내 논문은 없었다.
“…뎃?”
나는 잠기운 하나 남지 않은 청명한 머리로 깨달았다.
예르나가 내 논문을 가지고 튄 것이었다.
“내가 봤을 때는 이 세상 모든 교수는 애미가 없음.”
동네 마트보다 더 익숙한 단골 술집에서 나는 좆 같은 양 오줌맛 맥주를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아니 씹, 미친 새끼야! 여기 교수들도 오는 술집이야!”
내 절절한 소감에 같은 자리에 앉은 연구원생 동료가 안색이 하얘져서는 테이블 밑으로 나를 걷어찼다.
“아악!! 시발롬아!! 너도 학자면 말로 해!!”
“지랄. 나더러 노예 동료가 지랄하는 거 방치했다가 교수들한테 참수라도 당하라고?”
아파 죽겠는데 차가운 눈빛을 받으니 가슴이 쓰라리다.
이 시발 3년 내내 같이 교수들 짬처리 하면서 구른 친구 사이건만, 존나 아직도 쟤 눈에는 내가 노예로 보이나 보다.
“바이킹 뺨치는 선머슴녀 새끼…. 뒤져도 마그멜이 아니라 발할라로 갈 새끼….”
“뒤진다 진짜?”
째릿─.
신경질적으로 나를 노려보며 카스에 물 탄 것 같은 맥주를 잘도 마셔대는 노예(대학원생) 동료. 보라색의 곱슬머리가 개털처럼 부스스한 꼴이 참으로 인상적인 내 친구, 다나였다.
일단 저 녀석도 여자이긴 한데, 3년을 같이 랩실에서 구르면 성별은 의미가 없는 것이 대학원생이라는 생물이다. 그냥 가슴 달린 동족 같은 느낌이다.
친누나가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나보다 딱 1살 연상인데다 이성으로 보이지도 않으니 아마 대충 비슷할 것이다.
“아니 시발 한 번 들어봐. 교수 찍을 짬이 되면 솔직히 나이도 많겠지? 그럼 걔네 부모님들도 다 돌아가시고도 남았겠지? 그래서 패드립 내성 MAX 찍은 것 마냥 지들 좆대로 사는 거라니까?”
“기분은 알겠는데, 자꾸 지랄하면 나 일어난다?”
“아 제발. 가여운 노예 출신 석사를… 버리지 말아줘….”
“버려지기 싫으면 닥쳐 좀.”
다나는 한숨을 쉬며 완두콩 비슷한 콩의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내 이마에 톡 튕겼다. 저렴한 술안주가 내 머리에 부딪혔다가 테이블에 떨어진다.
내 학위와 캐리어 마냥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콩의 모습에 나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시발…. 내가 석사라니. 내가 석사라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석사 동장(銅章)이잖아.”
“야발년아….”
예르나 그 썩을 교수년에게 내 지난 3년 동안 쌓은 노력의 집대성을 홀라당 털린 것이 1주일 전의 일.
다른 나라 대학으로 날라버린 남색머리 좆프년은 출발 전에 학계에다가 내 논문을 자기 필적으로 복붙해서 지 명의로 내 버렸다.
그리고 그 년의 논문(의 탈을 쓴 내 걸작)은 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와 버렸다.
“자네 이번에 그라시에 교수가 제출한 논문 봤나?”
“당연히 읽었지! 오랜만에 밤을 새워가며 서재를 뒤적거렸다네. 세상에, 엘룬어가 룬어의 파생어가 아닐지도 모른다니! 혁명적인 착상과 가설 아닌가!”
“역시 그렇지? 나도 오랜만에 어릴 적에 옛 영웅들의 설화를 들을 때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더군!”
“이 가설이 입증되면 이번 천익장은 그녀 것 아니겠나?”
“물론! 아무도 반박 못 할 걸세!”
천익장이란 건 대충 이세계판 포스트 노벨상이었다.
이곳이 정보 통신 기기의 최첨단이 전서구와 말 탄 전령이 전부인 이세계였기에 노벨상 수준의 파급력은 없지만, 고고학계 최고의 영예임은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애미.”
생각할 수록 억울했다. 존나 억울한 나머지 눈물이 꼭지 따인 거북알 마냥 콸콸콸 쏟아졌다.
내 논문을 훔쳐간 년이 그 논문으로 노벨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다니? 심지어 내가 급조해서 제출한 학위논문은 심사관들에게 ‘허 이거 참’ 소리를 들었다.
-지도교수였던 예르나 그라시에의 영향이 짙으나 대졸생 수준의 논문으로는 충분한 완성도.
-글을 풍성하게 하려는 기교보다는 논문의 질에 신경 쓸 것.
-기존의 연구와 정리를 답습했고 새로운 창의성이 없음.
-이상의 이유에 따라 본 학자에게 석사 동장위를 수여함.
-학위논문제도총괄직 대표 아셰라드 신시아.
보이는가? 이 씨발롬들 말하는 꼬라지 봐라.
뭐? 누구 영향이 짙어? 그 깐프년이 내 훔쳐가고 남은 자료로 짠 논문이니까 비슷해 보이지 개새끼야!
