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50년을 산 노인들 중에서도 터키의 전통문화를 모르는 한국인은 많다. 나도 그것과 비슷하다. 얼스터인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된다고 걔네 특징까지 배워두란 말인가.
“눈이 휘둥그레 질 만 한 미녀 분들이 실오하기 한 장 안 걸치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이, 흐흐흐. 그거 정말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그, 그렇군.”
꿀꺽.
조르마의 썰 풀이에 뚱보 아재가 침을 삼켰다. 정작 얼스터 사람인 셈무스는 반쯤 방치된 상태였다.
지들 나라 얘기하는데 왕따 당하는 꼴이 참으로 인종차별적이다. 하지만 솔직히 고추 덜렁덜렁 모히칸 워리어한테 관심을 가질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 그래서? 외지인들도 들어갈 수 있던가?”
“예. 들어갈 수 있고 말고요.”
조르마가 뚱보 아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나라를 잃은 선비처럼 슬픈 얼굴을 했다.
“그런데… 제가 듣고 겪은 바로는, 사실 얼스터인 분들이 사는 곳에 찾아가는 것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군요.”
“뭐라고? 아니, 대관절 어째서인가?”
뚱보 아재는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 마냥 깜짝 놀랐다. 저 아재는 머리 속에서 언젠가 누디스트 시티에 찾아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 그게 정말로 아쉽게도 말입니다….”
천천히 열리는 조르마의 입.
나는 뭐 어디 오지의 아프리카 부족 얘기 같아서 별 감흥이 없었지만, 다른 두 아재는 달랐던 모양이다.
─두근두근.
뚱보 아재는 사회에서 좀 놀다 왔다는 신병의 썰을 듣는 생활관의 선임들처럼 젊은 청년의 입담에 홀려가고 있었다. 마차 구석에서 말 한 마디 않는 말라깽이 아재도 아닌 척 하면서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끼이이익!
─히이이이잉!
우리가 탄 마차가 갑자기 급정지를 하며 멈췄다!
느닷없는 급정지였다. 말 울음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자 마차 안의 남자들은 관성에 법칙에 따라 이곳저곳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어어억!!”
“흐억?!”
“갸아아아악!!”
나는 나대로 노출증 빨갱이 새끼랑 부딪힐 뻔해서 존나 식겁했다. 온몸의 근력을 최대한 발휘에서 자리에 버텼다.
시발 로브 아래로 알몸인 사내새끼랑 부대끼기는 싫어!
“이보게, 마부! 갑자기 무슨 일인가!!”
말라깽이 아재가 외쳤다. 그러자 마부석으로 향하는 작은 창문이 열리고 마부가 고개를 내밀었다.
드르륵!
“아이고, 손님들! 갑자기 멈춰서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났습니까?”
“아! 별 건 아닙니다. 여기가 숲 근처라서 코볼트들이 나왔다고 하네요. 저희 상단의 모험가들이 쓰러트려줄 때까지 잠깐 기다려 주십쇼.”
마차를 습격하는 잡몹 무리라니. 존나 판타지의 정석 같은 이벤트였다.
하지만 내가 설치지 않더라도 상인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버스가 펑크났다고 승객이 같이 내려서 고칠 이유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몬스터인가? 나도 돕는다.”
벌떡!
그런데 마부의 말을 들은 셈무스가 존나 밑도 끝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염병 얜 또 왜 이래.
“예에? 손님들은 돈을 내셨으니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요!”
셈무스의 가세에는 마부도 당황했다. 저들도 돈 받고 하는 일이니 손님이 일을 하겠다는 말에는 당황할 만 했다.
“상관 없다. 나, 배에 있는 동안 너무 오래 안 싸웠다. 안 좋다. 감이 무뎌진다.”
마부의 제지에도 셈무스는 좆까라는 말을 길게 늘여가며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존나 세상 야만인 같은 새끼였다.
“감이라. 그것도 맞는 말이군.”
근데 시발 말라깽이 아저씨도 납득을 해 버렸다.
저 아재도 모험가 일을 하는건지, 개 뜬금포로 셈무스를 따라서 마차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더 것이다.
“하, 하하하. 기운차신 분들이군요. 저희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죠.”
갑자기 일행 중 둘이 빠져나간 탓에 조르마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리에 앉은 나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차 밖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아니, 일이 이렇게 된 거 나도 한 번 나가 볼련다.”
“셈무스 씨는 어쨌든, 다른 분까지 저러니 조금 호기심이 생겨서. 나도 이래봬도 칼밥 먹고 사는 사람이거든.”
모험가가 되고 나서는 밥 먹듯이 해야 하는 것이 몬스터 퇴치인데, 생각해 보니까 나는 지금까지 직접 몬스터를 잡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노, 노르드 씨도 가실 겁니까?”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는 조르마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나한테도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안전하게 싸워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어.”
놀라는 그에게 나는 당당하게 다굴을 깔 것을 선언하며 검을 뽑았다.
─스릉.
허리춤의 검을 쥐자 묵직한 감촉이 은근히 짜릿했다. 노예 시절에도 몇 번 써 본 적 있는 검이었다.
“그럼 다녀온다.”
