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009)

경비원 조지가 창을 들고 서 있다가 물었다.

그의 말에 나는 살짝 억울해졌다. 시발. 21세기에서 짱꼴라 코로나 사태도 버텨냈던 내가 마스크 없찐 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

“그, 꼭 필요한 겁니까? 제가 들은 얘기에서는 따로 마스크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은 없었는데요.”

나는 이게 다 미신 같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까짓 마스크 따위 안 껴도 되는 물건이고, 다른 사람들은 쫄보라서 끼는 것이기를 바랬던 것이다.

“아, 예전에는 별로 신경을 안 썼다더군요. 하지만 최근에는 마법사 길드에서… 뭐라더라? 유독 가스? 를 조심하려면 마스크를 쓰는 편이 낫다고 하더랍니다.”

근데 시발 존나게 합리적인 이유였다.

하수도에 환기구라고는 배수구가 전부다. 반쯤 밀폐공간인 곳에 오폐물이 가득 차 있으니 유독 가스가 발생할 만도 했다.

“아니, 그럼 마스크도 막 방독 마법 같은 게 걸려있는 걸 구해야 합니까? 아이언 클래스는 돈도 없는데 어떻게?”

“방독 마스크요? 아뇨. 저희는 그냥 천 마스크 쓰는데요.”

뭐 이 시발? 그럼 마스크고 나발이고 의미 없잖아.

“그렇군요. 천 마스크.”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독 가스 앞에 천 마스크 따위는 있으나 마나일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의뢰 보수보다 더 큰 돈을 들여서 방독면을 구해오는 것도 바보짓이었다.

‘그냥 이대로 들어가도 되겠지 뭐.’

위험한 거였으면 브람마톤 교수님이 적어 두셨겠지. 유적 및 던전에 관한 챕터에서는 방독면이나 해독수단을 챙겨가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하수도의 가스는 신경 꺼도 안 죽는 수준일 것이다.

티르시는 주문을 외우는데 쓴 완드를 만지작거리며 살짝 미안한 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아직 배움이 모자라서 노르드 씨한테까지 마법을 걸어드릴 여력은 조금….”

“흐흐. 제 잘못인데 왜 티르시 씨가 죄송해 하세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다 이해합니다.”

나한테 상태이상내성 버프를 걸어줬다가 여차할 때 마법을 못 쓰면 안 된다. 원래 힐보다 딜을 우선하는 것은 코리아 게이머의 국룰이었다.

까짓것 머리가 띵하면 끝나고 신전에 가면 된다. 나도 저축해 놓은 돈은 꽤 되니까.

“저, 저기….”

콕콕.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내 등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시야에 없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프란체스카 씨?”

“아, 네. 저기… 이거 필요하시면 쓰세요. 어제 새로 산 천으로 만든 거라 깨끗해요.”

프란체스카는 두 손으로 마스크를 벌려서 내게 보여줬다. 검은 천으로 만든 마스크는 본인 말마따나 깨끗해 보였다.

“아니, 하지만 제가 이걸 받으면 프란체스카 씨가 쓸 마스크가 없지 않나요?”

“저는 걱정 마세요. 드워프는 튼튼하거든요. 냄새나는 걸 빼면 고향의 지하광산이랑 별 다를 것도 없구요.”

“…그렇습니까?”

지하에도 도시를 세우는 것이 드워프들이다. 유독 가스나 산소부족에 대한 내성은 다른 인간종족보다 뛰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쓰고 돌려드릴게요.”

어쨌든 간에 저렇게 말하는데 사양하는 것도 실례였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마스크를 받아 썼다.

─스읍.

마스크를 쓰고 호흡을 해 봤다. 그러자 약간 청량감 있는 향기와 함께 여성 특유의 체취가 풍겼다.

향긋하긴 한데 존나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여성이 입던 옷가지에 코박죽하는 변태가 된 것 같다.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우리를 지켜보던 조지가 자기 발치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들었다. 커다란 랜턴과 지도였다.

