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겠나?”
“예. 알겠습니다.”
뭔가 절차라도 남았겠거니 해서 기다렸는데, 자리를 떠난 브람마톤 교수는 난생 처음 보는 책을 한 권 가지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받게.”
“예?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빌린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듯이 쑥 내밀길래 그냥 받았다.
뭐 현장직들이 저지르면 안 되는 법률이라도 적혀져 있는 수첩인가? 군대를 전역하는 장병한테 예비군 소집에 관련된 소책자를 나눠주는 거랑 비슷한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책의 제목은 [모험가의 연금술]이었다.
“…연금술 책입니까?”
“아닐세. 내가 모험가들을 위해 쓴 수기일세. 체험담과 몇몇 팁을 담은 가이드북이라고 해도 되겠군.”
아니 뭐요? 골드 클래스 모험가가 쓴 가이드북? 진짜루?
저 엄근진 헬스 머신이 이딴 걸로 나한테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 진짜 맞겠지.
이럴 수가. 현직 모험가가 자기 경험을 집필한 책이라니!
그것도 무지렁이 브딱실딱 모험가가 저기 어디 동네 서점 단골 모험가 존슨한테 부탁해서 대필 받은 책도 아니다.
무려 골드 클래스 모험가 겸 카르미네 대학 교수가 직접 쓴 책!
교수들은 공부만 했지 책을 쓰는 요령은 없기 마련이지만 카르미네 대학 교수는 그 얼마 없는 예외였다. 이 대학의 개쩌는 엘리트 교수들은 이과감성의 글도 문풍당당하게 쓸 줄 아는 이 시대의 멀티 플레이어다.
그러니까 분명 이 책은 존나 가독성도 내용의 충실함도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할 것이다.
“내가 석사 은장을 따는데 썼던 논문의 일부를 박사 시절에 재편성한 책일세. 우리 학과와 관련 내용을 빼고 모험가에게 유용할 법한 내용으로 채웠지.”
나는 이어지는 브람마톤 교수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세상은 종이 제법이 발달해서 책 자체는 자주 보였다. 하지만 고급 지식을 담은 책일 수록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세계 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티어충이라 10년만에 다시 만난 전 여친한테도 ‘그래서 님 티어가??’부터 박을 새끼들이어서 그렇다.
이세계에 사는 새끼들은 남들 인생에 도움이 될 꿀팁을 푸는데 존나 인색했다.
자기 밑을 깔아줘야 되는 놈들이 기어올라와서 자기들보다 높은 티어를 따는 것이 아니꼬운 거다.
돈독 오른 마법사들은 A4용지 3, 4장 짜리 종이를 몇 골드씩 받아가며 팔기도 한다.
마법 하나 배우는데 돈이 천만 원 단위로 깨지는 거다. 시발 그 새끼들은 돈을 벌어서 돌아가신 양친들을 새 걸로 바꿀 생각임이 틀림없다.
이렇듯 나무위키도 없고, 삽질 방법 하나 가르쳐 주는 것도 온갖 가오를 잡아가며 생색을 내는, 이 양심 씹창난 추잡한 이세계에서.
설마하니 자기 학과 학생도 아닌 나한테 이런 귀한 책을 내 주다니!
그것도 공짜로!
예르나 그 천하의 쌍쌍바년은 나한테 뭘 주고 가기는 커녕 떠나려는 내 논문을 가지고 나보다 먼저 튀어버렸는데!
“크흑!”
눈물이 절로 나려는 것을 슥 닦았다. 상남자의 길을 앞서 걷는 위대한 대선배 앞에서 꼴사납게 눈물이나 훌쩍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한손으로 가이드북을 품에 끌어안고, 브람마톤 교수님께 90도 인사를 박았다.
“지금까지… 빌어먹게 감사했습니다!!!”
“그래. 부디 몸 조심하게.”
우리는 마치 3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사제지간처럼 근-엄한 분위기를 뿜으며 작별을 마쳤다.
남들이 보면 저 사람이 내 지도교수인 줄 알겠네.
증명서를 받은 나는 짐을 챙겨 사르가디스 행 배편이 기다리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카르미네 대학 자체가 교역도시에 있다 보니까 그다지 멀리 나올 것도 없었다.
모험가 일을 할 때 쓸 장비는 따로 구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준 보급품이 있으니까 따로 필요 없겠지.’
보급 장비의 구성은 꽤 충실했다.
철로 만든 흉갑과 팔다리 보호대, 그리고 검이다.
제식 갑옷은 아니다. 대충 군대에서 뿌리는 면도날 같은 싸구려 제품이라 대학 마크도 안 붙어 있다. 그래도 튼튼해서 막 쓰긴 딱 좋았다.
─뚜벅뚜벅.
선착장으로 가서 셰히르 행 배편을 찾는다.
셰히르는 사르가디스로 가는 중간 정착장이자 남부의 해안도시다. 셰히르에 내린 다음 마차로 환승해서 사르가디스로 가는 것이다.
“오, 왔냐?”