나는 검을 쥐고서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쪽 세상에는 몬스터라는 생물이 존재한다.
정확한 학술적인 구분으로는 여러 분류가 있으나, 거미를 곤충이라고 부르듯이 대충 인간에게 해가 되는 생물은 모두 ‘몬스터’로 퉁쳐 버리는 경향도 보인다.
이 몬스터는 모험가라는 직업에 수요와 공급이 생기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던전이나 유적에 들어갈 때마다 약방의 감초, 편의점의 삼각김밥, 대학원생의 다크서클처럼 기본 옵션으로 딸려나오는 생물들이야말로 몬스터다.
그래서 모험가들이 몬스터를 죽이고 해체해서 이빨이나 여타 부위를 팔거나 하는 행위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세상 귀여운 여자애가 벌레 한 마리 못 잡아본 얼굴로 코볼트의 눈깔에 칼을 꼽고, 뒤진 시체에서 이빨을 뽑아 흐뭇하게 품에 갈무리하는 모습조차.
이세계에서는 평화로운 일상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흐랴아아아압!!!”
그딴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기 사람들이 뒤지게 야만스럽고 미개한 것도 피치 못 할 일이었다.
코볼트 대가리에 경쟁이라도 하듯이 앞다퉈 풀 스윙 칼질을 날려대는 일행의 모습에 나는 감탄마저 들었다.
“개판이구만.”
가장 먼저 뛰쳐나간 셈무스는 어느샌가 대열의 앞쪽에서 코볼트들의 대가리를 수확하는 중이었다. 뭉툭한 양날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쥐와 개를 반반 섞은 모습의 털복숭이 대가리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자네도 참가할 생각인가?”
내 머리보다 위에서 누군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말라깽이 아재가 어느새 짐칸에 맡겨둔 활을 챙겨서 마차 위에 올라간 것이었다.
높은 크기의 마차는 몬스터를 쏴 죽이기 딱 좋은 위치여서 저 아재 말고도 상단 소속 모험가들이 활을 들고 서 있었다. 이미 협의가 끝났는지 손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만류도 하지 않았다.
“예. 좋은 연습 상대가 될 것 같아서 말이죠.”
“연습? 자네, 싸워본 경험이 별로 없나 보군.”
“그렇습니다. 딱 봐도 제가 뭐 싸움의 달인으로는 보이지 않잖습니까.”
“체격이 좋길래 혹시나 했지.”
대답하면서 아재는 화살을 날려 코볼트 한 마리의 어깨를 꿰뚫었다. 셈무스의 옆구리를 노리던 코볼트는 일방적인 SM 플레이에 좋아 뒤지는 시늉을 하며 나자빠져다.
“쯧.”
그런데 말라깽이 아재가 짧게 혀를 차는 것을 보아하니 머리를 노리려다 빗나간 모양이었다. 저 아재도 남 뭐라 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은 아닌 것이다.
“으랴압!!”
반면 최전방에서 끼요요욧 거리는 셈무스는 대단했다.
엄청난 활약에 아예 손님이 아니라 에이스 취급을 받으며 주변 모험가들이 서포트로 돌아섰다. 얼스터인의 전투력에 대한 평가는 일절 과장이 없었던 것 같다.
저 정도면 내가 봐 왔던 실버 클래스 모험가랑도 비빌 만 하지 않을까.
예르나가 유적 탐색 때 고용하는 사람은 주로 실버에서 브론즈 클래스의 모험가였는데, 이들은 체감 상으로는 대충 10만에서 100만 유튜버 정도의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서 셈무스는 데뷔 초 때부터 100만 유튜버의 포텐셜을 뽐내는 하꼬 방송인인 것이다.
빨갱이 외노자 새끼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 안면 정도는 터 두는 게 좋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브론즈까지만 버스 태워달라고 부탁해 봐도 되지 않을까?
“자네는 안 갈 건가? 싸우러 온 것 아니었나?”
“이크. 그랬죠 참.”
말라깽이 아재의 지적에 나도 칼을 꼽고 앞으로 나섰다.
코볼트들 수준의 저위 몬스터들은 행동원리가 간단하다.
1. 자기보다 덩치 큰 상대는 이기기 힘들다.
2. 자기보다 숫자가 많은 적들은 무섭다.
평소에는 딱 이 2개 정도만 대가리에 넣고 살다가, 벌레나 작은 동물을 잡아먹으며 산다. 그러다 번식하고 수를 불려서 지들이 좀 쎄진 듯 한 착각이 들 무렵에는 지나가던 인간들을 노려서 공격한다.
“케륵?!”
그리고 대부분은 역공을 맞고 뒤진다.
마차 주변을 노리고 달려든 코볼트 한 마리에게 검을 휘두른다. 브람마톤 교수의 기초 체력단련에는 철근을 휘두르는 운동도 있었기에 내 검의 궤적은 나름 깔끔했다.
“캬르아아악!!”
근데 시발 맞추는 훈련은 안 했지 참.
목을 노리고 휘둘렀건만 칼날은 코볼트의 턱을 반쯤 썰어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징그러운 비쥬얼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꺼져, 임마!”