“랜턴이랑 지도는 절대 분실하지 마십쇼. 지도에 적혀있는 대로만 이동하시고, 손상된 하수구나 시설 부분을 따로 이 종이에다가 적어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티르시는 장비를 받아들고 우리에게 말했다.

“랜턴이랑 지도는 손이 남는 제가 들겠습니다. 하지만 불측의 사태에 대비해서 기록은 다른 분들한테 부탁하고 싶은데, 혹시 글을 쓸 줄 아시는 분?”

“제가 쓸 줄 압니다.”

“저도요.”

“뭐야. 나만 문맹인가? 이거 나이를 헛 먹었군 그래.”

까막눈 겐트릭을 제외한 전원이 글을 쓸 줄 알았다. 그에 겐트릭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티르시는 나와 프란체스카를 번갈아 보았다. 종이를 받은 것은 프란체스카 쪽이었다.

“전사 분보다는 도적 분한테 맡기는 게 맞겠죠. 기록하는 도중에는 두 손이 막힐 테니까요. 갑작스러운 전투상황에 대처하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합당한 의견이라 반발은 없었고, 우리는 드디어 하수도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 삐걱….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화장실 하수구 같은 냄새가 충만했다.

존나 3초만에 나도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불러다 쓰고 싶어졌다. 일당 3쿠퍼로 누구한테 하청을 때리는가 하는 문제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내려오자마자 바로 고장난 곳이 있군.”

겐트릭이 랜턴으로 비춰진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입구. 감옥처럼 세로로 철창이 붙어 있는 원형의 배수로였다. 철창 하나가 아예 통째로 빠져 있다.

“하수구? 아니, 통로네요.”

“비상탈출구군요. 지도를 보니 하수도 안쪽에 몇 개 쯤 더 있습니다.”

우리 다음으로 내려온 티르시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탈출구라. 급류가 들이닥칠 때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탈출하라고 만든 겁니까?”

“글쎄요? 무슨 용도인지는 몰라도, 자물쇠가 걸려 있어서 저희는 못 써요.”

“까비.”

“탈출해야 할 일이 없기를 바래야겠구려.”

겐트릭이 마스크 위로 코를 슥 닦았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이 영감아.

“프란체스카 씨? 종이에다가 A01번 하수통로 철창 결락이라고 기록해 주실래요?”

“철창 결락이요? 네, 알겠습니다.”

티르시가 지도를 보고 읽은 번호를 프란체스카가 종이에 받아적었다. 손재주 좋은 드워프답게 둥글둥글하니 예쁘장한 글씨체였다.

근데 철창 결락이니 뭐니 하니까 군대에서 철조망 조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세계에 떨어져서도 염병할 군바리 시절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이동하죠. 밤이 되기 전에 끝났으면 좋겠네요.”

티르시의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정찰을 개시했다.

저벅…. 저벅….

나와 겐트릭은 암묵의 룰에 따라 선두에 서서 이동했다.

전사는 언제나 선두에서 탱킹하는 역할이다. 심지어 우리는 존나 마법도 못 쓰고 기타 능력도 없으며, 심지어 남자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마법사&도적 여캐들의 몸빵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연의 이치였다. 이곳은 마초이즘과 가오에 잠식된 이세계니까.

우리는 하수도 안을 한참 동안 돌아다녔다. 런던의 하수도 비슷하게 생긴 내부는 어둡고 냄새나는 것만 눈 감아주면 꽤 버틸 만 했다.

“다리의 밧줄이 훼손 돼 있군. 저것도 기록해야 하는가?”

“어…. 일단 적어둘게요.”

“저쪽 하수도 입구, 벽돌이 무너졌는데요.”

“저기는… 안쪽으로 도는 코너군요. 지도에는 따로 기록된 번호가 없는데 어떡하죠?”

“하수통로 D04랑 D05 사이라고 적는 건 어떻습니까?”

“괜찮네요. 그렇게 하죠.”