“뎃?”
그런데 놀랍게도 항구에서 다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어제 그렇게 술을 빨고도 마중 나와 준 거냐? 내가 인생을 헛 살지는 않았구만.”
나는 다나가 마중을 나와줬다는 사실에 내심 감동했다.
어제 나랑 다나, 그리고 다른 연구원생들은 랩실에 모여 내 송별 파티를 벌였다.
눈치를 볼 지도 교수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포장 가능한 음식과 술을 잔뜩 모았다.
우리는 술기운을 빌어 밤새 끼요요욧 키에에엑 거리면서 갓 대학 입학한 새내기 마냥 개지랄을 떨어댔고, 술을 마시면 숙취가 온다는 자명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전원 다 오늘 점심까지 기절했다.
그런데 그 숙취를 버티고 내 마중을 나오다니, 혹시 이 녀석은 나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마중 나온 거 아닌데? 지도교수도 없으니 너 배웅하러 간다고 이빨 까서 합법적으로 시간 쨀려고 왔다.”
아 이런 시발.
“개 똑똑한데? 역시 석사 금장.”
“지능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와, 예전에 나한테 당했던 말 그대로 써먹는 거 실화냐? 학자로서의 자존심은 어디로 갔음?”
“원래 사람은 남을 모방해 가면서 성장하는 거야.”
“뭐지? 내가 니 롤 모델이었다는 것인가? 호오. 이 몸을 본받고자 했다니 그 마음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딴 건 몰라도 인성질은 네가 우리 대학 넘버 원이란다.”
“뎃?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걸?”
“새끼 이거 인성상태가 개판이구만.”
우리는 늘 그렇듯이 낄낄대면서 대화를 나눴다. 이런 대화도 사르가디스로 떠난 뒤에는 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니 더 즐거웠다.
“야, 우리 여기 서 있지 말고 뭐라도 마시자.”
나는 주변에 있는 술집을 발견하고 그곳을 가리켰다. 낮에는 카페처럼 가벼운 술이나 음료수를 팔다가 선원들이 돌아올 시간대에는 술집으로 바뀌는 곳이었다.
“따라오렴 노예 놈아. 오늘 부로 완연하게 노예를 탈출한 이 노르드 님이 친히 한 잔 쏴 주마.”
“쏴? 거지쉑 주제에 뭘 쏜다는 거지?”
“어허. 내 쌈짓돈은 전직 노예의 땀과 눈물의 결정이다. 울면서 감사하도록.”
“눈물은 에바고 싱글벙글은 할 수 있는데.”
“시발.”
나불거리며 주점에 앉아 가벼운 음료수를 시켰다. 다나는 메뉴판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오, 나 여기 와 본 적 있어.”
“그래? 남친도 없는 아줌마가 누구랑? 설마 혼자서?”
“너 알아서 기어라. 한 번만 더 까불면 뜨거운 음료 시켜서 니 와꾸에 부어다가 화상 자국 만들어 준다.”
“와! 모험가풍 흉터! 이제 누가 무슨 흉터냐고 물어보면 내 옛 친구가 남긴 상처라고 허세 부려야지.”
“오? 뭐야? 안면빨로 골드 클래스 먹나? 모험가 등급이란 게 못생긴 순이었어?”
“그럼 나는 평생 아이언 클래스잖아. 존나 잘생겨서.”
“웃기고 있네, 정신병 맛집 같은 새끼.”
다나는 큭큭거리면서 점원을 불러 음료수를 주문했다. 내가 마실 것까지 2잔을.
“아니 시바 왜 니가 내 음료수를 골라요.”
“믿고 먹어 봐. 이거 존나 맛있어.”
“이 동네 맥주를 잘도 마셔대는 년이 뭐라는 것이지?”
카스에 물 탄 것 같은 맥주를 꿀떡꿀떡 마셔대는 다나다. 쟤 입맛에 맞는 음료수가 정말 맛있다고 할 수 있을까?
“주문하신 시트러스 코로나 나왔습니다.”
─달그락.
탐탁찮아 하는 내 앞에 점원이 찻잔을 2개 내려놓았다. 음료수 이름이 왜 코로나야 시발.
나는 점원이 내다 준 음료수를 머뭇머뭇 들여다봤다.
존나 초록색 즙 위에 생선 알 같은 것들이 둥둥 떠 있다.
“와 개 미친 비쥬얼 쇼크.”
“왜. 맛있어 보이는데.”
“생선 알 쥬스가 맛있어 보인다고? 인생을 살아주세요.”
“생선 알이 아니고 이렇게 생긴 과일이야. 뱃여행 떠나는 사람들한테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내 주는 거라고.”
“우욱 씹. 이걸 멕인다고? 뱃속에 기생충이라도 기르게?”
기분 같아선 버려버리고 싶었지만, 지난 정이 있어서 그러기도 뭣했다.
나는 다나를 믿고 그냥 마셔 보기로 했다.
첫 맛은 약간 알코올 느낌.