창의성은 염병이. 니들이 와 시발 개쩐다 하고 있는 그 논문이 내 창의성인데 누구한테 중복이래.
하여간에 시발 누가 킬딸 티어충 아니랄까봐 글 몇 줄로 사람 빡치게 하는 일에는 도가 텄다.
패드립의 민족인 순혈 코리안 강북호님을 A4용지 한 장으로 게거품을 물게 만들다니. 역시 배운 놈들은 뭐가 다르긴 다르다.
“애미. 술 맛 참 줫~ 같다!”
일이 이 지경 이 꼴이 됐으니 충격을 먹은 내가 이틀을 내리 기절한 것도, 깨어나자마자 밥도 거르고 술 한 잔 때리러 온 것도 전혀 신기할 게 없었다.
“히히. 인생은 똥이야. 착하게 살아봤자 존나 의미 없어.”
“…야, 너무 비관하지 마. 원래 외국 출신 학자가 학위논문으로 얻는 학위는 평균이 석사 동장이야.”
“너 자꾸 꼴받는 소리 할래?”
분명 나도 처음에는 석사 은장 정도를 예상했다.
어쩌면 실버에서 브론즈로 떨어진 것 정도로 왜 그렇게 지랄을 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세계인들은 죄다 티어충들이다.
같은 석사라도 동장이랑 은장은 취급이 달랐다. 등급 하나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그딴 식이면 대졸자랑 고졸자도 졸업장 하나 차이다. 다이아 턱걸이 고딩이랑 챌린저 찍은 프로도 등급 하나 차이고.
단적으로 말해서 석사 동장에서 은장 찍는데만 2년이다.
시발 브론즈 탈출에 2년 걸리는 게 게임이냐?
솔직히 석사 학위마저도 내 찬란한 자격증 란을 보고 ‘알겠으니까 이거라도 받고 짜지렴’하는 마인드로 휙 던져준 것이 분명했다.
“하. 진짜 나가 뒤질까 그냥.”
나는 세상을 원망하며 영양실조 밀로 쑨 것 같은 오줌색 맥주를 입에 쏟아부었다.
어디 가서 논문을 표절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예르나 그 년이 학계에 이름을 올린지만 50년이랜다. 존나 내 인생의 2배를 고고학계에서 보낸 년을 상대로 논문표절을 주장하라고? 학위도 업적도 없는 노예 출신 외국인이?
하물며 어디 그 논문이 그냥 논문인가?
내 논문은 존나 날고 기는 학자들도 띠요요용 거리면서 몸을 비트는 희대의 개씹명작이었다. 도저히 20대 애송이 랩실 노예가 쓸 수 없는 그런 명작 말이다.
그런 논문을 내 거라고 주장했다간 외국인 새끼가 분수도 모르고 나댄다고 학계에서 팽 당할 거다.
결과적으로 이딴 불평을 속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눈앞의 보라색 개털머리녀 정도였다.
“너 지금 속으로 내 머리 욕했지?”
“들킴.”
눈치가 더럽게 빠른 다나가 혀를 차며 턱을 괬다.
“거 봐. 머리털이 직모인 놈들은 다 죽어야 된다니까.”
“아, 그거 나도 찬성. 나 삭발할 테니까 머리 직모인 엘프 하나만 조져주라.”
“얼씨구. 이 새끼 진짜 상태가 말이 아니네.”
다나는 가엾다는 듯이 내 잔에 맥주를 채워줬다. 맛대가리 없는 술을 리필해 줬을 뿐이지만 저것도 그녀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다나 너, 대학원생 치고는 똑똑하고 좋은 녀석이구나…!”
“머리통에 맥주잔 후려까기 전에 짜져 좀. …쯧.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통닭 구이라도 시키든가.”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내 말을 믿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라서 눈물이 절로 나왔다.
만일 그녀와 내 입장이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이번 논문으로 박사를 달았다고 치자.
그런데 거기서 석사 금장인 다나가 ‘예르나한테 이번 박사취득에 쓸 논문을 빼앗겼어!’라고 했다면 나는 그녀를 믿을 수 있었을까?
아마 쉽게는 못 믿었겠지.
그냥 얘가 갑자기 뭔 개소리고? 했을 것이다.
예리나의 연기는 그만큼 훌륭했다. 나만 해도 설마하니 그년이 내 논문을 가지고 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믿어줘서 고맙다. 다나 너 아니었으면 벌써 목 매달고 있었을 듯.”
“…그럴까봐 믿어주는 거야. 거기다 니가 죽어라 쓰던 논문을 버려가면서까지 예르나 교수님한테 이기지도 못할 시비를 털 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으흑흑. 사랑합니다 다나님.”
“까불지 마, 새끼야.”
다나는 피식 웃으며 내게 완두콩을 휙 날렸다.
“그래서? 너 앞으로 어쩔 거냐?”
병아리보다 한 단계 나은 수준의 통닭을 사이 좋게 뜯어먹고 배를 채웠을 때였다. 술잔을 기울인 다나가 물었다.