우리는 의뢰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회중시계가 있는 티르시의 말에 따르면 벌써 3시간 가까이 자났다. 지도에 기록된 하수도 내부는 길고 복잡했기에 효율적인 동선을 염두하며 걸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마냥 걷기만 하기에는 따분했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티르시 씨는 왜 이번 의뢰에 지원하셨나요? 마법사 님들은 그… 좀 더 좋은 의뢰를 받으셔도 될 텐데.”

프란체스카가 우리 보폭에 열심히 따라오며 물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차였기에, 나는 걸어가면서도 뒤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승급을 위해서에요. 실버 클래스가 아니라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도를 겨드랑이에 낀 티르시는 목에 건 플레이트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골드 클래스까지는 의뢰 수행 이력이 승급조건의 모든 것을 말하죠. 하지만 그 너머… 백금이나 신은(神銀)으로 된 플레이트를 얻기 위해서는 모험가 길드 연합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 돼요.”

모험가 길드 연합.

길드라는 말이 ‘조합’이라는 뜻임을 생각해보면 기상천외한 네이밍이다. 모험가 조합 연합이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실제 의미는 이름 그대로였다.

“모험가 길드가 모여서 만든 단체 말씀이시구려.”

겐트릭 할배도 돌아보며 얘기에 끼어들었다. 티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국에 지부를 두고 길드와 나라 사이의 중재를 도맡는 기관이에요.”

티르시의 표현대로였다. 나 역시 모험가 길드 연합이 하는 짓을 보고 들으면서 그들을 대충 이세계판 BE폭력 UN으로 간주했다.

이권단체에 가까우면서 때때로 무력개입도 해대는 단체. 나로서도 아주 적절한 비유인 듯 싶었다.

“플래티넘 이상이 되려면 따로 조건이 필요합니까?”

호기심이 동한 나도 티르시에게 질문했다. 내 존경스런 지도교수인 브람마톤 센세께서도 모험가 등급은 골드였기 때문이었다.

카르미네 대학 교수직을 해내는 분이 실력이 모자라서 골딱이에 그칠 리는 없다. 실제로 티르시의 말에서는 뭔가 다른 조건이 있다는 뉘앙스가 풍겨왔다.

“승급을 시키는 기준은 있겠죠. 단지 연합 측에서 정식으로 조건을 공표하지는 않아서 모릅니다. 저도 그저 개인적으로 짐작하고 있는 게 다에요.”

품에 플레이트를 돌려넣으며 티르시가 대답했다.

“단지 반쯤 확실시되고 있는 점은, 다른 집단에 속한 모험가는 백금 이상의 등급을 달기 어렵다는 겁니다.”

띠용? 왜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권이랑 자존심 문제군요.”

브람마톤 교수님이나 나처럼 ‘다른 업계’에서도 활동하는 사람에게는 박하게 군다는 소리였다.

고고학자한테 플래티넘이나 미스릴 플레이트를 준들 우리가 생업을 때려치고 모험가 업계에 뼈를 묻지는 않으니까.

“…놀랐습니다. 이해가 빠르시군요.”

티르시는 짐짓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설명을 듣지 않고도 눈치를 까버리자 감탄한 모양이었다.

“어? 어? 무슨 뜻인가요?”

정작 처음 질문을 했던 프란체스카는 아직 영문을 몰라 했고, 그래서 나는 짧게 설명을 해 주었다.

“다른 대장간이 일을 잘한다고 동네방네 칭찬하고 다니는 대장장이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그 상대방도 자신한테는 라이벌이고, 남을 칭찬해도 자기한테 도움은 안 되니까요.”

“아─. 이해가 가요. 그래서 ‘자존심이랑 이권 문제’군요.”

“정확해요. 특히 마법사 길드의, 후원자가 없는 마법사를 상대로는 그런 경향이 크구요."

티르시는 분하다는 것처럼 말했다.

“대놓고 차별하지는 못하니 여러가지 흠을 잡습니다. 루키 시절에 의뢰를 고를 때 이윤을 취하려고만 했던 경향이 보인다느니, 다른 모험가들과 협업하려는 마음가짐이 없다느니, 그런 식이죠.”

“사람 사는데는 다 똑같군요.”

팀원들의 협조성이 모자라서 감점.