“갸악!”
좀 역겹기는 해도 이까짓 것에 일희일비할 시기는 지났다. 내 두 번째 공격을 맞은 코볼트는 피를 뿜으며 나자빠졌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코볼트들은 무기를 사용할 지능도 없어서 나로서도 잡기 힘든 상대는 아니었다. 덩치도 드워프보다 작고.
“쥐새끼 컷.”
근력이 세진 덕분에 체구가 작은 코볼트 정도는 일도양단 하고도 남았다. 칼이 시체에 박혀서 낑낑댈 것도 없이 나는 바로 다음 사냥감을 향해 넘어갔다.
휘융─ 퍽!
“캬아아아악!!”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근처에 있던 두 마리 중 왼쪽 놈에게 제대로 명중했다.
팔을 휘저으며 날뛰는 그 놈을 칼질 한 방에 닥치게 만들어 준다. 덤벼드는 놈은 걷어차서 자빠트리고 검을 꼽는다.
“흐흐.”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쉬웠다.
상대가 약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예르나 그 망할 년을 따라다니며 고생한 경험도 컸다. 던전이나 유적에서 몬스터가 죽어나가는 것을 질리도록 봐 온 덕분에 나는 어느새 피 튀기는 싸움에도 적응했던 것이다.
[고작 이걸로 끝인가. 너도 수고했다, 노랭이.]
그때 전투를 끝낸 셈무스가 내게로 다가왔다.
셈무스는 자기 검을 닦은 천을 나한테 줬다. 저 새끼 나름대로의 친애 표시일까.
[감사합니다.]
냉큼 천조각을 받아든 나는 내 칼을 닦으려 했다가 눈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내 검은 코볼트의 피와 지방으로 범벅이 돼 있었던 것이다.
[검 솜씨가 영 엉망이군.]
[…그런 것 같네요.]
셈무스의 칼에는 피 밖에 묻지 않았는데 내 칼은 거의 뭐 돼지 뒷다리살이라도 손질한 것처럼 씹창이 났다. 피로 새빨개진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것이 어떻게 닦아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그 천은 주지. 어차피 헝겊이다. 닦는데 써라.]
[깔끔하게 닦으려면 물이 있어야겠는데요.]
[지방을 떼내고 물기만 털어내면 된다. 어차피 전장에서는 매번 손질할 수 없다. 나중에 갈고 기름칠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충분하다.]
셈무스는 핏자국이 남은 칼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하지만 노랭이. 너는 전사가 아니군.]
[아직은 그렇습니다.]
좆밥 취급을 받았으니 자존심에 거슬릴 법도 하건만, 노랭이 발언이 더 빡치는 건 왜일까.
내가 베테랑 전사가 아닌 건 팩트라서 0의 데미지를 받지만 노랭이 발언은 인종차별이라 관통뎀이 들어와서 그런가.
[요령이 없는 자에게 검은 다루기 힘든 무기다.]
[예. 들어는 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군요.]
소설이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종종 검은 소모품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실제로도 라이트세이버가 아니고서야 생물과 싸우다 보면 칼에는 피랑 지방이 묻는 법이니까.
날 부분이 예리함을 잃은 검은 그냥 몽둥이에 불과하다.
1~2kg 무게의 철 몽둥이에 쳐맞고도 그게 흉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식이면 처음부터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편이 낫다. 야구 빠따도 엄연한 흉기니까.
[무기를 바꾸는 편이 나을까요?]
나는 셈무스에게 물었다. 존나 먹고 싸고 싸우고 섹스하다 죽는 야만인이니만큼 이런 질문을 하기에는 그가 제격이다. 존나 나만 질문에 대답하는 것도 억울하고 말이지.
[좀 더 많은 실전을 겪던가, 창을 써라.]
[창은 좁은 곳에서 쓰기 힘들지 않습니까?]
[장점도 단점도 결국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어떤 무기를 쓰든지 간에.]
슥 주변을 둘러본 셈무스는 현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단련과 실전만이 답이다. 달인의 경지에 이르면 맨주먹으로도 창을 이길 수 있다.]
혼자서 코볼트 십수 마리를 3분 컷 한 남자의 말은 과연 무게가 달랐다.
“이제야 왔군! 어서들 오게!”
악전고투하며 칼을 닦은 내가 셈무스와 마차로 돌아오자, 마차 안에서 기다리던 뚱보 아재가 기뻐하며 외쳤다.
“노르드 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만 빼놓고 얘기를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요.”
왜 저렇게 좋아하나 했는데 조르마가 대신 설명해 줬다.
나 빼고 그냥 진행했어도 상관 없었는데. 나랑 같이 들어온 셈무스도 지 고향 썰풀이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히히이잉!!
아무튼 우리가 돌아오자 마차는 다시 출발했고, 조르마는 다시 자신의 체험담을 풀었다.
“흠. 그래서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죠?”
“얼스터인들의 마을에 가는 건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곳까지 했었다네. 그래. 대체 이유가 뭔가?”
뚱보 아재가 땀을 바지에 슥슥 닦으며 물었다.
“예. 그게 정말로 아쉽게도 제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여성 분들은 전부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시더라~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