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꾼 놀이는 너 혼자 많이 하세요.”
나는 다나에게 등을 떠밀려서 선착장 앞까지 왔다. 가게 점원은 우리를 배려해 주는 건지 우리를 쫒아와서 계산을 독촉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리처럼 떠나거나 배웅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내심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
잠깐의 침묵 후, 눈이 마주친 다나에게 나는 말했다.
“그럼, 간다.”
“그래. 잘 가라.”
뿌우우우─!
배의 출발 시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항구에 다시 울려퍼졌다.
끼익. 끼익.
나는 다리 대신 깔린 나무판자 위를 걸었다.
그리고 그 끝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고서 웃으며 소리쳤다.
“다음에 볼 때는 박사님이라고 부를 준비나 해라! 존나 개 쩌는 업적을 쌓아서 최연소 박사님이 될 예정이거든!”
“하! 석사 동장 주제에 뭐래! 내가 너보다 빨리 달거든?!”
항만에 서 있던 다나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야말로 뒤지겠다 싶을 때는 걍 포기하고 돌아와!! 머리 박고 구걸하면 대학에서도 연구원생 자리 정도는 주겠지!!”
“응~ 뒤져도 노예는 안 하지~!”
내가 뱃머리에 올라오자 출발 예정 시간은 금방 찾아왔고, 다나는 내가 탄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지내라! 노르!”
“다나 너도!”
항구에서 손을 흔드는 친구에게 나도 손을 흔들었다.
배는 다나가 서 있는 항구를 떠나 브리타니아의 남부 지방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배가 항구에서 멀어지자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교역도시 아인히르.
내가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노예로서 온갖 개고생과 추억을 쌓으며 보냈던 땅,
카르미네 대학도 저 먼 발치에 보였다.
힘들고 빡셌지만 그래도 여러 인연을 쌓게 해 주고, 이세계에 적응할 기회를 줬던 내 2번째 고향.
그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후우.”
그러나 나는 어설픈 추억이나 감회에 잠길 생각은 없었다.
이 좆 같은 세상에서의 생활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셰히르로 가는 뱃길은 노예로 팔려왔을 때보다 짧았다.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전부니까 오래 걸리는 편이 더 이상하다. 가성비 오지는 중저가형 배다 보니까 비교적 짧은 것도 있고.
아무튼 셰히르에 도착해서 하루를 쉬고, 나처럼 사르디가스로 향하는 이들끼리 모여 미리 예약된 마차를 탔다.
“코스가 미리 짜여 있으니 여행하기 편하네요.”
나랑 같은 마차에 탄 남자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말이 끌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이세계 마차는 이 세계의 기차 같은 것이었다.
말도 힘이 존나 쎄고 이런저런 마법도 있다 보니까 기술이 발전을 안 하고 마차 크기만 커진 것이다.
“네. 사르디가스까지 논스톱이니까요. 마차에서 시간만 떼워도 된다는 점은 편하네요.”
이런 커다란 마차는 개인이 빌리기는 힘들다. 이건 내가 타고 온 배를 운영하는 상회에서 마차 비용을 받고 상행에 끼워 주는 것이었다.
아예 카르미네 대학이 있는 아인히르에서 사르디가스로 가는 정기편이 있어서, 나는 그것에 맞춰 표를 끊은 것이다.
사전에 아인히르에서 신분 증명이 끝나서 귀찮게 문지기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
보통은 제대로 된 신분증만 갖고 있어도 대충 다 통과시켜 주지만, 신분증 문제로 3년을 노예로 살았는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맞장구를 쳐 주자 남자가 말했다.
“아, 저한테는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말을 높이는 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행상인 일을 하다 보니 존댓말이 버릇이 됐거든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부하지 않는 게 내 매력이지.”
“하하하! 이거 호쾌하신 분이시군요.”
바로 말을 놓는 내 모습에 자칭 행상인이 크게 웃었다.
“저희 마차행은 못해도 이틀은 넘게 이어질 겁니다. 그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창 밖의 초원만 봐서는 정신병 걸리기 딱 좋죠. 그러니 이렇게 어색해 지기 전에 통성명을 나눠 둬야 심심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 행상인이 말하니 말의 무게가 다르고만.”
군대에서도 경계 근무 중에 말을 안 하는 선임이나 후임을 존나게 싫어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저 놈은 딱 그런 타입인 모양이었다.
“하하. 말도 마십시오. 행상인이 가장 싫어하는 건 도적과 몬스터입니다만, 가장 무서워 하는 건 심심함입니다. 마차에 타고 있으려니 벌써부터 경기가 도지는군요.”
“나도 심심한 걸 좋아하진 않지. 아, 나는 노르드다. 본명은 부르기 힘들 테니 이쪽 이름으로 불러.”
“조르마 루브레오입니다. 조르마라고 불러 주십시오.”
통성명을 마친 조르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길을 줬다.
마르고 살찐 아재 둘과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다.
“저기 계신 분들도 같이 말씀이나 나누시죠. 지금은 괜찮을 지 몰라도 하루만 지나도 무척 심심하실 겁니다.”