혼자 조별과제를 똥꼬쇼한 조장들이 흔히 듣는 소리였다.

조원들이 죄다 빤스런해서 혼자서 존나 지랄해가며 만들어가도 일부 교수들은 저딴 지랄을 한다. 나도 벌써 몇 년도 전의 일인데 꼭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빡쳤다.

“그러면 이번 의뢰를 받으신 것도 일종의 봉사활동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군요.”

“…여러분들과 함께 의뢰를 수행하는 걸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실례했습니다. 표현이 나빴군요. 그냥 제가 소문으로 들어본 곳에서는 봉사 점수도 계산하고는 해서.”

1995년 태생인 내가 명문고등학교 입학을 노리던 무렵에는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서 봉사활동 시간을 채워가야 하고는 했다.

그 시절이 생각나서 한 말이었지만 확실히 좀 듣기 그랬을 수도 있겠다. 내가 사과하자 티르시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니까요. 사실은 기피되는 의뢰를 파티장으로서 수행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어요.”

“별로 나쁠 것 없잖습니까? 피차 상부상조 하는 거죠.”

나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는 브론즈 티어 마법사님께 도움을 받고, 그 마법사 님도 득을 본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티르시는 멋쩍은 것처럼 대답했다. 겐트릭과 프란체스카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몰래 웃음을 터트렸다.

“앗, 저쪽 좀 보세요. 저기도 하수구 뚜껑이 나가 있어요.”

그때 프란체스카가 반대편 하수구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하수구는 이물질을 막기 위한 뚜껑이 뽑혀 있었다.

“아, 정말이네요. 으음. 그러니까, 저쪽 하수로는….”

티르시가 지도에 랜턴을 비추며 하수로 번호를 찾는 동안 우리는 발을 잠시 멈췄다.

“후우…. 그나저나 하수도가 왜 이리 고장나 있는 겐가? 어디 양아치 놈들이 장난 삼아 부수기라도 하나?”

무릎을 주무르는 겐트릭이 불현듯 짜증을 냈다. 3시간 동안 10개를 넘는 문제를 발견했으니 끝없는 일감에 빡쳐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사람 사는 곳에 기어드는 몬스터는 양아치보다 더한 것들이잖습니까.”

지구에서나 여기에서나 철조망을 씹창내는 생물은 언제나 유해조수들이었다.

하수도에 사는 생물들이 지들 지름길 만든다고 이것저것 부숴대고 지랄이니 우리만 고생하는 것이다.

“몬스터가 그런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겐트릭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놓고도 생각도 못한 듯 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세계인들의 지식 수준에 이번에도 1패를 적립해 주려고 했는데, 이어지는 말에는 굳어버렸다.

“그러면 왜 우리는 지금껏 몬스터 한 마리 못 만났겠나?”

“…어어? 그런가?”

존나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하수도를 곱창 내놓은 것이 몬스터라면 여기서 몇 시간을 돌아다닌 우리는 진작에 몬스터와 생존권을 두고 다이다이를 깠어야 정상이었다.

“…그러게요? 몬스터가 아니면 뭘까요? 사람은 하수도를 망칠 이유가 없을 텐데.”

프란체스카도 필기 종이를 내려놓고 의문을 드러냈다.

“몬스터가 원인은 맞을 텐데요. 그러고보면 마법사 길드에서 풀어놓은 청소용 슬라임도 보이질 않네요?”

우리 셋이 이야기하자 티르시도 그렇게 말했다.

“어…….”

게임 퀘스트처럼 그냥 시키는대로 하느라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조금씩 적응해가던 어두운 하수로가 갑자기 기괴한 생물의 위장처럼 보였다.

사람은 부수지 않았을 거고, 몬스터는 보이지 않는다.

“몬스터가 부쉈는데, 그 몬스터가 안 보이는 거라면….”

나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내고자 입을 열었다.

“…그 몬스터들이 모종의 이유로 없어졌다든가?”

그리고 내가 그 말을 입에 담자마자, 그것들은 나타났다.

파삭.

파사파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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