“석사 동장이여도 대학에 남을 수는 있잖아. 뭐, 딱히 할 일 없으면 그냥 고고학과에 있던가. 기왕 시작한 거 박사는 따야지. 아깝잖아.”
“너 이 자식 이거 말하는게 벌써 교수 다 됐다?”
세상에 이토록 악랄할 수가. 논문을 도둑맞아서 강등당한 노예 동료에게 노예 계속 하싈? 같은 소리를 하다니.
다나는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나만 욕 볼 순 없잖아? 너 나가버리면 네 몫의 일까지 나한테 돌어온다고.”
“사람이 줄어도 새로 뽑겠지.”
“너 만큼 유능한 놈을 어디서 구해.”
“칭찬하는 척 발목 붙들지 마시죠.”
“앗, 들켰다. 새끼 눈치 빠른 것 봐.”
“응~ 나 없어도 할 사람 많아~ 랩실 안 망해~.”
“응~ 너 가면 랩실 망해~ 가지 마~.”
우리는 서로 낄낄대며 웃다가 술잔을 짠 부딪혔다.
“아, 그래서 너 진짜 어쩔 건데?”
“글쎄다.”
“여기 남을 거면 내 논문이나 좀 도와 주던가. 나도 슬슬 성과도 쌓였겠다 박사나 노려볼까 하는데, 거기 논문에 네 이름도 넣고. 좋잖아?”
“우리 누나 아까부터 미련이 뚝뚝 떨어지시네.”
이성에게 이토록 어필받는 경험은 처음이다.
신날 만도 하건만 이미 3년 동안 개고생을 함께 한 탓에 여자라기보단 전우로 보이니까 참 신기할 노릇이었다.
딱히 다나가 못 생겼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시발 우리는 5일 내내 책상에 앉아서 글자만 쳐다보거나 유적에서 몬스터한테 쫒기면서 끼요욧 하는 사이였다. 그러는 와중에 성욕이 생길 리가 없다.
사람의 3대 욕구는 수면욕>식욕>성욕이다. 기력이 빠져서 뒤져가는 중에도 쥬지가 반응하면 ㄹㅇ 병원 가야 된다. 뇌가 쥬지한테 지배 당하고 잇서욧!!
“사실 진로는 이미 정했어.”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말했다.
“모험자가 될 생각이야. 저 서부쪽의 사르디가스에 가서.”
“…뭐?! 모험가?!”
다나는 자기가 담당하는 남고의 학생이 이화여대에 가겠다는 소리를 들은 교생처럼 놀랐다.
“너 제정신이야?! 갑자기 모험가는 왜?!”
그녀가 저토록 어이없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 세상에서 고고학과는 대충 지구의 우주공학 정도의 포지션이다. 장래유망하고 실용적이며 벌어먹고 살기도 쉽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위대했던 고대의 문명이 전쟁이나 재해로 쇠퇴했다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 온라인 게임처럼 이쪽 세상에서는 원시 고대 운운하는 이름이 붙은 물건이 오히려 현대보다 기술력이 높단 얘기다. 시발 디아블로도 아니고.
“야, 침착하고 다시 생각해 봐! 말마따나 네가 모험가가 된다고 치자. 그러면 뭐 유적에서 유물이라도 찾아서 모험가로 승승장구라도 할 것 같아?!”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아무튼 멸망한 ‘고대 문명’과 현대에는 짐작하기도 벅찬 수준의 격차가 있다. 다나가 말하는 ‘유물’이 그 일례다.
그 격차가 어느 정도냐면, 과장 좀 보태서 한 5백년 쯤 지나서 타임머신이 개발 돼가지고 과거로 가더라도 우가우가 원시인이 던진 고대원시 뗀석기 투창에 함선이 격추 당하고도 남을 거다.
아마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슬슬 이 세상에서 고고학계가 존중받는 이유가 뭔지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고고학계란 옛 문명의 언어를 해독하고 역사를 알아내서 유물이니 오파츠니 하는 것을 회수하는 업계다.
즉, 이세계의 고고학계는 일종의 우주산업과 같았다. 연구 결과 나오는 부산물로서 기술력과 군사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실제로 국가에서도 예의주시하며 연구를 후원하기도 한다.
근데 그런 업계에서 현직 교수들하고 삐까뜰 정도의 능력이 있는 친구가 갑자기 일을 때리치고 사업하러 시골에 가겠다고 지껄인 거다. 이걸 안 말리면 친구가 아니지.
“직접 현장에서 뛰는 편이 성과를 내는데는 빠르니까. 신청만 하면 학계에서 현장직 고고학자 자격증도 주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장직 고고학자란 소위 ‘몸으로 뛰는’ 고고학자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전문 고고학자의 종류는 3가지로 나뉜다.
평소에는 자기 연구를 하다가 국가에서 유적을 발견했을 때 파견을 나가는 국가계약직.
사람을 고용해서 유적이나 오지를 탐사시키고, 그들이 가져온 성과를 받아서 그걸 연구하는 자유연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