“…졸프 다르믹이다. 젊은 친구가 말이 많군.”
“뭐 어떤가. 심심한 차에 잘 됐군. 나는 아론 잭프리일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지.”
마른 아재는 발랑 까진 머리숱 만큼이나 말이 없어 보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배 나온 아재는 무슨 해적 같은 이름을 한 남자였다.
두 사람이 소개를 마치자 나는 대답이 없는 로브 남자에게 저절로 시선이 갔다.
존나 수상해 보이는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배에서도 몇 번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내가 읽거나 본 판타지 영화나 만화에선 바다 여행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질 않는 게 클리셰였으니까.
크라켄. 어인. 하피. 세이렌.
그런 개 호로 잡놈의 새끼들이 언제 나타나 지랄을 할까 무서운 것이 이세계의 뱃여행이다.
그런데 밥을 처먹을 때에도 로브를 쓰고 있는 놈이 계속 눈에 밟히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나는 샘무스다. 성은 없다. 이름만 있다.”
로브를 푹 눌러쓴 남자가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어째 베트남 외노자 같은 발음이었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다. 진짜로 대학생 시절 공장 알바를 하다가 본 외노자 뚜언이(본명 모름)이랑 비슷한 말투였다. 아마 브리타니아 말에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스윽.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로브에 달린 후드 아래에 있던 것은 새빨간 머리털이었다. 시발 이 새끼 머리 모히칸이네. 존나 멋있다.
“아, 얼스터인이셨군요. 얼스터인 분들은 성이 없지요.”
행상인 조르마가 다소 당황한 것처럼 말했다.
고대문명의 후예로 불리우는 인종, 얼스터인.
그들은 자기들이 문명인인 줄 아는 브리타니아 새끼들이 ‘3대 야만족’이라고 칭하는 민족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은 인종차별 피해자들 중 하나다.
바이킹이야 침략국가다 보니까 피해국가에서 혐오 받더라도 별 말 못하겠지만, 얘네 얼스터인은 얌전히 사는데도 은근히 차별을 받는다.
같은 인종차별 피해자여도 나 같은 경우는 아예 국가 간의 접점 자체가 없어서 그런지 피부색 외에는 딱히 시비를 걸리지 않았다.
반면 머리색만 가지고도 3일 밤낮을 욕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얼스터인이다. 역사적으로 얽힌 일이 많어서 그렇다.
다른 세상이어도 인종차별은 인류의 종특인 걸까?
하긴 21세기 지구에서도 빨간 머리 아일랜드인은 차별의 대상이었다. 나는 할리우드에 빨간 머리를 한 주연이 나오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여기에도 백인우월주의와 제국주의가 범람하는 날이 오면 나도 그 주된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불만인가?”
아무튼 조르마의 당황해하는 태도에 모히칸 머리 샘무스는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다. 인종차별 피해자 특유의 약간 시니컬하고 예민한 반응이다.
“하하. 설마요. 저는 얼스터족의 부락에도 상행을 가 본 적이 있거든요. 잠깐 놀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행상인답게 조르마는 매끄럽게 상황을 수습했다.
“브리타니아에 얼스터, 그리고 키타이까지! 이 커다란 마차는 그야말로 자그마한 인종의 용광로군요! 이거 이틀 동안 심심할 일은 없겠어요!”
피부가 노란 탓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키타이 인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존나 내가 몽골인이라니.
미안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당신의 아들은 이세계에서 판타지 유목민족이 돼 부렀습니다.
[…“Furnace”?]
조르마가 말한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셈무스는 자기네 말로 중얼거렸다. 번역능력과 대학원생 생활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그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었다.
[“Furnace”는 용광로라는 뜻입니다. 철을 녹이는데 쓰는 그거 말입니다.]
인종차별을 극혐하는 나는 셈무스를 위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으음?! 노랭이! 에린의 말을 아는가?!]
그러자 셈무스는 내 유창한 얼스터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휙 돌아봤다. 어색한 브리타니어와는 달리 지들 나라 말로는 나름 폼 잡는 말투였다.
근데 이 씨발 빨갱이 새끼가 누구한테 노랭이래.
기껏 지들 나라 말로 말을 걸어 줬더니만 인종차별 피해자 씩이나 돼서 나를 노랭이라고 부르다니.
미국에서 동양인을 가장 많이 차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흑인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딱 그 짝이었다.
역시 아무 이유 없이 3대 야만족의 일원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었다.
하여간 염병할 야만인 새끼 같으니. 못 배워먹어서 지들이 당하는 것만 차별인 줄 알지.
그치만 대놓고 뭐라 하기에는 쫄려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3대 야만족 중에서도 얼스터인은 수는 적지만 개개인의 힘은 가장 뛰어나다고 들었다.
저 새끼가 자길 빨갱이 새끼라고 놀렸답시고 내 배에 칼을 꼽을지도 몰랐다. 다시는 기립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렷!
[노랭이. 혹시 다른 에린의 후예에게 말을 배웠나?]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풍문으로 들어온 얼스터인의 특징 대로 대로 셈무스는 자신들을 ‘에린의 후예’라고 자칭했다.