혹시 술을 탔나? 증류주도 귀한 이 세상에서 차에 넣을 만 한 술을 어떻게 구했──
“아 이 염병할 영국인 새끼들!! 여타 맥주 탔구만!!!”
구웨에에엑!!
나는 한 입 마시자 마자 부랄을 밟힌 미용실 개 뽀삐처럼 팝핀을 추며 몸을 비틀었다.
개 씨발 시큼씁쓸한 이세계 모히또 같은 맛!
존나 다나가 맛있다고 말한 시점에서 눈치를 까야 했다!!
“시발 이게 뭐야!!! 셔!! 써!! 짜!!”
“푸하하하하학!! 아하하하하하하학!!”
내 반응에 다나나는 존나 여성스러움 따윈 개나 줘버린 웃음소리로 웃어댔다.
이 야발년 진짜. 이 새끼도 다음 번에 오는 교수한테 논문 닌자 당했으면 좋겠다.
“어으어어억…. 이건 시발 석사 차별이야….”
이거 존나 생선 알이 아니라 벌레 알이었던 거 아닐까?
시큼한 것이 뱃사람한테 꼭 필요한 비타민 C는 풍부하겠지만, 괴혈병 예방을 대가로 미각을 조져놓는 느낌이다.
아니면 그건가? 배에 있는 동안은 소금훈제나 뭐 그딴 것만 먹어야 하니까 미리 미각을 씹창곱창 내 놓는 건가?
“후후후. 먹다 보면 괜찮아져.”
다나는 웃으면서 자기 몫의 음료수를 마셨다.
존나 어머니 없이 자란 천애고아 새끼가 음식의 맛을 못 배워서 만든 듯한 음료수인데, 잘도 저렇게 마시는군.
“쓰벌… 됐다 그래라. 니가 사는 거면 몰라도 내 돈 주고 이딴 거 마시기 싫다고. 배 멀미 할 것 같잖아.”
“쯧. 내 그럴 줄 알았지. 싫으면 이거라도 가져가서 먹어.”
내 말에 챙겨온 종이봉투를 내미는 다나였다.
“으으. 이번엔 또 뭐여.”
나는 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다나는 대수롭지 않게 눈짓으로 내가 봉투를 받기를 종용했다.
봉투를 테이블에 놓고 안을 들여다본다.
─부스럭.
봉투 안에는 과일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비타민이 풍부할 것 같은 감귤계의 과일이다.
“허, 참. 며칠이나 배 탄다고 이렇게 사 왔냐.”
“걍 먹어. 니가 평소에 과일 챙겨먹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 존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이 쥬스만 안 멕였어도 좋은 추억이 됐을 걸.”
날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해서라도 뱃여행 중에 다 먹어치워버려야겠다.
그렇게 종이봉투를 챙긴 나는 문득 다나도 아직 논문을 쓰던 중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아 맞다. 그래서 다나 너 논문은 다 써 가냐?”
“논문?”
다나는 차를 마시면서 인상을 썼다.
“말 해서 뭐 해. 어차피 다음 교수가 오기 전까지는 박사 진급 봐 줄 사람도 없잖아.”
“뭐지? 예르나 년이 런해서 석사 동급으로 전락한 나를 기만하는 것인가?”
“그건 오해인데. 옛말에 사형수랑 불치병 환자는 놀리는 거 아니랬어.”
“야발련아.”
“깔깔깔.”
오늘을 끝으로 당분간 못 볼 사이임에도 우리의 대화는 평소와 똑같았다.
연구원생의 일상은 노예와도 같아서 3년 넘게 얼굴을 본 사이에서 새삼 신박한 화제가 나올 리도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도 딱히 어색하거나 지루하지도 않았고, 우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뿌우우우우─!
그러나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금방 가는 법이었다.
“셰히르! 셰히르로 가는 승선객은 탑승하십시오!!”
항구에 출발 시각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에 다나는 인상을 쓰며 작게 툴툴댔다.
“아니 뭔. 한참을 기다렸는데 얘기 얼마나 했다고 출발 시간이야.”
“크크크. 우리 다나 내가 언제 올지 몰라서 숙취약 먹고 아침 일찍부터 달려왔는데, 금방 가 버려서 슬펏쪄요?”
“아 지랄 말고. 몬스터랑 뒹굴러나 가, 이 새끼야.”
귓볼이 빨개진 다나는 내 등을 떠밀었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다나 너도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이번에는 박사 학위 꼭 따서 노예 신세 탈출하든가 하렴.”
“개소리 말고 너나 잘 하세요. 다음에 볼 때까지 은장 따 놔. 그럼 내가 밥 한끼 거하게 산다.”
“은장? 박사 은장을 말하는 것인가? 3년 컷 씹가능이지.”
“석사도 뒤지면 2계급 특진이냐? 존나 몰랐네.”
“아니 씹. 떠나는 사람한테 저주 퍼붓기 있냐?”
“지 혼자 노예 탈출하려는 전직 노예한테는 해도 돼.”
“현장직 하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