뭐, 어원을 따지자면 얼스터라는 표현부터가 브리타니아를 포함한 자칭 문명인 새끼들이 지멋대로 붙인 명칭이다.
[어느 쪽이든 놀랍군. 같은 에린의 후예 외에도 얼스터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니. 감탄했다. 노랭이.]
[에린의 말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만날 기회가 없으셨던 거겠죠.]
씹새끼가 사람 빡치게 계속 노랭이 노랭이 거리고 앉았다.
명치 한 대 쎄게 때려도 되냐고 물어볼까? 지는 존나 쎈 전사라서 괜찮다고 가오 잡으면서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 대가리도 모히칸이지 않은가.
[혹시 우리 문자도 쓸 줄 아는가?]
[아뇨. 거기까지는.]
당근빠따 쓸 줄 알지만 괜히 더 친해지고 싶지 않아서 선을 그었다.
계속해서 나한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어째 저 새끼한테서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난 악덕 한인 사장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 놈도 나도 같은 사르가디스로 가는 몸이다.
자칫 친해졌다가 뭔 일이 날 때마다 나를 찾아와서 이 지랄 저 지랄하는 꼴을 보는 것은 사양이다.
외노자랑 친해지는 건 눈치껏 적당히 하는 편이 좋다.
베트남 뚜언이에게 시달리느라 기말시험을 조질 뻔 했던 이후, 나는 그것을 절절하게 실감했다.
“허어. 저 친구랑 얼스터 말로 대화가 되는가?”
나랑 셈무스가 나불대는 것을 들은… 시발 이름 뭐더라. 아무튼 뚱뚱한 아저씨가 감탄한 것처럼 말했다.
“그렇죠 뭐. 관심이 가서 조금이나마 배웠습니다.”
“크흠. 알겠네. 관심이라.”
그러자 뚱보 아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뭐지 시발? 칭챙총이랑 아일랜드 진저 놈이 끼리끼리 잘들 논다~ 하는 말이 목까지 차 올라서 저러나?
“흠흠. 그나저나, 셈무스라고 했나?”
“맞다. 내 이름은 셈무스다.”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말일세.”
뚱보 아재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얼스터인의 나라는 남녀노소 상관 없이 전부 알몸으로 다닌다는 것이 사실인가?”
뭐요 시발?
나는 존나 뜬금없는 질문에 기겁을 했다.
아니 이 미친 아재가? 미개함 그 자체인 이 세상에서도 야만족이라 불리는 빨갱이들한테 뭔 개소릴 하는 거지?
고고학적으로는 저 말도 맞다. 옛날 에린이라는 땅에 살던 얼스터인들은 알몸뚱이로 사는 것은 기본에, 전라(全裸)로 사냥도 하고 맞짱도 떴다는 기록이 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게 언제적 일인데. 지금까지도 그런 문화가 남아 있을 리가….
“맞다. 에린의 후예. 나약하지 않다. 옷 안 입는다.”
와 시발 이게 진짜네.
“저, 정말인가? 정말로 여성들도 안 입나?”
“안 입는다. 우리, 에린의 뜻과 긍지를 잇는다.”
긍지라. 어눌한 말투에 비해서 어려운 표현이었다. 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저 말만 따로 배워둔 걸까?
존나 오타쿠들이 일본어로 필살기니 오의니 하는 말은 할 줄 알아도 가자미 찜이라는 말은 일본어로 못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였다.
아무튼 지금은 야만인 새끼가 어려운 말을 썼단 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존나 어메이징하게도 얼스터인들은 옷을 안 입는댄다.
우리는 저절로 로브를 입은 셈무스의 차림새에 기겁을 하게 되었다.
“씨발?”
이 씹새끼 어째 마법사도 아니면서 기다란 로브를 입었다 했다. 존나 저 로브 밑으로는 거시기를 덜렁덜렁 하고 있단 말인가? 존나 저 옆에 안 앉길 잘 했다.
“어흠. 저도 상행으로 얼스터인의 군락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만, 확실히 그곳에 사는 분들은 옷을 입지 않더군요.”
노출광 야만족의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에 조르마가 헛기침을 해 가며 화제를 전환했다.
“분명, 땅도마뱀의 후예라는 이름의 부족이었죠. 그 분들은 저희가 파는 물품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셔서, 밀과 술을 팔고 그 분들이 사냥한 몬스터의 가죽이나 피를 사 왔는데… 그때마다 자연과 하나가 된 아리따운 여성분들을 뵀습니다.”
조르마의 직업은 행상인이다.
그리고 행상인이란 21세기 한국의 지하철에 출몰하는 유니크 몹, 보따리상의 상위호환 같은 직업이었다. 처음 보는 상대에게 썰을 풀어서 물건을 팔아치우는 능력이 패시브인 인종 말이다.
그런 행상인답게 조르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로도 사람의 주목과 관심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시장바닥의 남자 상인들이 얼스터 여성은 전부 미인이라고 하던데, 실제로 보니 정말이더군요.”
이것도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내 전공은 고고학이지 세계사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